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어느 독서실 골방에서 한겨울을 나고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는 길이었다. 완행버스 차창으로 눈을 돌리다가 느닷없는 울음이 쏟아졌다. 이런 해괴하고 뜬금없는 일이라니. 이유도 내력도 알 수 없는 복받쳐 오름에 나는 몹시 당황하였다. 옆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 꺽꺽대는 사이, 남도의 들녘이, 샛강이, 야트막한 언덕들이, 갓 올라온 연록의 이른 봄을 장식하며, 손잡아 달리듯 스쳐 지나갔다. 울음의 출처가 궁금했다. 단지 갓 올라온 들녘의 풀들을 바라보았을 뿐인데 말이다. 어쩌면 내 것 아닌 어떤 울음들이 들녘을 배회하다 터무니없이 심...
2024.01.18 12:31어릴 때 기억 중 하나, 친구 어머니가 아이를 낳다가 돌아가셨다. 출혈이 심해서였다. 출산이라는 축복이 장례라는 슬픔의 시공으로 일순간 바뀌었다. 사람들이 좁은 돌담길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우리 마을 유일하였던 한약방 어른의 얼굴도 순흑빛이 되었다. 이 경험이 어린 우리에게 어떤 무게감으로 다가왔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많은 세월이 지난 후이리라. 삶과 죽음의 시공이 바뀌는 게 사실은 순간이자 찰나라는 것 말이다. 당골들의 분주한 발길이 괜한 마당만 즈려밟는 풍경의 중심, 작은 대나무 가지를 손에 잡고 죽은 이의 이야기에 집중하...
2024.01.11 13:312024년을 청룡의 해라고 한다. 음력으로 쇠는 단위이고, 역(易)으로 따지면 입춘을 기점 삼는다. 요즘은 양력과 병치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고대의 설날로 따지면 동짓날을 기점 삼기도 한다. 하지만 관념이나 제도 모두 늘 재구성되어온 것이라, 핏대 올리며 따질 이유까진 없다. 지구의 공전이나 고대로부터의 역학이 그렇다는 것이다. 열두 개의 해마다 상징을 넣어 의미를 부여한 것은 동서양이 마찬가지다. 한 해를 ‘띠’라고 부르는 것은 고리, 매듭, 환대(環帶) 따위와 상관된다. 자세한 것은 따로 다룬다. 열두 띠 중에서 용띠가 이...
2024.01.04 10:572023년 계묘년을 보낸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해였다. 무엇보다 윤석열 정부의 뜬금없고 가닥 없는 퇴행이 도드라진 해였다. 세상이 정치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하여 내심 불편하지만 어쩌겠나 그것이 우리의 목줄을 움켜쥐고 있는 형국이니. 정치에서 벗어나 오로지 문화를 말하고 문화로 실천하며 문화로 승부하는 세상이 올 수 있으려나. 개인적으로 정리해둬야 할 일들이 많지만, 논쟁은 언급해두고 건너가야겠다는 생각에서 이 글을 쓴다. 홈페이지 첫 화면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전라도천년사 편찬은 전라도 정도 천년을 맞이하여 2018년...
2023.12.28 13:22~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 그대 잘 가라~ 북한군 중사 오경필(송강호)을 뒤로하고 외다리를 건너오던 이수혁(이병헌)이 쓰러진다. 긴박한 군사들의 동선이 서로 뒤엉키는데, 비 내리는 숲과 나무들 사이로 귀에 익숙한 선율들이 헐떡이며 쫓아온다. 끝내 눈을 감는 주인공의 시야, 마치 헐거운 수의처럼 찢어지는 빗방울들, 빗살무늬의 가락들, 낙엽들, 바람들, 아니 핏방울 선연한 이야기들이 천천히 내려...
2023.12.21 12:35“한평생 짊어지고 온 삶/ 땅끝마을에 내려놓고/ 담배 한 대 피워무는 그대/ 아스라이 걸려 있는 시간들을/ 무심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네/ 그렇게도 보기 싫고/ 때로는 지워버리고 싶었던 발자국들 속에/ 꽃들이 피어나는 것을 바라보고 있네~” 지난 양력 동짓달 초순, ‘땅끝순례문학관’에 울려 퍼진 잔잔한 노래의 들머리, 내가 장구 하나 들고 남도 고유의 당골(무당) 소리로 음영(吟詠)하였다. 조각가 강대철이 소설가 송기원에게 헌정한 시(詩)에 음률을 넣은 곡이다. 강대철이 발의하여 준비하고 이 힘을 보탰으며 해남의 땅끝순례문학관이 주...
2023.12.14 12:46마흔 번의 봄날이 다녀간 해였다. 구두통 들고 꼬꾸라져 죽었던 구두닦이의 피도, 나팔바지 멋지던 넝마주이의 두개골도, 남도땅 어느 억새 아래 진토되었을 시간, 누군가의 아빠,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누이, 아! 누군가의 사랑, 이승을 뜨지 못한 그 아무개들의 넋이 강산마저 무시로 변한 무대로 현현하였다. 두드리는 북소리는 마디마디 천지를 흔들었다. 격조 높은 선율들이 조우 해낸 무대의 여기저기 묵혀두었던 울음들이 백색 무희의 옷자락을 흔들어댔다. 그들의 몸짓은 꼬이고 뒤틀린 이 환장(換腸)할 세상에 토해내는 핏덩이 같은 것이었다....
