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작가 에세이·김정숙>이름, 그의 발자취를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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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작가 에세이·김정숙>이름, 그의 발자취를 살펴봐야겠다
김정숙 수필가·광주문인협회 회원
  • 입력 : 2024. 01.25(목) 14:06
김정숙 수필가
모처럼 미세먼지가 걷힌 맑은 하늘이 발길을 밖으로 이끌었다. 움츠러든 어깨를 추켜세워 주는 햇볕을 동무 삼아 걷고 있는데 처음 보는 이가 공손하게 인사하며 명함을 건넨다. 선거를 준비하는 예비 후보의 이름 석 자가 굵은 서체로 씌어 있다. 명함을 들여다보며 선거를 치르는 날까지 나는 과연 이 이름의 주인을 제대로 알고 투표장으로 향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이름에 홀려 당혹스러웠던 때가 있었다. 사촌언니의 결혼을 축하하려고 골랐던 꽃, 마거리트. 대학 새내기였던 나는 그 꽃말이 진실한 사랑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화원에 들어갈 때까지 생김새는 알지 못했다. 막연하게 이름처럼 우아한 기품으로 신부를 빛내 주리라고만 생각했다. 장미, 백합, 카네이션 같은 친숙한 꽃들 너머에서 주인이 우윳빛 꽃을 손에 들어올렸다. 내 눈에는 영락없는 구절초였다. 그렸던 모습과 사뭇 달라 어리벙벙한 사이 주인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포장을 마치고 꽃다발을 건넸다. 코끝에 닿는 향기마저 낯설어 미간이 찌푸려졌다. 마거리트가 정말 맞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어리숙함만 들통날 것 같아 서둘러 꽃집을 나오고 말았다.

언니를 만나기 위해 걸어가는 동안 찬찬히 꽃을 들여다보았다. 샛노란 화심에 하얀 꽃잎이 명랑하고 정갈했다. 독특한 내음도 바람에 날아가 버린 듯 이질감이 덜어졌다. 갓 세수한 여중생 같은 예쁜 꽃이었다. 이름에 끌려 멋대로 상상하고 기대와 다르다고 실망한 것은 애오라지 내 선입견 탓이었다. 장미가 장미 나름대로 아름답듯이 마거리트는 또 제 나름대로 아름다웠다. 대상을 이르는 우연한 기호(記號)에 지나지 않는 이름에 홀려 되레 실물을 보고 당혹스러웠던 그날의 경험은 새삼 나를 돌아보게 했다. 숱하게 많은 이름을 입에 올려야 말이 통하는 세상에서 과연 내가 온전히 알고 부르는 이름은 얼마나 될까.

이름에 대한 선입견이 빚은 웃지 못할 일화는 역사에도 전한다. 로마의 병사들이 사자 군단을 이끌고 공격해왔을 때 마르코만니족 군사들은 처음 본 동물에게 겁먹고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의 장군이 “저것은 로마의 개다.”라고 외치자 사자를 개로 여긴 병사들이 거침없이 달려들어 전투에 승리했다고 한다. 이름이 사람의 후각을 교란하기도 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옥스퍼드 대학의 에드먼드 롤스 교수에 의하면 사물의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연상 작용이 실제로 냄새를 느끼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이를테면 장미를 호박꽃이라 부르면 덜 향기롭게,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사물에 향기로운 이름을 붙이면 냄새도 더 낫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대상을 구분하고 인식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 때로는 고정 관념의 덫에 갇혀 이렇듯 실물의 본질을 오해하게 만들기도 한다. 마거리트라는 이름의 꽃을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다면 그것은 내 상상 속에서 여전히 영국 공주 같은 우아한 자태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선입견을 떨치고 들여다보자 비로소 실체와 이름 사이의 괴리가 사라지고 질박하게 예쁜 본태가 눈에 들어왔다. 꽃의 정체를 알아가는 것도 이럴진대 하물며 이름을 앞세운 사람들의 진면목을 살피는 일은 얼마나 신중하고 냉철해야 할까.

바야흐로 선거철이다. 국민의 선택을 받기 위해 신발 끈을 조이고 뛸 준비를 하는 이들의 이름도 신문과 방송에 연일 오르내리고 있다. 명실상부,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인물인지, 과대 포장된 허명(虛名)인지 가려내는 눈매가 매서워져야 할 때이다. 존재감에서 밀리는 무명(無名)의 이름 석 자도 눈여겨보아야 할 터. 천천히 짚어보면 그들의 족적이 하나둘 드러나지 않겠는가. 됨됨이와 역량을 재는 유권자들의 잣대가 깐깐하고 공정하게 작동한다면 다가오는 4년은 지나간 시간보다 몇 걸음 더 나아가리라 믿는다. 강물은 흘러야 바다로 간다. 사람도 그렇다. 손에 쥔 명함을 들여다본다. 흐르는 강물 같은, 내일의 바다로 나아갈 미더운 이름인지 그의 발자취를 살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