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서석대> 조국을 위해 헌신한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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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서석대> 조국을 위해 헌신한 대가
최황지 정치부 기자
  • 입력 : 2023. 09.10(일) 16:35
최황지 기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일본이 항복하면서 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린다. 인류역사상 가장 강력한 폭탄을 개발한 원자폭탄의 아버지(Father of the atomic bomb)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살아있는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 후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오펜하이머를 크게 치하한다. 그는 자신의 공을 칭찬하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한다. “대통령님, 지금 제 손에 피가 묻은 느낌입니다.”라고. 인간에게 불을 선물하고 그 벌로 평생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고통을 받는 프로메테우스처럼 오펜하이머도 그 후 죄의식으로 평생 고통받는다.

이제 오펜하이머는 한 청문회에 사색이 된 얼굴로 앉아있다. 기자도, 속기도 없는 ‘비공식 청문회’에서 오펜하이머는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낙인찍고 질문을 퍼붓는 청문회 위원들의 공격과 마주하고 있다. 청문회 위원들은 오펜하이머가 원자폭탄 개발에 그리 적극적이었으면서 수소폭탄 개발은 왜 반대하는지 따졌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의 연쇄 파멸을 두려워하며 핵무기 확산에 반대했다. 그러나 강력한 수소폭탄을 개발하려는 미국 정부에겐 오펜하이머의 주장이 달갑지 않았다. 오펜하이머가 소련의 첩자여서 수소폭탄을 반대하는 것이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과거에 공산주의 사상에 지적인 관심을 갖고 활동했던 그의 경력이 좋은 구실거리가 됐다.

기울어진 청문회였다. 청문회 위원들은 그의 아내와 친동생이 공산당 활동을 했던 것을 근거로 그를 몰아세웠다. 미국의 영웅이었던 오펜하이머가 일순 발가벗겨진 채로 날 선 공격을 받아낸다. 이같은 푸대접을 지켜보던 지인들은 “조국을 위해 헌신한 대가가 이것이라면, 미국을 떠나라”고 말한다. 학문적 동지인 아인슈타인 역시 “당신은 변심한 여잘 쫓아다니는 남자처럼 미국을 짝사랑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오펜하이머는 조국을 떠나지 않는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펜하이머’ 속 청문회 시퀀스가 큰 인상을 남겼다. 오펜하이머가 조국에게 수모와 굴욕을 겪으면서도 “나는 이 나라를 사랑한다”고 말한 대사가 두고두고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오펜하이머와 홍범도 장군의 일생을 연결해 보는 이는 나뿐만은 아닌 듯 하다.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누빈 홍 장군의 항일투쟁이란 역사적 성취에 후손들이 이념 프레임을 씌우고 답이 정해진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조국을 위해 헌신한 대가가 고작 이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