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흥룡사, 영산포역 앞 작은 구릉 너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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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시
"나주 흥룡사, 영산포역 앞 작은 구릉 너머에 있다"
장화왕후 오씨 기리는 나주 흥룡사터 가보니||나주 운전면허시험장 뒤 위치||사진에 나온 집터자리 등 확인||흥룡사 석등, 나주박물관에 전시||
  • 입력 : 2021. 02.24(수) 17:44
  • 박간재 기자

나주 흥룡사터가 있었던 곳으로 확인된 나주시 삼영동 일대. 나주=박송엽 기자

고려 태조 왕건이 장화왕후를 위해 지어준 흥룡사 터 발견은 윤여정 나주문화원 부원장의 20여 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윤 씨는 그동안 흥룡사와 고려 2대왕인 혜종(장화왕후의 아들)의 영정을 모신 사당 '혜종사'를 찾기 위해 각종 역사기록물을 섭렵해오고 있었다.

우연히 나주 출신 일본인이 쓴 책에서 흥룡사(처음에 일본인은 흥륭사로 표기, 후에 다시 흥룡사로 정정) 위치가 그려진 도면을 찾아내면서 결실을 맺게 됐다.

 

전남운전면허시험장 위 산길에 위치

지난 19일 일본인이 쓴 책에 담긴 흥룡사 도면이 가르키는 위치의 산자락을 찾았다. 전남운전면허시험장 진입로에서 왼쪽 길을 따라 500여m의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올라가는 방법도 있다. 산자락을 올라가면 작은 언덕 너머 잡풀로 뒤덮힌 평평한 논밭이 넓게 형성돼 과거 절터가 있을 법한 곳이 눈에 띈다. 일본인이 도면에 표시한 지역과 일치하는 곳이다. 흥룡사 터 근처에 서보니 마치 1000여 년 전 후삼국 시대 역사의 현장에 서 있는 듯하다. 흥룡사 터에서 맞을편을 바라보면 멀리 가야산도 내려다 보인다. 흥룡사 관련 자료 가운데 무명씨(無名氏)가 쓴 시문(時文) 중 '앙암의 동쪽'이라는 말이 나오는 데 이는 흥룡사에서 바라본 가야산을 의미하는 것과 일치했다.

'흥룡사 찾기' 나주시민의 오랜 숙원

흥룡사 찾기는 나주 시민들에게 숙원이었다. 나주 흥룡동은 고려 2대왕 혜종이 태어나 자란 곳이자 당시 영산강 일대 호족세력인 오다련의 딸로 고려 태조 왕건의 둘째부인 장화왕후의 고향이다. 장화왕후 오씨가 샘터에서 태조 왕건에게 물 한 바가지를 건네며 체하지 않게 버들잎을 따서 물에 띄워주며 배려했다는 완사천 역시 추정만 할 뿐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지 못하던 차였다.

그동안 흥룡사에 대한 기록은 지리지, 시인묵객 등이 쓴 기록에도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나주목 불우조), 금성읍지(사찰조), 금성일기, 이색, 김종직, 이원익 등이 쓴 자료에 공통적으로 '금강진 북쪽', '영산포역 인근 언덕'으로 나와 있어 같은 지역을 말하고 있다.

흥룡사 찾기 발품 마침내 발굴 결실

윤 부원장도 자료를 찾다가 1918년 조선급만주사출판부에서 발행한 '최신조선지지(地誌)'에서 '흥룡사는 영산포역 앞 작은 언덕너머에 있다'는 문구를 발견했다. 그의 연구 방향을 흥룡사 찾기로 방향을 틀게 한 순간이었다. 그 뒤 또 한 번의 놀라운 기록물과 맞닥뜨린다. 일제 강점기 1931년 영산포에서 태어나 영산포를 잊지 않고 지내던 일본인 좌굴신삼(左堀伸三·사호리 신조오)씨가 1992년 5월 출간한 '영산강하류역의 문화(전편)·광주항일학생사건'에서 흥룡사 터에 관한 내용을 찾았기 때문이다.

