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혼을 이루고 있다는 푸른 빛, 죽기 얼마 전에 몸에서 빠져나간다고 하는데, 크기는 작은 밥그릇만 하다. 전라지방의 방언.” 국어사전의 혼불에 대한 설명이다. 남자의 혼은 대빗자루 모양의 길고 큰 불덩이고 여자의 혼은 접시 모양의 둥글고 작은 불덩이라고 한다. 이즈음 세간의 화제로 떠오르고 있는 영화 에 등장하는 도깨비불이 그것이다. 커다란 횃불이 공중을 휘젓고 날아다닌다. 푸른빛의 밥그릇 크기 도깨비불로는 품은 이야기를 다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을까? 전반적인 정서는 풍수 관념과 무당굿이다. 일제의 잔재와 강제점유를 풍수 관...
2024.03.14 13:38“윈디는 경복궁 정문 앞 한 쌍의 해태 석상을 보며 마치 광화문을 지키기 위한 경계 근무자 같다고 생각했다. 밤에 보면 더 그런 느낌이 들었다. 호랑이랑 코뿔소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해태 같은 아이가 나오지 않을까. 아무리 봐도 얼굴은 호랑이나 사자를 닮았고 머리는 코뿔소처럼 보였다. 비늘로 덮인 근육질의 다부진 몸은 그림 속의 용처럼 보였는데, 얼핏 보면 괴물 같아도 은근하고 귀여운 미소의 소유자였다. 윈디의 눈에는 웃고 있는 해태가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체셔 고양이처럼 보였다. 체셔 고양이의 미소를 지닌 해태가...
2024.03.07 14:09부모는 죽은 아이를 안고 커다란 슬픔으로 울부짖는다. 무슨 악귀가 달라붙어서 어린 목숨을 앗아갔느냐고 소리친다. 아들이건 딸이건 자식은 똑같으며 오늘 아침 숨을 거둔 첫아이 시체 위의 하얀 이불이 눈물로 젖어 있다. 모든 식구들은 아직 시체 속에서 웅크리고 있을 보이지 않는 악귀를 두려워하면서도 죽이고 싶은 마음이다. 이 악귀가 또다시 태어나는 아기를 잡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솜씨 있는 이웃에게 오쟁이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더니 이쁘게 엮어와서 뜰 위에 놓아두었다. 아기 어머니는 깨끗한 보자기로 시체를 싸서 오쟁이를 잡고 있는 ...
2024.02.22 14:17지난 설날 광주교통방송 아침 인터뷰를 했다. 올해가 갑진년(甲辰年) 청룡의 해이니 남도의 용을 설명해달라는 취지였다. 갑진년 양력설 본 지면에 ‘용보다 소사 아저씨’라는 제목으로 남도의 용을 소개한 바 있는데 종종 질문해오는 사람들이 계시기에 답변 삼아 다시 언급한다. 갑진(甲辰)은 60갑자 중 하나다. 우리 조상님네들은 세상의 주기를 60년으로 계산했다. 하늘의 수 천간(天干) 즉 10간과 땅의 수 지지(地支) 즉 12지를 서로 교직시켜서 최소공배수인 60을 만들었다. 갑자년, 을축년 등으로 조합해 열 번이 끝나면 10간의 첫째를...
2024.02.15 13:21진도군 의신면 내동마을 뒷산에 윷판바위가 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삼별초군들이 윷놀이하면서 새겨두었다고 한다. 졸저 『산자와 죽은자의 축제』(민속원)을 쓰면서 이 정보를 얻게 되었으므로 답사한 지 꽤 되었다. 하지만 책이 편집 완료된 시점이어서 졸저에 싣지는 못했다. 이후 전남지역의 윷판바위를 추적하던 차에 광양에도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영암군 군서면 구림마을에 있는 성혈 바위에도 윷판바위와 유사한 패턴들이 있다. 다만 구체적인 형태가 드러나지 않아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보는 중이다. 전북 임실의 윷판바위에 대해서도 본...
2024.02.01 10:31세이레는 아이를 낳은 지 스무하루째 되는 날을 말한다. 출산일부터 대문에 금줄을 쳐서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아이가 출생한 첫 7일째를 초이레, 14일째는 두이레, 21일째는 세이레라고 한다. 7일을 세 개로 묶어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각각의 이레마다 새벽에 삼신(三神)에게 흰밥과 미역국을 올린다. 세이레째 금줄을 내리게 되면 비로소 일가친척이나 마을 사람들이 실과 돈 등을 가지고 와서 아기를 대면한다. 세이레를 보통 ‘삼칠일’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군신화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삼칠일, 백일을 비롯해 천부...
2024.01.25 13:30광주 어느 독서실 골방에서 한겨울을 나고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는 길이었다. 완행버스 차창으로 눈을 돌리다가 느닷없는 울음이 쏟아졌다. 이런 해괴하고 뜬금없는 일이라니. 이유도 내력도 알 수 없는 복받쳐 오름에 나는 몹시 당황하였다. 옆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 꺽꺽대는 사이, 남도의 들녘이, 샛강이, 야트막한 언덕들이, 갓 올라온 연록의 이른 봄을 장식하며, 손잡아 달리듯 스쳐 지나갔다. 울음의 출처가 궁금했다. 단지 갓 올라온 들녘의 풀들을 바라보았을 뿐인데 말이다. 어쩌면 내 것 아닌 어떤 울음들이 들녘을 배회하다 터무니없이 심...
