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타적유전자·박재항>나보다 더 간절한 사람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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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이타적유전자·박재항>나보다 더 간절한 사람들을 위하여
박재항 이화여대 겸임교수
  • 입력 : 2024. 03.20(수) 13:27
강연을 듣고 있는 대학생들. 뉴시스
박재항 겸임교수
대학교 학기 정규 수업을 하면서 행정 절차와 엮여 맞이하는 세 번의 곤혹스런 순간이 있다고 한다. 가장 힘든 건 학기가 끝난 후에 온다. 바로 성적이 공개된 후의 성적 이의신청이다. 자신이 왜 낮은 등급을 맞았는지 억울함을 표시하며, 근거를 달라고 하는 이들을 만난다. 주로 상대평가로 성적을 매기니, 다른 학생들이 더 열심히 하면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원하는 점수를 못 얻을 수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의신청 대응이 얼마나 괴로운지, 공무원들이 감사에 대비하듯 평가의 근거 자료를 만드는 게 교수 업무의 일순위고, 수업의 기준이 된다는 이들도 있다. 그러다 보면 꼬리가 몸통을 흔들 듯이, 수업을 통하여 학생들이 얻는 배움보다 평가에 초점을 맞춰 수업을 진행하는 상황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의신청 다음으로 곤혹스런 상황은, 직접 당해보지는 못했지만 수강 신청을 한 학생들이 너무 적어서 폐강이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수업이 학생들의 필요와 너무 떨어져 있거나, 강의자들의 악명이 너무 높으면 간혹 일어난다고 한다. 원로 교수들에게 그런 상황이 생기면 학과에서 나서서 학생들을 모집하고, 심한 경우는 읍소하기까지 한다는 웃픈 얘기도 들었다.

최근 내가 출강한 대학들에서는 개설된 수업 자체가 절대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반대의 상황이 발생한다. 실제 학기마다 경험하고 있는데, 원래 정한 수강 인원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수강신청을 한다. 제한인원으로 신청에 떨어진 학생들이 강의자에게 추가로 자신을 넣어 달라고 하고, 강의실이나 수업 진행 방식 때문에 무한정 받을 수는 없는 안타까운 형편에 처하는 게 세 번째 곤혹스런 순간이다. 학교에 따라 나름의 용어를 쓰기도 한다. 학생을 ‘강제로 입력’한다고 하여 ‘강입’, ‘인원을 늘인다’고 하여 ‘증원’이라고 하는 학교도 있다. ‘강입’과 ‘증원’이 강의자의 관점에서 쓰는 공식적인 말이라면, 학생들 편에서는 ‘빌어서 넣는다’고 하여 ‘빌넣’, 유래는 모르겠지만 ‘수강신청정정요청서’를 ‘초안지’라고 하여 초과 신청을 하는 학교도 있었다.

‘증원’ 요청을 해야 하는 모대학에서는 수강 제한 인원이 50명이었다. 첫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20여 명의 학생들에게 증원을 요청하는 메일을 받았다. 강의실 수용 인원까지 5명을 증원할 수 있었다. 그 학교에서는 강의자가 증원 요청을 하면 30분 단위로 공지가 뜨고, 그를 본 학생들이 선착순으로 증원 자리를 가져가는 식이었다. 증원된 다섯 자리 쟁탈전에서 떨어진 친구들의 요청이 더욱 거세졌다. 더 큰 강의실로 옮겨서 증원을 했으나, 요구에 부응하기는 힘들어서 결국 더욱 큰 대형 강의실 남는 것을 발견하여 다시 이동하며 원래의 인원보다 두 배 이상의 수강생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까지 했는데도 신청하는 모든 학생들을 받을 수는 없었다. 더 증원할 수 없느냐는 채근에, 약간 한탄과 은근 협박조의 메일들을 받았다. 한 학생의 메일도 그러려니 하고 열었는데, 내용이 달랐다.

‘다름이 아니라 감사 인사 드리기 위해 이렇게 메일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이 학생들의 증원 요청에 흔쾌히 응해주셔서 저를 포함한 수강이 간절했던 많은 학생들이 수강의 추가적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저는 메일을 늦게 발견하여 수강신청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저보다 더 간절했던 다른 분이 수강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강의실을 옮기면서까지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이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엔 꼭 수강신청에 성공하여 강의실에서 교수님의 강의를 들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늘 건강 유의하시고, 다시 한 번 증원에 감사드립니다.’

증원을 해주면 정말 감사하겠다는 요청 메일은 많이 받지만, 그렇게 해서 실제 수강 신청에 성공한 이들의 소식을 받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자주 쓰는 비유로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식이라고 할까. 그런데 이어지는 줄을 보니 이 친구는 수강에 성공하지도 못했다. 그러면서 자신보다 더 간절했던 친구들이 수강 기회를 얻었을 것이라며, 그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는 것 같으면, 참지 못하고 ‘공정’을 들이대며 분노하고 자신이 이득을 취하면 ‘능력’으로 포장하는 경우를 많이 접하는 요즘 보기 드문 감동의 메일이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본 인물사전 하나는 게재된 위인들의 명언을 소개하는 박스가 서너 쪽에 하나씩 나왔다. 19세기 영국의 소설가인 윌리엄 새커리가 했다는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친구로 사귀라’는 경구가 유독 마음에 걸렸다. 초등학생이었으니 공부를 잘하는 이와 친구가 되라는 말로 읽었는데, 한편에서는 그렇다면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은 어떻게 친구를 사귀라는 말인지 좀 부당하게 느껴졌다. 그런 생각을 해서 어릴 때부터 악착같이 못하고, 승부욕과 야망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새커리 말의 원전을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크면서 알게 된 작품들을 보건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재산이 더 많고 지위가 더 높은 이들과 사귀려 애쓰든지, 그런 속물적인 기준들을 떠나 인격이 훌륭한 이들과 친하게 지내며 닮으려 노력하라는 뜻으로도 읽힐 수 있다.

지난 3월 초 고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부인인 손명순 여사의 부음이 들려왔다. YS의 집권을 ‘정권 교체’라고 표현하던 이가 있었다. 같은 당 출신인데 무슨 교체냐고 하자 그는 ‘TK(대구경북)’에서 ‘PK(부산경남)’으로 집권 세력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완전히 배제되다시피 한 호남과는 다르게, 집권 세력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도 느끼는 설움이 있었다고 한다. 자신들보다 더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권력자들 만을 질시와 선망과 나름의 한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아무 힘도 없이 고통 받고 있던 이들은 그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속물적인 기준으로의 ‘나은 사람’만이 있었다. 자신이 비슷한 지위에 올랐고, 상대가 떨어졌다고 느끼는 순간에 배척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버리곤 한다.

자신은 수강 신청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자신보다 간절했을 많은 친구들이 들을 수 있게 해줘 감사하다는 말을 한 대학생 친구는 다음 학기에는 자신도 꼭 수업에 참여하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다.

나도 그 친구를 꼭 강의실에서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