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 화귀와 두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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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 화귀와 두꺼비
선덕여왕에게 반한 지귀와 술파가설화의 어부
  • 입력 : 2020. 04.08(수) 14:34
  • 편집에디터

민화 나리꽃과 두꺼비-이은숙 그림

"지귀(志鬼)는 신라 활리의 역인(驛人)이다. 선덕여왕의 아름답고 우아한 모습을 사모하여 마음 졸이고 눈물 흘리다가 모습이 초췌해졌다. 왕이 절에 행향(行香)하러 갈 때, 이런 소문을 듣고 그를 불렀다. 행향이란 불교의 재식(齋食, 법회의 시식)때 시주가 먼저 승려들에게 향을 나누어주는 의식을 말한다. 지귀는 절에 가 탑 아래서 왕의 행차를 기다리다가 홀연 깊은 잠에 들고 말았다. 선덕여왕이 잠든 그를 보고, 팔찌를 벗어 지귀의 가슴에 놓아두고 궁으로 돌아갔다. 후에 잠에서 깨어난 지귀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이윽고 마음속에 불이 일어나 그 탑을 둘러싸더니 변하여 불귀신이 되었다. 왕이 술사에게 명하여 다음과 같이 주사(呪辭, 점술에 정통한 사람이 주술을 행할 때 외는 말)를 짓게 하였다. '지귀의 마음 속 불이 몸을 둘러싸니 변하여 화신이 되었네. 창해 밖으로 옮겨가 보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지라.' 시속(時俗)에 이 주사를 벽에 붙여 화재를 막았다." '삼국유사' 「義解」 <二惠同塵>편, 선덕여왕과 지귀의 이야기다. 지귀설화, 술파가설화, 심화요탑설화 등으로 부른다. 이 이야기는 용수(龍樹)의 '대지도론(大智度論)' 권14, 술파가설화(術波伽說話)와 관련되어 있다. 어부 술파가가 왕녀의 미모에 반하여 식음을 전폐하자 왕녀가 만나자고 했다. 천사(天祠)에서 왕녀를 기다리던 술파가가 잠이 들었는데 왕녀가 그에게 목걸이를 빼놓고 간다. 잠이 깨어 그 사실을 안 술파가는 마침내 몸에서 불이 나 타죽고 만다. 선덕여왕을 사모하는 마음이 불이 되어 스스로를 살라버렸던 지귀와 같다. 여자가 이성적 판단을 못하고 감정에 휘말려 음심(淫心)에 빠지는 것을 불교적 입장에서 경계하는 내용으로 풀이한다.

유럽인들이 불태워 죽인 마녀와 마법사

잠이 깬 지귀는 여왕이 자신에게 다녀갔음을 알고 사모의 정이 더 불타올라 마침내 화귀(火鬼)로 변해버렸다.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게 불타올랐으면 불이 될 수 있을까? 이 이야기의 결말이 의미심장하다. 지귀가 타죽어 화신(火神)이 되고 주사를 지어 문벽에 붙임으로써 화재를 막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난해한 설화를 이해하기 위해 유럽 근대 제전의 한 풍경을 감상해볼 필요가 있다. "근대 유럽의 불의 제전이 마녀와 마법사들을 불태우거나 차단함으로써 마법의 힘을 분쇄하려는 시도라고 보는 우리의 해석이 옳다면, 우리는 켈트족의 인간제물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해야 할 것 같다. 곧, 드루이드교 사제들이 고리버들 우상 속에 가두어 불태운 사람들은 마녀나 마법사라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불을 이용한 처형방법을 선택한 까닭은, 생화장이야말로 그 해롭고 위험한 존재들을 제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추정해야 한다. 켈트족이 사람과 함께 불태운 가축과 많은 종류의 야생동물에게도 같은 설명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추축건대 그들도 마법에 걸려 있거나, 아니면 사실상 마녀나 마법사가 자기 동족의 행복을 파괴하려는 악독한 음모를 실행하기 위해 동물로 변신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 소개된, 마녀와 마법사의 화형에 대한 유럽 풍속 소개다. 프레이저는 여기서 마녀와 마법사들을 불태우는 것은 그들의 힘을 분쇄하려는 한 시도라고 해석한다. 생화장을 통해 가장 확실하고도 명료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덧씌워진 위험을 제거한다는 것이다. 비유해본다. 선덕여왕의 팔찌 이야기는 복선이 중층적으로 깔린 은유에 다름 아니다. 잠이 든 지귀에게 팔찌를 주는 행위는 보다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신화 해석을 요구한다.

