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쓰비시중공업 상대 2차 손해배상 소송 원고인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재림 할머니가 30일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제공 |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2차 손해배상 소송 원고로 나선 김재림 할머니가 끝내 일본의 사죄를 듣지 못하고 30일 별세했다. 향년 93세
일제강제징용시민모임(시민모임)은 이날 미쓰비시중공영 나고야항공기제작소에 동원된 피해자 김 할머니가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1930년 화순군 능주면 관영리에서 1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난 김재림 할머니는 1944년 3월 화순 능주초 졸업 직후, 현재 광주 불로동 삼촌댁에서 가사 일을 돕던 중 그해 5월경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에 동원됐다.
시민모임에 따르면 김 할머니는 “삼촌댁에는 나와 나이가 똑같은 사촌 언니가 있었고, 또 영암 사는 고모 딸(이정숙,1944.12.7. 도난카이지진으로 사망)이 있었다. 그때 일본 모집자가 와서 ‘일본에 갈래? 밥도 배부르게 먹여주고, 공부도 시켜준다’고 말했다. 그때는 먹는 것보다도 공부가 그렇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부푼 꿈을 안고 도착한 일본에서는 공부가 아닌 노역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종일 군용 비행기의 부속품을 깎는 일, 비행기 날개에 페인트 칠을 하는 일을 쉴새없이 해야했다. 숙소에 돌아오면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 정도로 피곤했다는 게 생전 김 할머니의 이야기였다.
그러던 중 도난카이 지진이 발생한 1944년 12월 7일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김 할머니는 해방 후 돌아 왔지만 사회적 시선은 곱지 않았다.
생전 김 할머니는 “결혼을 앞둔 시점에 내가 일본에 갔다 왔다는 사실을 알고 시어머니가 결혼을 엄청 반대했다. 다행히 남편과는 큰 어려움 없이 결혼생활을 유지해 올 수 있었지만 지금까지 혹여 다른 사람들에게 근로정신대로 동원됐던 사실로 인해 군 위안부로 오해를 받을까봐 어느 한 순간 마음 편히 지내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이후 김 할머니는 2014년 2월 27일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두 번째 소송 원고로 참여했다. 2018년 12월 5일 광주고등법원에서도 “피고는 원고들에게 각각 1억원씩 배상하라”며 원고 승소했지만, 미쓰비시중공업 측의 상고로 마지막 대법원 판결 소식을 기다리던 중 끝내 일본에게서 사과 한 마디 듣지 못찬 해 눈을 감았다.
김 할머니의 유족은 1남 1녀가 있으며 빈소는 국빈장례문화원 401호에 마련됐다. 발인은 8월 1일 오전 8시30분이며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이다.
김혜인 기자 hyein.kim@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