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최철의 오페라 오디세이>‘빛나는 추억’…푸치니가 사랑한 지휘자 토스카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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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철의 오페라 오디세이
[전남일보]최철의 오페라 오디세이>‘빛나는 추억’…푸치니가 사랑한 지휘자 토스카니니
<푸치니 서거 100주년-⑤지휘자 토스카니니>
라 보엠·토스카·나비부인 등 대표작품 지휘
탁월한 음악적 해석 통해 최고 반열 올려놔
‘고도의 지적인 남자’ ‘비범한 음악가’ 극찬
미완성 ‘투란도트’ 사후 푸치니에 영광 안겨
  • 입력 : 2024. 03.14(목) 17:05
토스카니니와 푸치니는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을 함께 했다. 사진은 푸치니와 토스카니니.
괴팍하기 그지없고 한없이 이기적이라고 알려진 작곡가 푸치니는 죽기 전 음악 관련 <일 피아노포르테>에 기고한 글에 “나의 생애에서 예술가로서 가장 즐겁고 가장 빛나는 추억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1957)와의 우애와 관련된 것이다”라고 언급하였다. 푸치니는 유일하게 토스카니니가 제언한 내용을 음악 안에 담았을 정도로 그를 신뢰했으며, 자신의 작품을 최고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었던 것은, 토스카니니의 탁월한 음악해석과 그것을 음악에 충실히 담아내는 그의 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언급하곤 했다.

토스카니니와 푸치니는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을 함께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작곡가 푸치니의 황금의 시대의 시작인 오페라 <라 보엠>의 초연부터 <서부의 아가씨>, <투란도트> 초연뿐만 아니라 <토스카>, <나비부인> 등 그의 대표적인 작품과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마농 레스꼬>의 리뉴얼 작업의 대성공은 지휘자 토스카니니와 함께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푸치니는 진정한 벗으로 토스카니니를 존경하기까지 하였으며 그를 만난 것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운이었다고 언급했다.

토스카니니와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푸치니와 토스카니니는 음악이라는 매개가 없었으면 절대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서로 품을 수 있는 공통분모가 없기 때문이다. 이탈리아가 통일된 후 태어난 두 음악가의 출생 배경은 특히 상극이라 할 정도로 이질적이다. 지금의 우리나라 보수와 진보 또는 영호남의 갈등처럼 18세기부터 시작된 이탈리아의 ‘흑’과 ‘적’이라는 두 당파의 대립은 당시 만연된 사회 현상이었다. 푸치니는 교황 아래서 계속 음악가로 살아온 가계의 흑색파 또는 친 사제파였으며, 이와 반대로 토스카니니는 피아첸차 공화국 출신으로 민주주의 의식이 뼛속까지 박혀 있는 적색파 출신이다.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있는 토스카니니는 군국주의와 전체주의를 극도로 혐오했으며, 이러한 이유로 무솔리니와 대립을 이루며, 파시스트 정권으로부터 지탄과 공격을 받기까지 했다.

토스카니니
위의 출생 배경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한때 무솔리니를 동경한 푸치니와 전체주의 나치즘을 극도로 혐오한 토스카니니. 둘의 우정은 위기에 봉착할 때도 있었다. 한 예를 들자면 푸치니 가족과 토스카니니 가족은 함께 휴가를 보내곤 했었는데 1914년 여름 비아레쪼의 푸치니 별장에서 두 사람은 절교할 정도로 다투었다고 한다. 토스카니니의 딸 왈리의 회고에 의하면, 둘은 음악과 정치에 관한 토론 중, 토스카니니가 마치 무서운 짐승처럼 격노했다고 한다. 그날 저녁 둘의 대화는 독일에 관한 논쟁으로 뜨거웠는데, 독일을 지지하는 푸치니는 당시 이탈리아 당국을 향한 비판과 더불어 당시 가난한 국민의 피해를 줄이고 혼란을 막아주기 위해 독일인들이 이탈리아에 와서 해결해 주길 바란다고 이야기했다. 당시 나치 독일을 증오했던 토스카니니는 푸치니의 이야기에 격노하고 그 후 푸치니를 보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두 사람 사이를 화해시키기 위해 주변인들과 당사자인 푸치니 역시 노력 했지만, 토스카니니의 분노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일주일 후 두 사람은 화해를 갑자기 하였는데, 아마 그 이유는 음악이 매개였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푸치니와 토스카니니의 첫 만남은 토리노 레지오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하게 될 <라 보엠>을 통해서였다. 푸치니는 <마농 레스꼬> 이후 이탈리아 오페라계에서 명성을 쌓아가는 중이었으며, 이제 베르디 이후 이탈리아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 반열에 도달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라 보엠>을 푸치니는 당대 저명한 지휘자 레오폴드 무노네가 지휘하길 바랐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그때 당시 무노네 보다 훨씬 지명도도 낮은 젊은 토스카니니가 지휘봉을 잡아서 푸치니는 많은 염려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불안했던 푸치니의 마음은 토스카니니의 리허설을 보고 난 후 바뀌어 토스카니니를 찬미하였다고 전해진다. 푸치니는 이러한 상황을 자신의 아내에게 편지로 남겼는데 그를 ‘고도의 지적인 남자’, ‘비범한 음악가’, ‘매력적인 남자’라는 어구 등을 사용해 극찬하였다고 한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있는 토스카니니.
두 사람이 서로를 베스트 프랜드라고 언급할 정도로 우정을 쌓았던 시기를, 주변인들은 오페라 <토스카>의 밀라노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 공연을 준비하면서라고 추정한다. 이 작품은 로마에서 무노네 지휘로 초연했지만, 푸치니는 토스카니니의 밀라노 버전을 최고의 작품이라 생각했다. <토스카>의 밀라노 대성공을 두고 푸치니는 그의 벗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그 내용에는 ‘토스카니니의 탁월한 해석, 효과적인 무대 앙상블을 끌어내는 능력’ 등을 나열하며 극찬하였다고 전해진다.