스스로 불타죽은 지귀가 왜 화신(火神)이 되었을까?

주목할 것은 이 이야기가 비형랑의 무리들이 하룻밤 만에 다리를 놓은 영묘사 화재사건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비형랑은 통상 우리가 도깨비를 말할 때, 조상격으로 거론하는 인물이다. 신라의 화귀는 선덕여왕과 지귀 등으로 의인화되었지만 네 번에 걸친 영묘사 화재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당시 신라는 국내외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술파가설화에서는 천신이 술파가를 잠들게 함으로써 왕녀와의 만남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선덕여왕 또한 천신의 주문으로 지귀를 잠들게 하여 만나지 못한다. 의문이 든다. 이를 불교로 비유되는 한 세력들, 지귀로 대표되는 불의 세력간 갈등 혹은 조정 등으로 창조적 풀이를 할 수는 없을까? 지귀는 선덕여왕에 대한 사랑의 열정을 핑계 삼아 보다 근엄하게(스스로 불타올라 죽었으니까) 화형 집행을 당했고 그 의미들은 종교적으로 포장되었다. 종교적인 해석이었을까? 아니면 지극히 정치적인 해석이었을까? 신라 사람들은 지귀를 표적삼아 그들에게 덧씌워진 불의 위험 혹은 종교적 위험과 정치적 위난을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영묘사의 화재사건과 복합적인 세력들 간의 관계들, 종교적 주문들, 아마도 이를 의인화했을 지귀 이야기가 주는 영감들이 크다. 기사에 의하면 가장 완벽한 테크놀로지는 경주의 모든 마을 모든 집들 문벽에 붙여져 불을 포함한 악귀를 예방하는 역신(疫神) 기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설화적으로 화형시킨 지귀보다 이들에게 닥친 정치적 위험을 경고하는 징조는 따로 있었다. 바로 두꺼비의 울음이다.

신라와 백제의 두꺼비 울음소리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임에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 3~4일 동안이나 울었다.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물은 즉, 왕은 급히 각간 알천(角干 閼川) ·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병 2천을 뽑아 '속히 서쪽 교외로 나가 여근곡(女根谷)을 수색하면 필히 적병이 있을 것이니 엄습하여 그들을 죽이라.' 하였다. 두 각간이 명을 받들어 각각 군사 1천 명씩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가서 물으니 부산(富山)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다. 백제의 군사 5백 명이 그곳에 와서 숨어 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삼국유사'권1, 제1 기이(紀異第一),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 知幾三事)의 내용이다. 선덕여왕은 영묘사 창건 후 개구리가 3~4일 동안 계속해서 운다는 소식을 듣고 백제의 복병이 근처의 여근곡(女根谷)에 숨어들었음을 알아차렸다. 삼국유사 기사에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개구리가 노한 형상은 병사의 형상이며, 옥문은 여자의 음부를 말한다. 여자는 음(陰)이고 그 빛이 백색이며, 백색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는 것을 알았다." '삼국사기' 기록은 개구리를 두꺼비로 기록한다. "여름 5월에 두꺼비가 궁궐 서쪽의 옥문지(玉門池)에 많이 모였다. 왕이 이를 듣고 좌우에게 말하기를 "두꺼비는 성난 눈을 가지고 있으니 이는 병사의 모습이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서남쪽 변경에 이름이 옥문곡(玉門谷)이라는 땅이 있다고 하니 혹시 이웃 나라의 군사가 그 안에 숨어 들어온 것은 아닐까?"라고 하였다. 이에 장군 알천(閼川)과 필탄(弼呑)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가서 찾아보게 하였다. 과연 백제의 장군 우소(于召)가 독산성(獨山城)을 습격하려고 무장한 군사 5백 명을 이끌고 와서 그곳에 숨어 있었다. 알천이 갑자기 쳐서 그들을 모두 죽였다. '삼국사기'권제5, 新羅本紀 第五 선덕왕(善德王) 내용이다. 개구리와 두꺼비의 혼용은 크게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모두 물의 정령 혹은 음양론의 음(陰)을 기술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백제병사가 두꺼비로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귀의 화형과 두꺼비의 울음

