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암 최종섭 선생. 유족 제공 |
항일투쟁과 광주·전남 지역사회를 이끈 중암(中庵) 최종섭 선생이 1969년 2월7일 타계한 후 사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서 울려퍼진 헌시다.
최종섭 선생은 1882년 4월21일 광주에서 태어나 조국광복과 나라독립의 초석을 다지는데 일생을 바쳤다.
1남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일제의 침탈로 나라를 빼앗기고 도처에서 의병활동이 전개되던 한말의 격동기에 청년 시절을 보냈다. 이후 1909년 대한독립협회 광주지부 실업부장을 시작으로 항일운동 전선에 뛰어들었다.
이후 광주 지방 유지들이 대거 참여한 청년회장, 광주 소작인회 연합회장, 신간회 중앙 집행위원 광주지부 간사 등을 맡았다. 특히 청년회에 참여한 지방 유지들이 노동·농민운동에는 발을 빼는 경향이 있었는데 최종섭 선생은 1924년 광주면 소작인회를 주도적으로 조직하고 1925년에는 광주소작인연합회장과 광주수해구제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지주의 횡포에 맞서 농민을 보호했다.
1927년 항일사회단체 신간회가 결성되고 1929년까지 신간회 광주지회 조사부장과 서무부 총무간사 등을 역임하면서 활동했다.
항일투쟁을 이어가면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광산군 비아면과 극락면으로 집을 옮겨 잠시 은둔생활을 했다. 이 때 교화를 담당하는 면 직원이 그가 사는 동배실(광주 북구 동림동)의 ‘배(背)’를 일황을 향해 절한다는 의미의 ‘배(拜)’로 고치라고 하자 “그것이 고유명사인데 글자를 고친다고 해서 교화될 것 같은가”라며 성을 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최종섭 선생은 8·15 광복 이후 다시 활동에 나섰다. 특히 1948년 반민족행위자들을 처단하기 위한 기구인 ‘반민특위’가 출범해 전남지부장을 맡았다. 당시 반민특위 전남지부는 20명을 구속 송치하고 18명을 불구속으로 취조하는 등 38명을 조사했다. 반민특위 전남지부는 일제 때 고등계 형사로 광주학생운동 독립운동가를 고문했던 문종중을 먼저 체포했을 정도로 독립운동을 탄압한 경찰 출신들을 중점적으로 처벌했다. 하지만 이미 고위직을 차지한 친일 인사들이 반민특위 활동을 좌익이나 공산당 소행으로 몰아세우면서 좌절되고 말았다.
최종섭 선생의 업적은 항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호남, 동광 두 신문사의 사장을 거치면서 지방 언론 창달에도 앞장섰으며, 광주고등법원과 광주고등검찰청을 유치하고 전남대 전신인 대성대학 기성회장을 맡는 등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이후 1969년 2월7일 88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 1969년 2월11일 광주공원 광장에서 열린 최종섭 선생의 사회장. 유족 제공 |
최종섭 선생의 후손인 최금천(76)씨는 “아버지를 일찍 떠나보내고 엄격한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왔다.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항상 떠오른다. 자식과 손주들에게 일제하에서 봉급생활을 하는 것은 일제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것이므로 취직하지 말고 농부가 되라고 훈계하기도 했을 정도다”고 설명했다.
최씨를 포함한 후손들은 최종섭 선생의 독립유공자 포상을 진행했으나 관련 자료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소실돼 서훈이 추진되지 못했다. 현재는 이와 관련한 진실규명을 진실·화해를위한위원회에 의뢰한 상황이다.
최씨는 “남아있는 광복 후 활동 기록만으로라도 독립유공자 신청을 진행하려 했지만 광복 이전 활동만 인정된다는 보훈처(현 보훈부)의 심사 기준때문에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며 “하루빨리 유실된 자료를 찾아 일평생 독립과 정부수립을 위해 헌신한 할아버지의 업적이 널리 알려지길 바란다”고 전했다.
김혜인 기자 hyein.kim@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