푸치니는 <나비부인>의 참담한 실패를 예감했다고 한다. 푸치니는 이 실패를 토스카니니가 지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언급했다. 많은 서신을 통해서 토스카니니의 능력을 찬미할 때는 <나비부인>의 실패사례와 재공연의 성공사례를 자주 언급했다고 한다. 푸치니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조언을 토스카니니에게 부탁했고 그의 조언에 따라 초연 때 과감히 하지 못했던 <나비부인> 2막 형식의 스코어를 교정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파가니니와 함께한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오페라 극장의 <나비부인> 공연은 대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으며 이어 제작된 벨라스코의 희곡을 오페라화한 <서부 아가씨>는 토스카니니의 해석으로 창조되어 초연에 올려졌다. <서부의 아가씨> 초연에서 작곡가가 쉰 다섯 번의 커튼콜을 받았다고 미국 메트로폴리탄 초연 기록은 알리고 있었는데, 이는 토스카니니가 아니면 이루어 낼 수 없었다고 푸치니는 언급했다. 푸치니는 이 작품을 위해 비아레쪼의 자신의 집으로 토스카니니를 자주 초대해 조언 구하는 등 함께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후 푸치니와 토스카니니의 우정은 푸치니의 히스테리와 토스카니니의 어린애 같은 행동으로 두 번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푸치니의 죽음을 앞두고 둘은 극적인 화해를 했다. 푸치니는 후두암으로 투병을 하면서 <투란도트>를 쓰고 있었다. 그에게는 무엇보다 이 작품을 성공적으로 올리기 위해서는 토스카니니가 절실히 필요했으며, 그만이 자신의 이 대형 프로젝트를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 성공적으로 올려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푸치니의 토스카니니를 향한 사과와 편지에 응답은 토스카니니의 갑작스러운 비아레쪼의 방문으로 이루어졌다. 이 만남은 두 사람 앞에 놓인 불신의 거대한 벽을 무너뜨렸다. 푸치니는 자신의 친구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이제 나는 너무 행복하답니다. 토스카니니에 의해 태어난 <투란도트>는 가장 멋진 공연이 될 것이오…”라고 언급했다. 비록 푸치니의 죽음으로 미완성 작품으로 남게 된 <투란도트>였지만, 토스카니니에 의해 태어난 이 작품은 사후 푸치니에게 큰 영광을 안겼으며, 이 작품은 두 음악가의 우정의 서사로 남겨진 산물이라 할 수 있다.

푸치니의 죽음을 스칼라 극장에서 오케스트라 리허설 도중 듣게 된 토스카니니는 지휘봉을 던지고 달려 나가 분장실에서 서럽게 통곡하여 울었다고 전해진다. 둘의 우정은 많은 고비가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음악 안에서 극복하고 오페라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푸치니가 상상한 모든 것을 제대로 해석하고 최고의 경지에 올려놓은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푸치니가 서거하고 100년이 지난 그의 음악에 열광할 수 있게 만든 오페라계의 최고의 요리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대 초빙교수·문화학박사



토스카니니는 푸르트벵글러와 함께 20세기 지휘사에 거대한 양대 산맥의 하나를 차지하는 인물로 그에 관한 무수한 일화들은 전설이 되어 전해지고 있다. 토스카니니가 오페라계에 등장하며 이전 가수 중심의 오페라계의 권력이 지휘자 중심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이전 지휘자들은 오페라 가수들을 보조하는 역할로 인식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