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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이슈 8-4> 여순항쟁의 의미와 특별법이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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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이슈 8-4> 여순항쟁의 의미와 특별법이 필요한 이유

주철희(역사연구자·역사공간_벗 대표연구원)

게재 2020-10-18 18:16:18
여순사건 72주년을 하루 앞둔 18일 여수시 만흥동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 인근에 위치한 마래2터널에서 차량들이 통행하고 있다. 총연장 640m, 폭원 4.5m, 높이 4.5m인 마래터널은 1930년 일제강점기에 당시 건설 노역자들이 쇠망치와 정으로 만들어졌다. 나건호 기자
여순사건 72주년을 하루 앞둔 18일 여수시 만흥동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 인근에 위치한 마래2터널에서 차량들이 통행하고 있다. 총연장 640m, 폭원 4.5m, 높이 4.5m인 마래터널은 1930년 일제강점기에 당시 건설 노역자들이 쇠망치와 정으로 만들어졌다. 나건호 기자
주철희 (역사연구자·역사공간_벗 대표연구원).
주철희 (역사연구자·역사공간_벗 대표연구원).

1948년 4월3일, 제주도에서는 공동체 파괴와 도민 살상 반대 그리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무장봉기가 발발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으나 해결되지 않은 제주도 문제는 이승만 정권에게 골칫거리였다. 정부와 미임시군사고문단은 1948년 10월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김상겸 대령)를 설치하면서, 기존 경찰중심의 진압작전에서 군 주도의 토벌작전으로 전환한다. 제주도 초토화 작전을 알리는 신호였다.

제주도 초토화 작전을 위해 여수 제14연대에 출동명령이 하달됐다. 1948년 10월19일 제14연대 군인들은 제주도 출동명령을 거부하며 봉기했다. 제주도 출동명령은 국군의 사명에 부합하지 않은 부당한 반헌법적인 명령이었다. 군인의 봉기는 미군정에서 이승만 정권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사회적으로 불만이 고조되었던 지역 주민에게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특히 경제적 불만이 최고조에 달하던 민중이 호응하고 지지하면서 전남지역을 비롯한 전북․경남 일부지역까지 확산됐다.

군인의 봉기에 민중이 호응하고 지지했던 배경에는 첫째, 정치적으로 해방 이후 자주통일국가 건설이 아닌 단독정부 수립이다. 둘째, 사회적으로 일제강점기 민족반역자였던 관료와 경찰이 애국자로 변신하여 민중을 탄압했다. 셋째, 경제적으로 토지문제 미해결과 관료들의 수탈과 폭정 등으로 생활이 매우 곤궁했다. 즉 민중의 불만이 가득했던 시점에 군인의 봉기는 억압된 분노를 표출하는 도화선이 됐다.

10월23일 순천, 10월27일 여수가 국군에 의해 점령되면서 항쟁은 오래가지 못했다. 군과 경찰은 무차별적인 민간인 색출에 나섰다. 이승만 대통령은 "남녀 아동까지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시오. 조직을 엄밀히 해서 반동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여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발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로 복종하도록 하라"는 무자비한 명령을 지시했다. 여순항쟁 피해규모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여순항쟁 1주년이 되던 1949년 10월25일 전남도 당국에서 밝힌 피해자는 1만1131명이다. 이후에도 피해는 지속됐기에 최소 1만5000명에서 최대 2만명 정도로 추정한다.

여순항쟁은 대한민국 현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이승만은 여순항쟁을 계기로 반공국가 건설과 장기집권을 위한 사회로 재조직했다. 국군은 '숙군'을 통해 반공 군대로 정화하고, 경찰은 인력을 증가하여 국민 생활 속에 파고들었다. 교육계도 학도호국단을 결성했다. 현대사의 최대 악법인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고, 이듬해 계엄법을 제정했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주권재민 헌법적 가치가 통치권자의 권력에 의해 제약되고 침해되는 반민주주의 유산은 여순항쟁을 악용하면서 시작됐다.

여순항쟁의 피해 규모도 파악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여순항쟁이 대한민국 현대사에 미친 영향과 여파가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국가차원의 진상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2005년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법이 통과되어 진실화해위원회가 활동을 했지만, 피해신청자의 명예회복을 밝히는 데 그쳤다.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이 필요한 이유는 유족의 맺힌 '한'을 푸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 법치주의 체제를 무시했으며, 공동체를 파괴했고, 인권을 말살한 복합적인 문제의 규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순항쟁 촉발은 국가권력기구인 국군에서 시작됐다. 국군의 통수권은 대통령에게 있다. 군대가 왜 사건을 일으켰는지를 비롯하여 전반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즉 군인의 궐기에는 어떤 배경이 작용했고,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이며, 사건은 어떻게 전개됐으며, 그 결과가 무엇이었고, 대한민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국가 차원의 조사를 말한다.

여순항쟁은 여수와 순천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다. 대한민국 역사이다. 단순한 역사가 아니라 반헌법적이며 반민주적인 사회 체제로 전환과 반공문화(빨갱이 문화)를 만들어 국민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반공국가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던 사건이다.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통일국가를 지향하는 헌법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여순항쟁의 진실을 규명하는 일을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된다. '여순사건 특별법'이 올해 내로 반드시 제정되기를 갈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