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南道’ 근원은 三南이나 광주·전남으로 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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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전남일보]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南道’ 근원은 三南이나 광주·전남으로 수렴
359.‘남도’의 출처
남도에는 ‘거시기’를 공유해온 공생체가 있고, 문화를 살찌우게 해온 예술의 맥이 있으며 무엇보다 나라가 풍전등화에 처할 때마다 우뚝 일어섰던 의로움과 슬기가 있다.
  • 입력 : 2023. 08.17(목) 15:15
삼남지도-충청,전라,경상 3도의 해안과 연안 조운 항로를 강조한 지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현재 ‘남도’라는 용어 혹은 개념은 광주와 전라남도에 한정해 사용된다. 지금의 용처로만 따지면 남도가 곧 광주와 전라남도다. 그중에서도 전라남도에 비중이 있다. 하지만 출처는 다르다. 그간 ‘남도 인문학’을 표방하고 수년간 남도의 범주나 범위에 대해 밝혀두었다. 그러함에도 오늘 다시 일러두는 까닭은 남도가 결코 광주와 전라남도에 한정되는 지리적 용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도라는 말은 도대체 어디서 온 말이고 어떻게 사용되었을까?

‘남도’라는 이름의 출처와 고 지춘상의 기억

국어사전에서는 ‘남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남과 북으로 구성된 도(道)에서 남쪽에 있는 도를 이르는 말. 둘째, 경기도 이남의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전자의 설명은 함경남도, 평안남도 등의 용례가 있긴 하나, 지금 말하고자 하는 남도의 범주에서 벗어난다. 후자의 설명이 요긴하다. 하지만 충남, 전남, 경남 등을 조합해 남도라고 이르지는 않는다. 대개 이 지역을 통칭하여 남도라 이르는 것은 삼남(三南)이라는 호명 때문이다. 삼남(三南)이라 함은 충청, 전라, 경상, 세 지역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지만 전라북도, 충청북도, 경상북도, 나아가 제주도(濟州島)까지 포괄한다. 제주도는 1946년 미군정기에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어 제주도(濟州道)가 되었다. 이전에는 전라남도에 속했다. 이곳을 조선시대부터 삼남삼도(三南三道), 하삼도(下三道), 하도(下道)라 했다. 하도는 서울로부터 아래쪽으로 떨어져 있는 지방이란 의미다. 경기(京畿)의 기(畿)가 서울 근방 500리 안쪽을 말하므로 삼남은 500리 밖 아래쪽이라는 뜻이겠다.

고 지춘상에 의하면 남도라는 이름이 빈번하게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66년에 시작된 <남도문화제>부터다. 당시 전라남도에서 제안한 용어는 <무등문화제>였다. 광주시가 1986년 광산군, 송정시를 통합하여 광주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전라남도에서 분리되었기에 이때까지는 지금의 광주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무등문화제>라는 제안을 <남도문화제>라는 이름으로 정한 이유를 지춘상은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준비회의 석상에서 거명된 <남도>라는 말이 전라남도의 남도에서 차용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딴 의미를 지닌 권역을 생각하고 명명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지춘상의 기억으로는) 행정적인 측면의 전라남도 약칭으로서의 남도를 생각해 낸 것만은 아니었다. 경기도 이남의 땅 곧 충청, 경상, 전라의 3도가 있기에 행정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민속예술 특히 민속음악에서 널리 쓰이고 있던 남도라는 용어에서 차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지춘상의 증언을 통해 확인되는 바와 같이 지금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는 ‘남도’라는 용어는 전라남도의 남도에서 따온 말이 아니다. 남도라는 말이 삼남(三南) 즉 ‘세 개의 남도’에서 빌려온 말이기에 충청, 전라, 경상을 포괄하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다른 말로 각각 호서, 호남, 영남이라고도 한다.

