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에세이·최성주> '탈무드 교육' 유태인들, 정치·경제 등 전세계 석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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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에세이·최성주> '탈무드 교육' 유태인들, 정치·경제 등 전세계 석권
최성주 고려대학교 특임교수·전 주 폴란드 대사||24)유태인과 폴란드, 히틀러(1)
  • 입력 : 2021. 02.08(월) 12:50
  • 편집에디터
최성주 고려대학교 특임교수·전 주 폴란드 대사
기원전부터 바빌로니아 및 페르시아 등 침략을 받은 유태인들은 기원전 63년부터 로마제국 지배를 받는다. 로마제국 당시부터 유태인들은 유럽 전역과 인도, 중국 등으로 진출하며 본격 유태인 대이동(diaspora)이 시작됐다. 한때 1800만 명에 달하던 전세계 유태인 수는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대학살로 급감한다. 오늘날 1400만명이 이스라엘 및 미국, 프랑스, 영국 등 130여 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지구촌 대표 유랑민족인 유태인은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까지 2000년 넘게 세계 각지를 떠돌았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전 세계에서 유태인으로 구성된 유일한 나라다. 2차 세계대전 중 영국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은 "유태인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인종"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영리하고 계산적인 유태인들은 거주하는 국가에서 금융업과 보석업, 무역업 등에 종사하며 부를 축적한다. 이들은 자신의 종교적 전통과 독특한 풍습을 고집함에 따라, 현지인들로부터 배척과 핍박을 당하곤 했다. 셰익스피어의 명작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은 유태인의 전형(典型)이다. 유태인은 그들만의 경전인 탈무드의 영향으로 독창성이 강하다. 바다를 뜻하는 탈무드는 '무한대의 지혜를 추구한다'는 뜻이다. 유태인들은 4세기 동안 유럽 각국의 유태인 집단거주지인 '게토(Ghetto)'에 살면서 일반교육에 대한 접근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그들이 사회에 진출하며 수많은 사상가, 철학자, 문인과 문화예술인으로 변신할 수 있었던 비결은 탈무드 교육에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 모세는 유태인의 시조다. 인류에게 폐해를 끼친 공산주의 창시자 마르크스와 레닌도 유태계라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생활력 강하고 교육열 높은 유태인들은 유럽과 미국에서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정·재·언론계 및 연예·문화계 등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 23%가 유태인이다. 미국 동북부 하버드와 예일 등 8개 명문사립대학은 '아이비리그'로 통칭되는데 이 대학 교수진과 학생 40%는 유태인이다. 언론매체 중 로이터, 워싱턴 포스트, 뉴욕 타임스, 월스트리트 저널, 타임스, 뉴스위크, CNN 등이 유태계로 분류된다. 유태인 없는 할리우드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유태인 출신 유명 인사는 예수 그리스도, 레오나르도 다빈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헨리 키신저, 조지 소로스, 워렌 버핏, 마크 주커버그 등을 꼽을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유태인 관련 영화와 문학작품은 '벤허', '쉰들러 리스트', '피아니스트', '인생은 아름다워'와 '안네 프랑크의 일기' 등이다. 이 중 '피아니스트'의 로만 폴란스키 감독과 '쉰들러 리스트'의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각각 폴란드계 및 미국계 유태인이다. 폴란스키 감독의 경우 모친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희생되고 그 자신은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살아 남았다.



유럽에서 가장 독실한 카톨릭 국가인 폴란드는 일찍부터 유태인들에 관용을 베푼다. 13세기부터 유태인의 자율권을 보장하면서 사회적인 차별을 최소화 한다. 유럽 전역 유태인들이 폴란드로 모여든다. 2차 세계대전 이전 폴란드가 유태인들의 최대 거주국가가 된 배경이다. 이들은 폴란드에서도 현지인들과 제대로 동화하지 못한 채 자신만의 전통과 풍습을 고집한다. 1929년 글로벌 대공황 영향으로 경제난을 겪은 폴란드인들은 부유하면서도 인색한 유태인들에게 증오와 반감을 드러낸다. "히틀러도 나쁘지만, 유태인도 나쁘다"고 외칠 정도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는 폴란드에서 유태인 대학살을 자행하기 위해 제 2도시인 '크라쿠프' 인근에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설치한다. 역설적으로, 나치는 유태인에게 가장 관용적인 폴란드에서 유태인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 9월 당시 폴란드에 거주한 유태인은 330만 명이다. 그 중 85%인 280만명이 나치에 희생되었는데, 180만 명이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을 당했다. 필자는 아우슈비츠 명칭을 둘러싼 폴란드와 독일의 갈등이 현재 진행형임을 폴란드 근무 당시 목도했다. 독일 정부는 나치즘을 불법화 해 나치식으로 경례하는 자도 처벌하고 있다. 일부 독일인들은 여전히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폴란드 처형장(Polish Death Camp)'이라 부른다. 마치 폴란드가 수용소를 운영한 것처럼 오해될 수 대목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폴란드는 당연히 반발한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