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유골, 5·18 당시 해남 사망자 가능성 높다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518
발굴 유골, 5·18 당시 해남 사망자 가능성 높다
해남 예비군 훈련장서 3구 발견
당시 해남대대, 지역 3곳서 총격
“빈 관 3개·시신 7구” 증언 이어져
“해남의 5·18 항쟁역사 발굴해야”
  • 입력 : 2023. 05.16(화) 18:46
  • 김혜인 기자 hyein.kim@jnilbo.com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지난 14일 해남군 해남읍 백야리 예비군 훈련장에서 신원미상의 유골 3구를 발견해 발굴작업을 진행했다.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제공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가 16일 발표한 해남 백야리 예비군 훈련장에서 신원 미상의 유골 3구 발굴에 대해 5·18 당시 해남 곳곳에서 31사단의 총격으로 사망한 민간인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조사위에 따르면 1980년 5월21일부터 23일까지 해남 일대에는 육군 31사단 8539대 제2대대(해남대대) 계엄군이 봉쇄 작전 임무 수행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무차별 발포로 최소 3명에서 7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등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조사위에 따르면 당시 해남지역 시위대가 관내 계곡지서, 옥천지서와 해남경찰서 무기를 탈취한 뒤 해남대대에도 무기를 달라고 압박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해남대대는 병력을 배치하려 했으나 대부분이 목포에서 벌어지는 시위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했던 터라 지역 방위병 약 100여명을 동원해 우슬재와 마산면 상등리 일대에 차단 작전을 전개했고 교전이 발생했다.

조사위가 확보한 장윤태 해남대대장의 진술을 토대로 시위대를 진압하던 해남 교전지는 총 3곳인 것으로 추정됐다.

△5월 23일 오전 6시께 해남대대 앞 국도상에서 시위 버스 1대를 향한 군의 총격 △5월 23일 오전 6시10분께 우슬재 배치 병력의 총격 △5월 23일 오전 10시50분께 마산면 상등리에서 시위대 약 50여 명이 함께 타고 있던 버스 2대에 가한 총격이 그것이다.

조사위는 이번에 발견된 유해 3구가 가장 마지막 총격전이 일어났던 마산면 상등리와 관련성이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육안 상 확인한 유해의 상태가 최소 40여년 전으로 판단되며, 3명의 증인이 다른 시간, 공간에 있었음에도 매장 위치가 동일했다는 이유에서다.

지금까지 해남에서 발견된 유골은 총 5구로, 지난 2021년에 예비군 관리대대 인근 야산에서 발견된 2구의 유해는 유전자감식 절차를 밟고 있다.

총 5구 중 해남에서의 공식 5·18 사망자(나주 출신, 영암 출신) 중 1명일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현재 해남에서 공식 사망자 2명 중 1명은 시신이 확인됐지만 나머지 1명은 여전히 행방불명 상태다.

장 전 해남대대장의 진술에 의하면 해남 사망자 2명은 해남군에서 지원해 준 관에 넣어 안치했다가 1980년 5월26일 장흥지청 검시 후 1명은 가족에게 인계, 1명은 6월2일께 부대 뒷산에 매장했다. 하지만 묘지의 흔적은 없어졌다.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희생자는 영암 출신으로 추정된다.

이와함께 공식 사망자 2명 외에도 다수의 사망자가 있다는 증언은 줄곧 제기돼 왔다.

해남동지회의 자체 조사를 보면 당시 군 부대에서 7구의 시신을 처리하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있었다. 또한 당시 해남군청의 직원이 군 부대로 3개의 관을 넘겨줬다는 고백도 있어, 최소 3명에서 7명 가량의 사망자가 있었고 이를 해남대대가 수습·처리했다고 추정된다.

김병일 해남동지회장은 “정치적 이유로 해남에서의 5·18민중항쟁은 광주나 다른 지역에 비해 잘 조명되지 않아 안타까웠다. 또한 양심선언을 했던 해남군청의 직원도 뭇매를 맞아 깊은 상처를 받았다”며 “정 전 해남대대장을 비롯한 계엄군들은 상처받은 해남군민들과 오월영령에게 하루빨리 사죄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어 김 회장은 “5·18민주화운동 기간에 해남에서도 투쟁하다 사망한 동지들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도 적극적인 진상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혜인 기자 hyein.kim@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