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창·윤영백>시민운동, 발로 일구는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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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창·윤영백>시민운동, 발로 일구는 민주주의
윤영백 학벌없는사회를위한시민모임 살림위원장
  • 입력 : 2024. 04.07(일) 14:32
윤영백 살림위원장
지난 3월 25일 광주교육시민협치진흥원이 개원했다. 구멍가게가 생기더라도 개업하는 날만큼은 덕담을 건네는 게 인지상정인데 광주교육시민연대는 꽃다발 대신 피켓을 들었다. ‘손님 맞이할 마음도 없으면서 새로 지은 사랑채 자랑하지 말라’고.

‘시민 협치’ 간판을 다는 날 시민단체 시위라니 어찌 보면 참 우악스럽고 짓궂다. 하지만 시민단체들로선 기대감이 완전히 무너진 현실을 가장 절박하게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광주교육시민연대는 명망 높은 9개 교육 관련 시민단체가 손잡고 만들었다. 지난 교육감 선거 당시 17개 정책과제를 만들었는데, 이정선 교육감은 대부분을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당선 직후 교육감 인수위와 훈훈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취임 1주년도 못돼 삐걱거렸다. 교육청은 정책과제 협약식을 거부했다. 어떤 어려움이 생겨 그러는지 면담 요청을 했는데 협약식을 거부할 때 썼던 문장을 오려 붙여서 답했다.

‘정규 수업 외 교육활동’ 선택권을 두고 ‘학생 삶을 지키자’는 교육청 시위가 200일 동안 지속될 즈음, 기대는 걱정으로, 걱정은 실망으로 바뀌었다. 시위는 방치됐고, 면담 요청은 거부됐다. 스마트기기 관련 갈등, S고 학사 파행으로 면담을 요청할 때도 ‘궁금하면 교육청 사업 계획서 읽고, 의견 있으면 관련 부서에 서류를 내라’는 답변이 반복됐다.

어느 새부터인가 교육청은 시민단체를 언급할 때 ‘강성’을 붙이거나, ‘광주교육정책 추진을 저해’하는 떼쟁이쯤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급기야 광주교육시민협치진흥원 과장은 ‘누구를 위한 공익인가?’라는 글을 본지 ‘교육의 창’에 실었는데, 시민단체를 바라보는 광주시교육청의 오만하고 편협한 시각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글에 의하면, 시민단체들은 공익 추구를 한답시고 성찰에 게으를 뿐 아니라, 공론장에서 길고 짧은 것을 대보려는 겸손도 없이 ‘혼자서 떠든다’고 일갈한다. 무려 아도르노, 아렌트, 칸트까지 모셔 와서.

표면상 글의 독자는 시민단체로 가정되지만 진정한 독자는 시민단체를 훈계하면서 분을 푸는 자기 자신이거나 이런 패기를 알아줄 동료나 상관(上官)이지 않을까 싶다.

‘공익’이라는 단어는 그 추상성 탓에 구체적 맥락 위에서 의미를 풀지 않으면 하늘로 붕 뜨거나 의미가 왜곡되기 쉽다. 길거리에서 돈 받고 귤을 파는 일에도 공익성이 존재하니까.

그런데, ‘공익의 상대성’을 글 밑자락에 깔아 링을 만들더니, 시민단체를 단순화, 인격화, 악당화하여 셔츠에는 독불장군, 바지에는 이익 단체라 쓴 허수아비를 링 위에 세우고 패기 시작한다.

잽! ‘아도르노 알아? 자명한 건 없어.’

스트레이트! ‘공익과 도덕성만 앞세우면 끝이냐? 아이히만조차 유태인 학살할 때 그걸 공익이라 생각했단다.’

훅! ‘그래서, 아렌트는 말야. 사안 하나하나를 읽는 힘으로 보편을 세우자고 생각했어.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배운 셈이지.’

어퍼컷! ‘너희들에게 공익이 있다면 우리에게도 행정의 공익, 너희와 다른 다수 시민의 공익이 있는 거야. 지금부터라도 성찰, 대화, 합의를 배우렴.’

다운! 땡땡땡.

위 같은 흐름은 ‘대화의 중요성’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고, 실제 그렇게 끝맺었는데, 정작 교육청은 대화의 장을 폐쇄하고 있어서 모순된다. 그래서, 글 밖에서는 이런 태도를 보인다. “자기주장이 관철될 때까지 요구하는 것도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시민사회 요구대로만 살기 힘든 행정의 입장도 헤아려 달라’는 당부였으면 족했을 글은 이렇게 오만과 편견의 끝장이 된다. 아마도 관(官)이 시민사회에 던진 기념비적 훈수로 남게 될 것이다. 그것도 ‘시민 협치’라는 포장지 위에서.

최근 법무부는 미등록 외국인으로 추방당할 뻔했던 몽골 출신 학생을 구제하겠다고 우리 단체에 알려왔다. 교육청에서 시작해서 인권위, 언론까지 두드리고 두드린 결과다. 중학교를 올해 광주서 졸업한 학생이었는데, 세금 아낀다는 법무부, 무미건조한 광주 교육청 사이에서 우리는 인권의 가치를 들이밀 수밖에 없었다. 물론, 법무부, 교육청이 생각하는 공익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우리의 공익은 추방 위기의 학생을 위해 존재해야 했다. 그러자고 정관까지 만들어 시민들이 단체를 이루었고, 무거운 돈을 모았으며, 그런 가치로 시민의 발걸음을 찍어왔으니까

이런 서사를 성실하게 쌓아왔기에 시민사회에서 인정받고 지금 관(官)의 눈앞에 서 있는 ‘단체들’을 독선적인 ‘일부’로 몰아세운다면 새 사랑방에 놀러 올 ‘다수’의 시민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교육청이 조직해서 만들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이틀 후면 제22대 국회의원 선거다. 선거가 손으로 민주주의를 담그는 일이라면, 시민 운동은 주권자들이 발로 직접 일구는 민주주의다. 누구를 위한 공익이냐고? 그것은 헌법의 뿌리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주권자들의 발걸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