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창·하정호>누구를 위한 공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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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창·하정호>누구를 위한 공익인가?
하정호 광주교육시민협치진흥원 과장
  • 입력 : 2024. 03.31(일) 15:17
하정호 과장
의대정원 문제를 두고 정부와 의사단체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둘 다 공익을 위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시민들이 피해를 겪는다. 비단 의료계만의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분쟁이 공익을 명분으로 벌어진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히는 복잡한 세상에서, 주장의 명분 찾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나 혼자만 좋자고 하는 일이 아니라는데, 오히려 그것이 문제해결을 더 어렵게 한다. 내가 좀 욕을 먹더라도 우리 사회를 위해 희생하겠다는 생각이 그 사람을 한 치도 물러서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공익이란 게 있을까? 차라리 사익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면, 내 주장이 다른 누군가를 불편하게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런 자세가 대화와 타협으로 이끌어 줄 수도 있으련만.

공익이라는 명분보다는 자기 성찰과 반성적 판단력이 더 중요한 시대다. “예술에 관해 더 이상 아무것도 자명하지 않다는 것이 자명하다”는 말로 아도르노는 『미학이론』을 시작했다. 예술뿐만이 아니다. 도덕과 정치, 심지어 인권에서조차도 자명한 것은 없다. 보편 원리가 통하지 않는 시대에 어떻게 개별적인 사안들을 다룰 수 있을까? 잣대가 없는데도 어떻게 길이를 잴 수가 있을까?

한나 아렌트는 그 해법을 칸트의 판단력 개념에서 찾았다. 아렌트는 나치에 부역한 아이히만이라는 인물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이히만은 독일의 국익을 위해, 공익을 위해 유태인들을 학살하는 일에 성실하게 임했다. 공익을 위한 그의 헌신이 왜 잘못되었는가? 국가를 위해 봉사한 그를 적국으로 납치해 와 법정에서 사형시키는 게 정당한가? 아이히만의 재판 이후, 사심 없는 행동이나 ‘다수의 동의’만으로는 행위의 정당성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게 아렌트에게 숙제로 남았다. 도덕과 정치는 다르다. 정치는 사람들이 도덕적이지 않고서도 좋은 시민이 될 수 있는 요건을 찾는 일이다. 정치적 설득은 설명을 통해 상대방의 동의를 호소하는 과정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갈 수 있는가 하는 소통 가능성에 달려 있다. 한 공동체를 넘어서는 문제라면 정치적 설득만으로 한계가 있다. 인간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욕망이 있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다 보면 공동의 관심사가 있게 마련이다. 시장에서는 살 수 없는 공공재를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우리는 법률을 만들어 국가를 유지해 왔다. 예전에는 그런 국가가 공익을 대변했지만 이제는 시민들이 나서서 법적 권위를 견제하고, 행정도 이에 협력하는 추세로 바뀌고 있다. 이에 따른 갈등도 나타난다. 시민들은 여러 정보를 공개하라고 요구하지만 행정은 그에 대한 책임도 지고 있어 이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공익추구를 명분으로 한 일방적 요구는 곤란하다. 충분한 정보가 공개되어야 공론장도 힘을 얻게 되지만, 중요한 건 몇몇 시민들이나 특정 단체의 요구나 주장이 아니라 이해가 다른 다수의 시민들과 공개적으로 대화하고 합의해가는 문화를 만드는 일이다.

길고 짧은 것은 대어 봐야 안다. 서로가 같은 잣대를 갖고 있지 않을 때는 더 그렇다. 내 것이 더 길다고 혼자서 떠드는 건 소용없다. 공익을 주장하는 시민단체도 마찬가지이다. 입시에 치우쳐 교육이 제대로 안 되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그러나 집회나 시위를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공익을 위한 공공기관이라지만 학교 안에도 온갖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그 얽히고설킨 실타래는 학부모와 학생, 교사와 관리자들이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며 조금씩 풀어갈 수밖에 없다. 서로의 생각을 맞춰가는 일이 주장을 쏟아내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그렇게 맞대어보면서 서로의 생각을 알아가는 것이 길고 짧음을 주장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다.

가까이 있는 교사나 학부모들과 대화하면서 학교를 바꾸지는 않고 교육청더러 왜 못하냐고 탓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문제해결을 위한 절차는 정해져 있고 행정은 그 절차대로 따르는 것이 공정한 일이다. 그 절차가 내용까지 담을 수는 없다. 자신의 생각이 정말 옳은지, 왜 우리 교육이 그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지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풀어가야 한다. 『대화란 무엇인가』에서 데이비드 봄은 그런 대화야말로 갈등과 대립을 넘어 공생을 추구하는 지속가능한 변화의 시작점이라고 말했다. 비록 갈 길이 멀어 오래 걸리더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