신라 두꺼비에 대한 징조는 백제의 두꺼비로 이어진다. "여름 4월에 두꺼비 수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였다. 서울(백제의 수도 사비)의 저자 사람들이 까닭도 없이 놀래 달아나니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쓰러져 죽은 자가 1백여 명이나 되고 재물을 잃어버린 자는 셀 수도 없었다." '삼국사기'권제28, 百濟本紀 第六 의자왕(義慈王)조의 내용이다. 백제 의자왕 시선으로 본 두꺼비, 선덕여왕과 마찬가지로 성난 눈을 가진 병사의 의인화다. 여기서의 두꺼비 형상은 누구인가? 바로 신라의 군사다. 신라에서는 백제의 군사를 두꺼비의 성난 눈에, 백제에서는 신라의 군사를 두꺼비의 성난 모습에 투사했다. 두꺼비들 수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였는데, 마치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았으며 그 결과 쓰러져 죽은 자 재물을 잃은 자가 셀 수도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백제의 멸망을 보고하는 기사이기도 하다. 백제의 두꺼비들은 옥문지라는 음문에 들어가 울었고 신라의 두꺼비들은 모두 나무에 올라가 울었다. 천년도 훨씬 더 지난 지금 화신이 된 지귀와 두꺼비의 울음들을 상고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어느 날 우연히, 전승된 이야기 속의 도깨비불들, 혹은 강렬한 불놀이 의례들의 포장을 벗겨내다가 교묘하고도 잔인한 신화들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곤 한다. 그 안에는 내 어린 시절에 보고 들었던 불나방 같던 불도깨비들, 어쩌면 못다 이룬 사랑, 흩어 없어지지 않고 남은 미련의 덩어리 같은 오래된 정령들, 지귀처럼 산화되어 불로 화하지 못한 희미한 불빛들이 웅크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빛들이 도깨비불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이들은 도대체 어떤 미련이 남아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이목 없을 밤 시간만을 택해 허공을 날아다녔던 것일까? 이들이 두려워하고 가슴 졸이던, 그래서 불같던 사랑을 막은 자들은 누구였을까? 사랑이라는 이름의 위험들을 도덕적인 기술로, 종교적인 장치로, 혹은 정치적인 술수로 화형시켰던 사건의 행간에는 두꺼비 울음으로 비유된 예시와 경계의 징후들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혹시 지금 어디서 두꺼비들이 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종교의 이름으로 혹은 정치의 이름으로 화형 시켜야만 할 어떤 위험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아무리 시절이 어수선하고 가닥이 잡히지 않는다 해도, 신라가 망하던 시절만큼은 아닐 텐데, 못내 두리번거리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어떤 이름의 열정들이 폭발해 불도깨비가 되는 자 없는지, 어느 연못과 숲들에 기어올라 우는 두꺼비 떼들은 없는지.

남도인문학팁 -영묘사(靈妙寺)

경주에 있었던 선덕여왕 당시 창건한 사찰이다. 신라 칠처가람(七處伽藍)의 하나로, 원래 큰 연못이 있었는데, 선덕여왕 때 두두리 귀신무리가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우고 창건했다는 절이다. 사천왕사와 더불어 양지(良志)의 작품이 가장 많이 간직되었던 사찰이다. 장육삼존불을 만들 때 신라사람들이 다투어 불상을 만들 진흙을 운반하면서 불렀다는 노래가 향가 「풍요(風謠)」다. 노동요의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1460년(세조6)에 봉덕사의 신종(神鍾)을 이 절로 옮겨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초기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절터에는 금당터를 비롯해 동서 대칭으로 있던 두 개의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당간지주를 비롯해, 영묘사라고 찍힌 기와도 발견되었다. 도깨비와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민화 책거리, 조선민화박물관 소장-오른쪽03을 보면, 용과 두꺼비가 안고 있는 책장이 보인다

MBC드라마 선덕여왕. 뉴시스

드라마 선덕여왕역의 이요원 . 뉴시스

드라마 선덕여왕역의 이요원 . 뉴시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지귀의 이미지를 합쳐만든 비담역의 김남길. 뉴시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지귀의 이미지를 합쳐만든 비담역의 김남길. 뉴시스

경주 낭산 선덕여왕릉. 뉴시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