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타적유전자·박재항>시계탑 위 풍향계와 엉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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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이타적유전자·박재항>시계탑 위 풍향계와 엉뜨
박재항 이화여대 겸임교수
  • 입력 : 2024. 02.07(수) 12:57
박재항 겸임교수
골프장 입구에는 보통 시계탑이 서 있다. 사실 실용성으로 따지면 존재 이유가 별로 없다. 골퍼들 각자 시계도 차고 있고,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기보다 골프장의 시계탑은 마치 축구 경기에 전광판도 있고, 추가 시간을 알리는 숫자판도 있지만, 주심의 호각에 따라 경기의 시작과 종료가 결정되는 것처럼 골프장 내에서의 공식 시간으로서의 권위를 가진다. 기념 촬영의 단골 장소이기도 한데, 역시 장승처럼 골프장으로 들어섰다는 상징과 같은 의미도 가진다.

한국에 골프붐이 일기 시작하던 1980년대에 골프장의 시계탑을 두고 한국의 대표적인 가전 회사 둘이 골프장 필드에서의 실력 다툼 이상의 치열한 대결을 벌였다. 새로운 골프장이 들어서면 자신의 기업이나 제품 로고가 붙은 시계탑을 세우려 골프장에 로비를 곁들인 경합이었다. 옥외 광고 회사들은 시계탑 제작을 맡아서 대행하려고 역시 경쟁의 한 축을 맡았다.

그 시절에 해당 가전 기업 중의 하나에서 근무하며, 홍보실의 광고 관련 계약을 챙기는데 한 옥외광고 대행사가 여러 골프장의 시계탑 건설을 전담하다시피 계약을 따내는 걸 발견했다. 당시 신입사원 시절에는 어떤 연유로 그렇게 싹쓸이하다시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사실 골프장에 가본 적도 없고, 당연히 시계탑을 보지도 못했다. 수십 년이 흘러 그 옥외 광고 회사의 창립자이자 시계탑을 한창 세우던 시절에 경영을 이끌고 계시던 분을 만났다. 그분이 말씀하신 비결은 시계탑 위에 세운 풍향계였다.

시계탑 건설 입찰을 둘러싼 경쟁도 결국은 가격만이 잣대가 되어 벌어지게 되었다. 제로섬과 같은 환경에서 뭔가 가치를 올려서 다른 경쟁업체들과 다르게 보일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첨탑 위에 풍향계가 꽂혀 있는 걸 보았다. 골퍼들은 경기 당일 골프장의 바람 세기와 방향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날의 날씨와 풍향 같은 걸 당시의 골퍼들도 예보 등을 통해 미리 확인했다. 요즘 같으면 스마트폰으로 수시 체크하지만, 역시나 골프장 안에서 입장의식처럼 시계탑 위의 풍향계를 확인한다. 다른 시계탑과 달리 지붕 위에 풍향계를 얹었다. 설치비도 별로 들지 않았지만, 그 투자 이상의 효과를 냈다. 그분 표현으로 풍향계 하나로 장사 잘했다고 한다.

골프장 시계탑 위에 풍향계를 설치해서 톡톡히 재미를 봤던 옥외 광고 기업에서 20여년 후에 비슷한 사례를 만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고 모이는 곳이면 옥외 광고의 무대가 된다. 그런 대표적인 장소 중의 하나가 버스 정류장이다. 어떻게 옥외 광고가 발전해 왔는지 버스 정류장의 변천사가 잘 보여준다. 1960년대 사진을 보면 버스 정류장임을 알리는 표지판 하나만 길가에 덩그러니 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윽고 정류장에 서는 버스 번호와 노선이 표시되고, 광고판들도 노선표시판 아래위로 붙는 곳들이 생겨났다. 사람들이 앉아서 기다릴 수 있는 의자가 놓여지고, 의자에 광고가 붙는 곳들도 나타났다. 이어 눈비와 햇볕을 피할 수 있는 지붕과 가림막을 설치하는 정류장들이 늘어났다. 거기에 디지털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버스 도착 시간을 알리는 실시간 정보판도 등장하고, 노선을 상세하게 알리는 안내도도 붙고, 자동으로 광고물을 교체하며 보여주거나 동영상을 구동하는 디지털 화면도 자리를 잡았다.

거기에 중앙 버스 차선이 도입되면서, 새롭게 버스 정류장도 정비되고, 옥외 광고 대결이 펼쳐졌다. 골프장 시계탑은 규모가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 고만고만한 한국 기업들끼리 경쟁했는데, 중앙 차선 버스 정류장의 광고를 두고는 세계 최대 규모의 다국적 광고 기업까지 참여하는 경합 무대가 펼쳐졌다. 규모와 가격으로 상대할 수 없는 강적이었고, 그를 넘어서려면 확실히 차별화한 요소가 필요했다.

창립자의 뒤를 이은 경영자가 차별화 아이디어에 골몰할 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났다. ‘한국인은 따뜻한 바닥을 좋아한다’. 서양에서는 실내 난방에서 공기를 데우지만, 한국에서는 온돌바닥으로 앉거나 눕는 바닥을 따뜻하게 한다. 집 밖에서도 추우면 서양인들은 머리를 따뜻하게 하려고 털모자를 잘 쓰는데, 모자를 상대적으로 쓰지 않는 한국인들이 원하는 따뜻함이란 어떤 종류일까 고민했다. 그런 생각의 고리 끝에 나온 게 바로 앉는 부분을 전기로 따뜻하게 만든 온열 의자였다. 처음 서울 송파구에서 네 곳에 시범 설치하며 계약을 따냈다.

그렇게 시작한 온열 의자가 이제는 전국 웬만한 버스 정류장의 필수 공공시설로까지 인식될 정도로 퍼졌다. 엉덩이를 뜨듯하게 한다고 ‘엉뜨’라고 불리며, 외국인들이 ‘버스 놓치면 그냥 자도 되겠다’며 감탄하는 소위 ‘국뽕’의 아이템으로도 등장했다. 효율적인 전기 사용을 위해서 온도에 맞춰 작동하는 시스템까지 갖췄다.

단순히 계약을 따겠다는 생각만으로 골프장 시계탑 위에 풍향계를 세우거나 버스 정류장에 온열 의자를 설치하는 아이디어는 나오지 않는다. ‘골퍼들에게 필요한 게 뭐지?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좋을까’와 같은 무언가를 더해주겠다는 마음에서 좋은 아이디어가 나온다. 이런 게 부가가치이다. 거창하게 큰 투자가 필요하지 않은, 작은 변화나 덧붙임이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혜택으로 될 확률이 높다. 어느 부분에서나 그렇게 더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마음들이 좋은 브랜드와 기업을 만든다. 이익은 거기에 자연스럽게 따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