2023.12.07 13:19달항아리와 귀얄찻그릇에 스민 고대신화 백자대호 즉 달항아리가 지닌 심미적 세계는 삼척동자라도 알 만큼 익히 알려져 있다. 국보로 지정되기도 하고 김환기 등의 거장들에 의해 자주 그려지기도 했다. 수많은 도공, 예술가들에 의해 빚어지기도 했다. 이 심심한 백자 항아리가 한국을 대표하는 이미지 나아가 한국미의 전형으로까지 대접받았다. 시대정신이 그리 만든 것이다. 하지만 백자의 출현 이후 그저 생활 도기의 하나로 치부했던 시절이 길었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는 대부분의 것들이 그러할 것이다. 법고창신의 행로에는 늘 부침이 있...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2023.11.30 14:48“단풍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보았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기까지 했던 프로스트의 시, 의 앞머리다. 대개 인생의 두 갈래 길 혹은 여러 갈래 진로를 결정하는 일에 비유되곤 한다. 성경 마태복음 7장과도 연결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
2023.11.23 12:48(줄여서 ‘민박’)은 송석하(1904~1948)에 의해 설립된 (1945. 11. 8)을 효시로 삼는다. 임재해는 「조선민속학회 창립의 산파 송석하와 한국 민속학의 길」(한국민속학 57, 2013)이란 글에서 송석하의 업적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와 같은 맥락에서 를 설립하는데 산파 역할을 한 인물이라는 점, 사재를 털어 학회지 『조선민속학』을 간행한 업적 등을 평가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학자들과 어울렸다는 점을 들어 식민주의 공범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민속학 및 인류학 전공의 여러 학자들이 가열찬 논쟁을 ...
2023.11.16 13:18“상여가 나갈 때 북을 치고 앞에서 인도하고 큰 소리로 울며 뒤에서 따라가는 것은, 결코 오랑캐의 풍속이다. 의관을 갖춘 집안에서 어찌 차마 이런 풍습을 본받겠는가. 반드시 요령(搖鈴) 하나를 준비하여 북을 대신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또 애경사와 관계된 일은 더더욱 반상(班常)의 구별이 있어야 마땅하다.” 진도에 유배 왔던 유와 김이익이 그의 저술 『순칭록(循稱錄)』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진도의 풍속을 힐난하고 나무라는 언행은 더 이어진다. “우리 성상께서 등극하여 5년이 된 을축년(1805)은 내가 벌을 받고 이곳으로 유배 ...
2023.11.09 12:54판소리 중 어미 잃은 심청이를 안고 동냥젖 얻어 먹이는 장면에 지팡이가 등장한다. 영화나 연극 따위의 풍경을 고려한다면, 지팡이 짚고 더듬거리는 이 장면이야말로 ‘프롤로그’에 해당한다. 누군가 심청가를 영화나 음악으로 재구성할 때는 참고해도 좋겠다. 서사의 얼개로 본다면 심청이가 첫 이레를 지나지 않은 점을 주목해야 한다. 대문에 걸어둔 금줄을 세이레 지나고 나서야 걷어내는 이유가 있다. 모친의 죽음과 심청의 출생은 ‘죽고 살고’라는 사건의 배치라는 점에서 내가 늘 주목하는 방식이고 장면이다. 이야기의 전개에서 심학규는 늘 지팡이...
2023.11.02 12:59병신춤이라 부르지 마오/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 장애자들/ 내 동생/ 어린 곱사 조카딸의 혼이/ 나에게 달라붙어요/ 오장 육부가 흔들어 대는 대로/ 나오는 춤을 추요 역설적이다. ‘병신춤’으로 유명해졌고 우리 사회와 교감했으며 'ᄆᆞᆷ'(몸과 마음의 합성어로 내가 사용하는 용어) 비틀어 한 시대의 역사를 써 내려간 분인데, 정작 ‘병신춤’을 입에 올리기라도 하면 화부터 냈다. 왜 그랬을까? 백승남이 진솔하게 집필한 단행본 제목에 그 이유가 들어있다. 『춤은 몸으로 추는 게 아니랑께』(주/우리교육,...
2023.10.26 13:08올해 글쓰기의 시작을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40주년 기념 기조발표로 시작했다. 우리나라 작은 섬들의 이름을 ‘한국의 지명총람’에 기대어 분석하여 씨줄 날줄로 엮어본 것이다. 안섬과 바깥섬의 ‘토폴로지(topology)라 표현했다. 본래 수학적 개념이지만 인문지형의 형질이나 지세를 설명하기 위해 내가 차용한 것이다. 길고 짧고 크고 작고 높고 낮거나 위아래 오른쪽 왼쪽의 대칭을 들어, 섬 이름을 정하고 마치 음양(陰陽)이나 천지(天地)처럼 쌍으로 겹으로 혹은 흥부네 아이들처럼 순서를 지어 명명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한 편의 발표로는 ...
2023.10.19 14:14칼로 모가지를 베랴 붓으로 치랴 무명의 검객이 칼 대신 큰 붓을 들어 글자를 써 내려간다. 글씨는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치기도 하고 거대한 파도처럼 급습해오기도 하며 사막을 내닫는 말처럼 쏜살같기도 하다. 글자를 쓰는 듯한데 글씨가 아니요, 붓을 휘두르고 있어도 붓이 아니다. 때때로 모래판을 그어 내리는 지팡이가 되었다가 적의 목을 베는 예리한 칼이 되었다가 철학의 기운을 뿜어내는 장필(長筆)이 되기도 한다. 알지 못할 차원의 춤과 검객의 도술을 거쳐 마침내 진시황의 용좌에 검(劍)이라는 글자가 걸린다. 장이머우의 영화 ‘...
2023.10.12 1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