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곽복률>‘남도’, 품격은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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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곽복률>‘남도’, 품격은 지켜야 한다
  • 입력 : 2025. 06.19(목) 18:06
곽복률 강진군 문화관광홍보담당관
1990년대 중반, 문화사학자 유홍준 교수는 강진을 ‘남도답사1번지’라 명명했다. 이는 단순한 관광 브랜드가 아니라, 한국 근대문학과 예술, 불교와 유교, 그리고 다산 정약용 선생의 실학 정신이 살아 숨 쉬는 땅이라는 역사적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강진은 유 교수가 직접 걷고 머물며 느낀 체험 위에 쌓인 고유한 문화적 브랜드이다. 그 상징성을 기리며, 강진군은 1996년 유홍준 교수를 ‘강진군 명예군민 1호’로 위촉했다. 이는 단순한 감사의 의미를 넘어, ‘남도답사1번지 강진’이라는 이름의 출발이 단지 행정의 브랜딩이 아니라, 문화인의 철학과 현장의 경험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주는 증표이다.

30년 가까이 강진군은 이 이름의 가치에 걸맞은 실천을 해왔다. 다산초당, 백련사, 영랑생가, 사의재, 청자도요지, 가우도, 월출산 백운동원림 등 역사문화자산을 하나의 스토리로 엮어 관광객들에게 제공했고, 군민들도 ‘답사’라는 키워드를 통해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다져왔다. 이름 하나에 머문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의 정신을 생활 속에 정착시킨 것이다.

그리고 최근, 우리는 이 문화유산 위에 또 하나의 성과를 올렸다. 바로 ‘강진 반값여행’ 정책의 성공적 안착이다. 2017년 ‘강진 방문의 해’를 맞아 시작된 이 정책은 전국에서 이례적인 주목을 받았고, 내수 진작과 지역경제 활성화는 물론, 전국 지자체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다. 이는 단순한 할인 정책이 아니라, ‘강진답게 여행하는 방법’을 만든 문화·행정 복합정책이었고, ‘남도답사1번지’라는 브랜드의 현재형 실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최근 출간된 ‘남도답사0번지 영암’이라는 책은 우리 지역민에게 깊은 아쉬움과 당혹감을 안긴다. 단순히 숫자 앞뒤의 문제가 아니다. 30년 가까이 정성껏 가꿔온 타 지자체의 정신적 자산을, 창의적 고심 없이 유사한 포장으로 차용한 점에서 이는 지역 간 상생과 신뢰라는 공동의 가치를 훼손하는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이 책의 저자가 영암군 출신의 유명 언론인이라는 사실은 씁쓸함을 더한다. 지역을 아끼는 마음에서 출발했을지 모르나, 언론이라는 공적 자산을 기반으로 자기 고향을 띄우기 위한 방편으로 타 지역의 브랜드 상징을 차용한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저자의 영향력은 단순한 개인의 의견을 넘어 사회적 메시지로 받아들여지기에, 그 책임도 무겁다. 지역 간 건강한 경쟁이 아닌, 브랜드 서열화를 조장하는 듯한 시각은 남도의 가치와 정신을 가볍게 만들 뿐이다.

영암 역시 월출산과 왕인, 마한문화 등 고유한 콘텐츠를 지닌 훌륭한 고장이다. 그렇기에 더욱 영암만의 언어와 방식으로 자신을 설명해야 진정한 의미의 브랜드가 된다. 타 지자체의 상징 위에 ‘0번지’라는 포장으로 우위를 암시하는 듯한 방식은, 상생보다는 서열화의 유혹에 가까워 보인다.

브랜드는 누가 더 진정성 있게 가꾸고, 시대에 맞게 실현해 왔느냐에 따라 신뢰받는 법이다. 강진군은 ‘남도답사1번지’라는 이름을 감투처럼 쓴 것이 아니라, 30년 동안 답사의 길을 열고, 그 길을 걷는 수많은 방문객과 함께 그 의미를 실천해 왔다. 유홍준 교수가 이름을 주었고, 강진군민이 그 이름의 가치를 지켜낸 것이다.

나는 영암의 이번 ‘남도답사0번지’ 출간을 경쟁의 대상으로 삼고 싶지 않다. 다만 이 행보가 상생의 취지와 지역 브랜드 윤리에 부합하는지, 그리고 지역적 영향력을 가진 저자의 책무에 걸맞은 판단이었는지를 되묻고자 한다. 모방이 아닌 창조, 경쟁이 아닌 존중. 그것이야말로 대한민국 지방 브랜드가 나아가야 할 건강한 길이라는 믿음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