사호리씨도 윤 부원장과 같이 '조선철도여행안내' 책자를 통해 그가 어릴 적 살았던 나주지역에 대한 연구와 기록을 정리 해오고 있었다. 두 연구자가 동시에 문헌이나 일기, 시문 자료에만 나오던 흥룡사 터의 위치를 조선철도여행안내 책자에서 발견하고 비로소 흥룡사 위치를 확인하기에 이른다.

흥룡사 석등, 현존 유일의 유물 존재

흥룡사 관련 현존 유물도 존재한다.

현재 국립나주박물관 1층 로비에 있는 보물 제364호 석등도 흥룡사 부속물이었음이 확인됐다. 기록에 따르면 석등이 원래 나주 서문안에 있었는데 조선총독부가 1929년 경복궁에서 열리는 제1회 조선박람회를 위해 그해 9월5일 서울로 옮겼다. 해방 후까지 경복궁 내에 존치해 있다가 지난 2017년 국립나주박물관으로 88년만에 귀향한 바 있다.

현재 나주박무관 1층 로비에 있는 보물 제364호 나주서성문 안 석등. 흥룡사가 사라진 건 '조선 억불정책 탓'석등이 원래 나주 서문안에 있었는데 조선총독부가 1929년 경복궁에서 열리는 제1회 조선박람회를 위해 그해 9월5일 서울로 옮겼다. 해방 후까지 경복궁 내에 존치해 있다가 지난 2017년 국립나주박물관으로 88년만에 귀향한 바 있다. 서성문 안 석등이 원래 흥룡사에 있었다는 기록이 나옴에 따라 향후 나주 서성문 안 석등이라는 명칭을 흥룡사 석등으로 바꾸는 작업도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나주=박송엽 기자

윤여정(오른쪽) 나주문화원 부원장과 오종순(가운데) 나주오씨 종친회장이 흥룡사터로 확인된 자리 인근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나주=박송엽 기자

고려 태조 왕건이 지은 흥룡사가 왜 갑자기 이곳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까. 이는 조선의 억불정책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숭불정책을 펴며 불교를 장려한 반면, 조선은 억불정책을 통해 불교 대신 유교를 우대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불교가 쇠퇴하게 됐다. 흥룡사 내 혜종을 모신 사당인 '혜종사'에서 고려시대 내내 나주 주민들이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1428년 8월 세종실록에 '나주에 소장한 혜종의 진영 및 소상(흙으로 빚은 인물이나 신불상)을 개성 '유후사'로 옮겨서 각릉 곁에 묻으라'는 지침이 내려졌고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나온다.

흥룡사 터 일대를 매입해 관리하고 있는 나주오씨 종친회에서도 이번 흥룡사 터 위치 확인을 계기로 시굴·발굴, 개발에 협조하겠다는 입장이다.

오종순 나주오씨 종친회장은 "그동안 전설, 설화, 구전으로만 내려오던 흥룡사 터가 확인됐다는 데 의미가 깊다"며 "이를 토대로 나주의 역사가 재정립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좌굴신삼씨가 쓴 영산강하류역의 문화(전편)에 게재된 흥룡사 위치가 표기된 사진. 흥륭사지로 돼 있는데 후에 좌굴씨가 다시 흥룡사로 수정했다. 윤여정 나주문화원 부원장 제공

좌굴신삼씨가 찍은 흥룡사터 원경

흥룡사터 위치가 표시된 지도. 흥륭사지로 돼 있는데 후에 좌굴씨가 다시 흥룡사로 수정했다.윤여정 나주문화원 부원장 제공

흥룡사터 위치가 표시된 지도. 흥륭사지로 돼 있는데 후에 좌굴씨가 다시 흥룡사로 수정했다. 윤여정 나주문화원 부원장 제공

1918년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영산포 지도. 가운데 위쪽에 흥룡동이 나온다.

박간재 기자 kanjae.par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