‘남도’라는 이름이 주로 사용된 곳은 전통음악 분야다

남도라는 용어의 출처는 삼남(三南)에 있지만, 호명의 빈도와 활용도가 높은 전통음악 분야를 추적해보면 그 맥이 대개 전라도 중심임을 발견할 수 있다. 지춘상이 예로 든 이창배의 『가요집성』(1961년 증보판)은 박헌봉이 1945년 무렵 쓴 『판소리 대강』과 불가분의 관련이 있는데, 여기에 남도창(南道唱)이라는 항목이 있고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부가, 적벽가 등 판소리 다섯 마당을 넣어두었다. 이를 일반적으로 <남도소리>라 하므로 남도소리와 가요, 남도창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된 용어다. 판소리의 기원설 중 강창문학 기원설 즉 옛이야기를 노래로 바꾸어온 역사를 전제해보면, 충청지역의 <중고제>를 포괄한다. 중고제에서 발원하여 조선 후기 중인과 궁중 패트런(후원자)들에 의한 <동편제>의 성립으로, 다시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서편제>의 재구성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경상지역의 간섭이 약해진다. 기악 독주 즉 산조(散調)가 대표적인 장르로 정착되기 전에는 충청, 전라, 경상지역을 포괄한다. 함화진이 쓴 <조선음악통론>(1948)에 보면, “신방초는 화초사거리를 창작하고 김창조는 심방곡을 변작하여 산조를 창작할새, 우조와 계면조로 분류하여 각종 악기에 탄주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심방곡’, ‘봉장취’, ‘시나위’ 따위의 장르들이 허튼가락 즉 ‘산조’로 재구성된다. 1800년도 말 심방곡의 명인은 경남 마산포의 최치학이었다고 하고 전남지역은 김창조, 한숙구, 유성천, 전북지역은 박한용, 이영채, 박학순, 충청지역은 박팔괘, 심정순 등으로 소개한다. 산조라는 장르가 삼남을 아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남 지역 시조(時調)는 경제(서울 경기), 영제(경상), 완제(전라)로 분류한다. 완제를 남도제(南道制)라고 하는데, 충청 일부를 포함, 전라에 제한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서도잡가, 경기잡가에 견주어 사용해온 ‘남도잡가’라는 호명도 대개 전라도적 맥락이 두드러진다. 이같은 용처나 용례는 수도 없고 또 해야 할 말이 많으므로 각각 따로 제목을 잡아 소개해나가기로 한다. 다만 거듭하여 정리해둘 것은, 남도라는 호명이 충청, 전라, 경상의 삼남에서 출발하였으나 광주, 전남으로 수렴 혹은 포획되었으며 그 중심에 전통음악 분야가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전통음악의 큰 갈래가 궁중음악과 민속음악인데, 지난 1세기 민속음악을 석권한 것이 남도음악 특히 판소리라는 점이 예사롭지 않다.

남도인문학팁

삼남(三南)을 수렴한 남도의 포지션과 ‘귄’의 정체

충청, 전라, 경상 삼남을 삼남보고(三南寶庫)라고 한다. 충청도의 충남평야, 전라도의 호남평야, 경상도의 김해평야를 아우르는 말이다. 호남평야가 그 핵심이다.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이곳 삼남의 곡식이 국가의 동력이었으므로, 삼남이 조선을 먹여 살렸다고 말한다. 고부지역을 중심으로 동학혁명이 발발했던 것도 전국 최고의 곡창 호남평야가 수탈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시기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삼남이란 용어는 사멸되었고 오직 광주 및 전라도만이 남도라는 이름을 승계하였다. 삼남의 풍부한 재력이 결국 남도로 수렴되고 포획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음악을 중심으로 한 문화예술 방면에서 주로 이 용어를 선점해온 이유가 무엇일까? 정리해서 말하면 남도라는 호명의 출처는 충청, 경상, 전라의 삼남(三南) 즉 ‘세 개의 남도’에서 비롯되었지만, 점점 그 맥이 전라지역으로 모여들었다. 남도라는 하남(下南)의 포지션을 수렴한 것이다. 내가 표방해온 ‘남도인문학’은 더 나아가 동아시아까지 포섭하는 광의의 개념이다. 문제는 왜 삼남 지역 중에서도 유독 전라도가 ‘남도’라는 의미를 포획하고 또 수렴해왔는가에 있다. 삼남의 풍부한 재력과 그 재력이 뒷받침하는 문화예술의 창발에 한 단서가 있다. 판소리가 오로지 전라도 것인 양 인식되는 풍경을 톺아보면 그 내력이 보인다. 8년 전 이 칼럼을 시작하며 표방한 ‘귄’이 그 상징이다. 뭍과 물이 교직하는 남도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공유되어 온 대표적인 용어다. 여기에는 ‘거시기’를 공유해온 공생체가 있고, 우리 문화를 살찌우게 해온 문화예술의 맥이 있으며 무엇보다 나라가 풍전등화에 처할 때마다 우뚝 일어섰던 의로움과 슬기가 있다. 우리 역사를 통틀어 중앙으로부터 배척된 이들이 마치 고향처럼 스며들 수밖에 없었던 공간, 수구초심(首丘初心)의 남도를 나는 오늘도 노래하는 중이다.


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