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서석대>栗亭店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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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대
[전남일보]서석대>栗亭店 복원
최도철 미디어국장
  • 입력 : 2023. 07.12(수) 16:04
최도철 국장
‘떨어질 낙(落)’자를 써 징벌로 곡해할 수 있으나, 전통사회에서 낙향(落鄕)은 선비의 미덕이었다. 지조 있는 선비가 곧은 심지를 드러내 세간의 우러름을 받았던 낙향 사례는 우리 역사에 수없이 많다.

역성혁명으로 조선 왕조를 세운 이성계가 고려말 대학자 이색을 찾아가 ‘나를 버리지 말아 주시게’ 하며 출사를 간청했다. 목은은 단호했다. ‘나라안에 내가 앉을 곳이 없소. 망국의 대부는 그저 낙향해 있다가 죽으면 고산에 묻힐뿐이요’라고 답했다.

낙향을 뜻하는 귀거래(歸去來)를 십여 차례나 행한 선비도 있었다. 성리학의 비조 이황이다. 그는 왕으로부터 무려 열한번 부름을 받았지만 그만두기가 바쁘게 안동 토계로 귀향했다. 아호도 토계로 물러났다 하여 퇴계(退溪)로 삼았다.

이순신을 천거한 류성룡은 임진 7년 전쟁이 끝나자 벼슬길을 떠나 고향 하회에서 ‘징비록’을 썼다. 호남 유일 문묘18현 김인후도 세자시절 인연을 맺은 인종이 즉위 몇 달 만에 승하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낙향과는 다르게 유배(流配)는 형벌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명나라의 법전인 대명률에 따라 태형(苔刑), 장형(杖刑), 도형(徒刑), 유형(流刑), 사형(死刑)으로 나눠 죄인을 다스렸다. 귀양으로 불리는 유배형은 그 죄에 따라 다시 원근의 등급을 정했는데, 한양 기준해 2천리, 2천5백리, 3천리형이 있었으며, 반드시 장1백을 더했다. 귀양살이도 달랐다. 죄인의 배소에 가시 울타리를 만들어 가두는 위리안치, 절해고도에 유폐시키는 절도안치 등이 있었다. 도성에서 멀다보니 저 멀리 함경도 삼수, 갑산이나 전라도 변방은 중죄인을 유배보내기에 적정한 곳이었다.

1801년 11월 5일. 신유사옥으로 셋째 형 정약종은 참형을 당하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둘째 형 약전과 약용은 다시 유배길에 오른다. 삼남대로를 따라 보름을 걸어 온 형제는 나주 ‘율정점’ 주막에 여장을 풀고 이승에서 얼굴을 볼 수 있는 마지막 밤을 보낸다. 날이 밝으면 형은 무안을 지나 흑산도로 들어가고, 동생은 월출산을 넘어 강진으로 가야 한다.

다산은 ‘율정별(栗亭別)’을 지어 애끊는 마음을 토한다. “초가주막 새벽 등불 푸르스름하게 꺼지려 하는데/ 일어나 샛별보니 이별할 일 참담해라/ 두 눈만 말똥말똥 둘이 다 할 말 잃어/ 애써 목청 다듬으나 오열이 터지네/ 흑산도 아득한 곳 바다와 하늘뿐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그 속으로 가려는가”

‘율정점’의 원형을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며칠 전 나주학회에서 ‘손암·다산의 갈림길, 나주 율정’을 주제로 학술토론회도 열었다. 별리의 정한이 스민 율정점을 복원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의미있는 행보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