2024.01.18 12:31어릴 때 기억 중 하나, 친구 어머니가 아이를 낳다가 돌아가셨다. 출혈이 심해서였다. 출산이라는 축복이 장례라는 슬픔의 시공으로 일순간 바뀌었다. 사람들이 좁은 돌담길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우리 마을 유일하였던 한약방 어른의 얼굴도 순흑빛이 되었다. 이 경험이 어린 우리에게 어떤 무게감으로 다가왔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많은 세월이 지난 후이리라. 삶과 죽음의 시공이 바뀌는 게 사실은 순간이자 찰나라는 것 말이다. 당골들의 분주한 발길이 괜한 마당만 즈려밟는 풍경의 중심, 작은 대나무 가지를 손에 잡고 죽은 이의 이야기에 집중하...
2024.01.11 13:312024년을 청룡의 해라고 한다. 음력으로 쇠는 단위이고, 역(易)으로 따지면 입춘을 기점 삼는다. 요즘은 양력과 병치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고대의 설날로 따지면 동짓날을 기점 삼기도 한다. 하지만 관념이나 제도 모두 늘 재구성되어온 것이라, 핏대 올리며 따질 이유까진 없다. 지구의 공전이나 고대로부터의 역학이 그렇다는 것이다. 열두 개의 해마다 상징을 넣어 의미를 부여한 것은 동서양이 마찬가지다. 한 해를 ‘띠’라고 부르는 것은 고리, 매듭, 환대(環帶) 따위와 상관된다. 자세한 것은 따로 다룬다. 열두 띠 중에서 용띠가 이...
2024.01.04 10:572023년 계묘년을 보낸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해였다. 무엇보다 윤석열 정부의 뜬금없고 가닥 없는 퇴행이 도드라진 해였다. 세상이 정치 중심으로 돌아가는 듯하여 내심 불편하지만 어쩌겠나 그것이 우리의 목줄을 움켜쥐고 있는 형국이니. 정치에서 벗어나 오로지 문화를 말하고 문화로 실천하며 문화로 승부하는 세상이 올 수 있으려나. 개인적으로 정리해둬야 할 일들이 많지만, 논쟁은 언급해두고 건너가야겠다는 생각에서 이 글을 쓴다. 홈페이지 첫 화면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전라도천년사 편찬은 전라도 정도 천년을 맞이하여 2018년...
2023.12.28 13:22~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언 강바람 속으로 무덤도 없이 / 세찬 눈보라 속으로 노래도 없이 꽃잎처럼 흘러 흘러 / 그대 잘 가라~ 북한군 중사 오경필(송강호)을 뒤로하고 외다리를 건너오던 이수혁(이병헌)이 쓰러진다. 긴박한 군사들의 동선이 서로 뒤엉키는데, 비 내리는 숲과 나무들 사이로 귀에 익숙한 선율들이 헐떡이며 쫓아온다. 끝내 눈을 감는 주인공의 시야, 마치 헐거운 수의처럼 찢어지는 빗방울들, 빗살무늬의 가락들, 낙엽들, 바람들, 아니 핏방울 선연한 이야기들이 천천히 내려...
2023.12.21 12:35“한평생 짊어지고 온 삶/ 땅끝마을에 내려놓고/ 담배 한 대 피워무는 그대/ 아스라이 걸려 있는 시간들을/ 무심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네/ 그렇게도 보기 싫고/ 때로는 지워버리고 싶었던 발자국들 속에/ 꽃들이 피어나는 것을 바라보고 있네~” 지난 양력 동짓달 초순, ‘땅끝순례문학관’에 울려 퍼진 잔잔한 노래의 들머리, 내가 장구 하나 들고 남도 고유의 당골(무당) 소리로 음영(吟詠)하였다. 조각가 강대철이 소설가 송기원에게 헌정한 시(詩)에 음률을 넣은 곡이다. 강대철이 발의하여 준비하고 이 힘을 보탰으며 해남의 땅끝순례문학관이 주...
2023.12.14 12:46마흔 번의 봄날이 다녀간 해였다. 구두통 들고 꼬꾸라져 죽었던 구두닦이의 피도, 나팔바지 멋지던 넝마주이의 두개골도, 남도땅 어느 억새 아래 진토되었을 시간, 누군가의 아빠,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누이, 아! 누군가의 사랑, 이승을 뜨지 못한 그 아무개들의 넋이 강산마저 무시로 변한 무대로 현현하였다. 두드리는 북소리는 마디마디 천지를 흔들었다. 격조 높은 선율들이 조우 해낸 무대의 여기저기 묵혀두었던 울음들이 백색 무희의 옷자락을 흔들어댔다. 그들의 몸짓은 꼬이고 뒤틀린 이 환장(換腸)할 세상에 토해내는 핏덩이 같은 것이었다....
2023.12.07 13:19달항아리와 귀얄찻그릇에 스민 고대신화 백자대호 즉 달항아리가 지닌 심미적 세계는 삼척동자라도 알 만큼 익히 알려져 있다. 국보로 지정되기도 하고 김환기 등의 거장들에 의해 자주 그려지기도 했다. 수많은 도공, 예술가들에 의해 빚어지기도 했다. 이 심심한 백자 항아리가 한국을 대표하는 이미지 나아가 한국미의 전형으로까지 대접받았다. 시대정신이 그리 만든 것이다. 하지만 백자의 출현 이후 그저 생활 도기의 하나로 치부했던 시절이 길었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는 대부분의 것들이 그러할 것이다. 법고창신의 행로에는 늘 부침이 있...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2023.11.30 14:48“단풍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보았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기까지 했던 프로스트의 시, 의 앞머리다. 대개 인생의 두 갈래 길 혹은 여러 갈래 진로를 결정하는 일에 비유되곤 한다. 성경 마태복음 7장과도 연결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
2023.11.23 1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