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문화향기·김강>가족이라는 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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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문화향기·김강>가족이라는 그 이름
김강 호남대 영어학과 교수
  • 입력 : 2024. 02.13(화) 13:13
김강 교수
고교 시절 학교가 파한 후 집에 일찍 오는 날이면 거실 한구석 좁다란 소파에 묻혀 즐겨 읽던 잡지가 있었다. 월간 샘터. 아마도 어머니께서 정기구독을 하셨던 듯하다. 잡지 뒤쪽에 실린 연재소설 한 편이 그 얼마나 재미나고 내 마음을 흔들었던지 매달 잡지가 배달되는 순간을 애타게 기다렸다. 소설의 등장인물이자 작가의 실제 딸 ‘다혜’와 아들 ‘도단’이라는 이름이 너무 멋져서 나도 장차 아이를 낳으면 그 이름을 써야겠다고 작심했었다. 행간에 넘치는 위트와 멋진 글의 참맛을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 아닐까.

최인호의 ‘가족.’ 샘터사 문인들이 매달 콩트식 연작소설을 한편씩 쓰자는 제안에서 시작됐다. 그는 가족 이야기를 택했다. 1975년 9월 첫 회를 시작하여 2009년 10월호에 402회를 마지막으로 무려 35년 6개월간의 장구한 연재를 마쳤다. 우리 가족의 모습과 대한민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담은 끈질긴 생명력의 개인적 연대기인 셈이다. 역사와 정치적 주제에 대한 독재정권의 검열을 피해 1980년 10월부터 제작된 농촌 가족들의 고단한 삶의 스토리 ‘전원일기’도 2002년 12월까지 22년 2개월 동안 총 1088회 방송됐으니 그 의지를 감히 ‘가족’에 견줄 수 있을까.

“부모가 태어나기 전의 세상에서부터,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의 신원에서부터, 창세기 이전에서부터 준비됐던 영혼의 방. 김수영의 시 구절처럼 좁아도 좋고 넓어도 좋은 가정의 방에서 죄 없는 말을 주고받았던 나의 아내여. 그리고 나를 아빠라고, 아버지라고 부르고, 아버님이라고 부르고,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유순한 가족, 그대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어디서부터 왔는가. 그리고 또한 나는 누구인가.”

작가 최인호는 ‘가족’을 이처럼 정의한다. 맞는 말이다. 가족은 구속이자 연대다. 기쁨이자 눈물이다. 보이는 듯하지만 보이지 않는 안개이자 신기루다. 가족은 처음이자 마지막 쉼터다.

그 가족이 해체 중이다. 경제침체로 인한 가정 붕괴와 출산 기피, 이혼, 비혼 등이 증가하면서 과거보다 훨씬 복잡한 사회적 구성이 늘어나는 추세다. 통계청에 의하면, 최근 우리나라 친족가구의 유형은 핵가족과 무자녀 가족, 확대, 조손, 편부모, 입양, 재혼, 독신 및 다문화가족 등이다. 여기서 1인 가구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가족 형태의 빅뱅을 이끈다. 2022년 전체 가구의 34.5%에 해당한다. 바야흐로 ‘신유목민’(뉴노마드)의 시대다.

현대사회에서 부유한 사람은 즐기기 위해, 가난한 사람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이동한다. 가족 구성원이 과거처럼 한자리에 정주하지 못한 채 유목민처럼 생활한다. 1만 년의 정착시대를 끝내고 새 유목 시대를 열고 있는 종족이 바로 21세기 키워드로 떠오른 현재의 ‘디지털 노마드’다. 세계화와 맞물려 가족을 구성하는 척도가 컴퓨터와 디지털 정보가 되었음이 실감 나는 현실이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들었던 가족의 모습들이 우리의 일상이 됐다. 기러기, 동성애, 비혼 동거가족이 등장하고, 성인미혼자녀들이 따로 독립하는 시대가 왔다. 혹자는 해체라고 혹은 변화라고, 또 어떤 이는 위기라고 평한다.

한때 우리 사회가 유지했던 전통적 의미와 형태의 가족은 어쩌면 ‘신유목민’이라는 시대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제도일지 모른다. 직업에 따라 유랑하는 종족이라는 의미의 ‘잡노마드’(job nomad)라는 용어를 제창한 독일의 미래학 전문가 군둘라 엥리슈에 따르면 신유목민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유동성’과 ‘유연성’이다.

결혼제도에 바탕을 둔 전통가족은 이와 같은 유동성과 유연성에 배치되는 제도일 수밖에 없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이라는 철석같은 약속도 부담스러운 데다 자녀가 생기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신유목민의 선택은 자연스레 결혼 기피와 저출산으로 귀결된다.

엥리슈는 라틴어로 ‘가족’이라는 말이 원래는 ‘한 남자의 소유물로 마음대로 힘을 휘두를 수 있는 모든 노예’라는 의미였다고 말한다. 남자의 노동으로 온 가족을 부양했던 시대, 위계질서가 분명하고 안정을 추구했던 ‘농경’ 정착사회에서는 가부장적 가족의 틀이 가장 적합한 모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 가족은 파편적이다. 더 이상 가부장적이지 않으며, 위계질서가 불분명하고 불안정하다. 국가라는 가족도 아버지를 잃은 채 그저 정쟁의 대상이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학생과 교직원 모두가 한 울타리 공동체를 구성하는 가족이다. 그런데 서로를 신뢰할 수 없다는 부정적 인식은 가족에게 정직하지 못하고 책임을 미루는 비윤리적 처신에서 비롯된다. 각자 살펴야 할 공동의 문제를 무관심으로 대하고 나의 책임을 그럴듯한 구실로 타인에게 전가한다. 가족이 아니라 하나의 이기적 개인일 뿐이다. 도덕적 ‘소외’의 현장이다.

우리에게 가족은 무엇일까? 가장 가깝기에 오히려 상처를 주는 게 또한 가족이다. 하지만 곤란에 맞서는 존재도 가족이다. 이유는 따로 없다. 그저 가족이기 때문이다. 집단이나 조직의 발전은 ‘가족주의’에서 싹튼다. ‘보호가인’이라는 미명 하에 개인의 자유와 타인의 생명을 짓밟는 비정한 갱단가족을 다룬 넷플릭스 무비 ‘선 브라더스’의 단결을 말함이 아니다. 서로를 진정으로 아끼는 마음, 상대방의 입장을 깊이 이해하려는 마음, 그리하여 지긋한 인내로 상대를 믿고 기다리는 마음이 절실하다. 피를 나누지 않는 가족은 마음을 나누어야 한다.

‘경쟁’과 ‘계산’의 화법이 어느새 우리 인생의 보통명사가 되어버린 지금이다. 이 각박한 현실 어느 모퉁이에 가족의 애틋한 사랑이 스며있는지, 혹은 그 잊힌 흔적이나마 애써 더듬어 느끼고 싶다.

다 큰 자녀들이 어느새 집을 떠나고 중년 부부 둘만 마주한 애잔한 시간, 엊그제 음력설을 지내면서 문득 그립다. 최인호가 선사한 그 아름다운 가족의 모습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