[전남일보]교육의 창·윤영백> 나의 민원 일지 2 - 여중생 K와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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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교육의 창·윤영백> 나의 민원 일지 2 - 여중생 K와 H
윤영백 광주여자상업고등학교 교사
  • 입력 : 2023. 05.14(일) 13:57
윤영백 교사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다’고 교사를 토닥이는 날이다. 예전에는 교사들에게 묵직하게 선물을 안겨주는 날인 적도 있다가, 재량휴업이 대세일 때도 있었다가 다시 등교하는 곳이 많아지고 있다.

멀뚱멀뚱 넘어가기도 머쓱해서 행사를 가볍게 하는데, 첫 시간에 학급 행사를 한다고 한다. 제발 나를 향한 감사는 하지 말아달라 우리 반에 정색하며 당부했는데, 더러는 서운해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대신 눈에 보이는 선생님 말고, 추억에 보이는 선생님께 문자 편지를 쓰기로.

기념식은 무엇인가를 상기하고, 축하하는 일인데, 기념식의 진정한 힘은 무엇인가를 감추고 전가하는 데 있지 않을까 생각할 때가 있다. 시끌벅적한 사랑 이벤트로 사랑하지 못했던 평소 일상을 감추기도 하듯이.

학생일 때는 그 자신이 폭력의 원인이자 제도의 강폭함을 그대로 학생에게 내리꽂던 담임에게 스승의 날 노래를 불러주면서 평소의 폭력을 ‘참 되거라, 바르거라’로 해석하자고 뭉개는 것 같았고, 교사가 된 지금은 더 이상 스승으로 헤엄칠 믿음이 바짝 말라버린 현실을 오글거리는 노래로 감추는 느낌이다.

특히, 언젠가 이맘때 학교를 떠난 K의 사건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K는 연약한 고슴도치 같았다. 제 몸 가시는 못 보면서, 곁을 떠나는 동료들에게 차갑다 했다. 담임이었던 나는 이들 사이를 오가며 얽힌 마음을 풀다가 코로나로 쓰러진 사이 고슴도치 엄마가 멀어진 친구들을 덜컥 학폭으로 신고했다. 신고의 근거는 말을 씹었다, 째려봤다, 냉담하게 따돌렸다 등인데, 이걸 어떻게 제도적으로 풀겠나.

학폭은 가피해를 증명해야 하는 시공간을 연다. 증언자를 구하는 과정은 고스란히 갈등의 확산 과정. K는 증언자를 구하는 일도 서툴렀다. ‘증언하지 않는 것도 폭력이야’ 옆 친구를 몰아세웠더니 고슴도치 가시가 얼마나 불편한지 소문만 커졌다. 소문만큼 K의 옆자리는 더욱 휑해졌다. K를 위해 증언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우르르 몰려가 K에게 불리한 증언이 쏟아졌다. 고슴도치는 학급 평화를 망치는 존재가 되었다.

자기를 빼놓고 약속을 잡아 속상한 정도였던 사건이 폭력으로 신고되고 학폭위 절차를 거치면서 엄청난 폭력이 공간을 흔든 후 쓰나미가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K의 엄마는 자기 아이 마음을 상하게 한 아이들을 왜 처음부터 강하게 응징하지 않았냐고, 혼자인 K의 고통에 왜 답하지 않냐고 담임을 몰아세웠고, K를 불리하게 증언한 아이들과 그 부모는 왜 담임이 문제아 편만 드냐고 담임을 몰아세웠다. 제도가 빌려준 힘도, 학생과 보호자의 믿음도 없는 곳에서는 갈등을 풀려고 바둥거릴수록 그 힘마저 갈등을 만드는 힘으로 빨려 들어갔다.

특히 H는 고슴도치 탓에 학급이 망가졌다 울분이 강한 학생이었다. 담아선 안 되는 말도 입에 담았다. 한참 위로해주다 결국엔 엄하게 경계를 세웠는데, 이 대목에서 그 부모가 따지러 학교에 왔다. 대화가 불가능했다. 특히, 그 아비는 수업 중 ‘이러면 안 된다’고 가르치는 바로 그 방식으로 말했다. 일방적 쏟아붓기. 몇 초도 못 견디고 말 끊기, 말꼬투리 잡아 패대기치기. 이야기에 아무런 통일성도 없고, 화제가 널뛰듯 해서 녹음해 두면 좋은 수업자료가 될 만큼 완벽했다. 교장 와라, 넌 저리 가라. 할 필요가 있는 말, 없는 말. 할 수 있는 말, 없는 말. 예의를 지켜 말하자고 하면 원래 말투가 그렇단다. 콸콸 흐르는 하수구에 한숨밖에 안 나왔는데, 그 한숨도 먹잇감으로 삼아 공격한다. 선생님이 보고 들은 일엔 CCTV 찍었냐 하고, 자기 아이에게 들은 일은 막무가내 대포알로 삼았다. 내 자식 믿지, 누구를 믿냐며.

그런 우악스러움을 교사들이 묵묵히 당해주는 건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교실에서 얼굴을 맞대야 할 아이, 그 보호자와 밑바닥까지 첨벙거리며 험한 꼴을 보지 않으려고 가까스로 품위를 지키고 있는 것임을 이해하기는커녕 자신은 기꺼이 그럴 수 있음을 무기 삼아 마음껏 우악스러웠다. 마구잡이로 베어낸 숲 안에서 살아야 하는 제 아이의 생태도 삭막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가 떠나고 오랫동안 무엇인가에 물려 뜯기는 느낌에 시달렸다.

이렇게까지 교사를 존중하는 마음과 믿음이 가뜩이나 말라 있어서 삐끗하면 교사는 기껏해야 무능력자, 못하면 폭력의 공범으로 몰린다. 그런데, 정부와 교육 당국이 학교폭력을 해결하는 방식은 ‘모든 유형의 지구상 폭력을 학폭 안에 적어넣고’ ‘온갖 까다로운 규정과 절차를 도입하여’, ‘학교폭력을 뿌리 뽑겠다’고 선언하는 식이다. 매뉴얼 위를 걷는 발걸음이 서툴거나 삐끗하면 그 일을 처리하던 사람이 책임을 뒤집어 쓰고 추락하는 구조.

다양한 존재들이 뒤섞이면 고유의 경계가 충돌하는 법이고, 그런 충돌을 갈등이라 부르며, 갈등을 딛고 조화롭게 섞이는 법을 하나하나 배워가는 일이 성장이고, 그런 힘을 북돋는 것이 교육일 것이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진심과 경험이 교사 전문성의 알맹이일 테고, 그런 알맹이가 꽉 찬 사람이 있다면 스승의 은혜에 감사한다고 노래를 불러줄 텐데 이젠 학생도 학부모도 제도도 더 이상 그런 걸 교사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교사 스스로도 그런 포부를 하나 둘 내려놓게 되고.

배움의 기회가 없는데, 어찌 가르침이 있고, 스승이 있겠는가. 교사들이 스승으로 승천할 수 있는 교육공동체의 강물이 말라 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스승의 은혜를 노래하는 일은 무엇이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