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정동>호박이 매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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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칼럼
기고·김정동>호박이 매를 맞는다
김정동 수필가·전 광주농기센터장
  • 입력 : 2021. 06.22(화) 13:54
  • 편집에디터
김정동 수필가·전 광주농기센터장
잎을 쌈 싸 먹을 요량으로 호박을 열댓 구덩이 심었다. 흔히 볼 수 있는 늙은 호박과 단호박이다. 작년에는 포트에 파종된 묘를 사다 심었더니 물주기에 게을러서 실패했기에 금년에는 직접 씨앗을 구해서 구덩이를 파고 퇴비를 넣은 뒤 날캉한 나뭇가지를 휘어서 비닐을 씌웠더니 복스럽게 싹이 텄다. 고자(鼓子) 처갓집 다니듯 심심하면 밭에 가서 물도 주고 노린재도 잡아 주었더니 첫째 숫꽃이 피기 시작했다.

잠시 일손을 멈추고 그늘 밑에 앉아서 막걸리를 한잔하니 갈증도 가시고 어린 시절 시골 생각이 떠오른다. 여름 수제비죽을 한 그릇 먹고 나면 하늘엔 은하수가 물결을 치고 개똥벌레들의 군무가 시작되었다. 런닝셔츠를 벗어서 빙빙 돌리며 "뜨물 줄게 까락까락, 뜨물 줄게 까락 까락" 노래를 부르다가 개똥벌레가 낮게 나는 순간 벗은 옷으로 잽싸게 내리쳐 호박 숫꽃에 넣어 호박초롱불을 만들었다. 암꽃은 호박열매가 맺기 때문에 따면 안 되고 또 어린 호박 위에 피기 때문에 초롱불을 만들기엔 숫꽃이 제격이었다. 고사에 반딧불과 눈(雪)빛으로 공부를 했다는 형설지공(螢雪之功)의 이야기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호박초롱이 여름밤 최고의 놀이였다.

호박은 우리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에피소드나 속담을 가지고 있다. 옆집에 금순이 누나가 살았다. 금순이 누나를 지칭한 것은 아니었지만 금순이라는 이름이 흔했기에 애꿎게 누나가 피해를 입었다. "금순아 호박 삶아라. 기왕이면 큰 놈 삶아라. 너도 먹고 나도 먹고 호박같이 살쪄나 보자" 늘 누나를 놀려먹는 노래였다. 왜 호박은 못생기거나 별로 좋지 않은 대명사가 되었을까? 우리말에 "호박꽃도 꽃이냐?,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느냐?, 호박씨 까서 한입에 털어 넣는다. 호박 살같이 물컹한 놈" 등처럼 말이다. 하지만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다."는 말이 있듯이 좋은 의미도 있고 식재료로서 이로운 점이 많이 있다.

호박을 재배한 역사를 들추어보면 '청나라에서 들어온 박'이라는 뜻으로 오랑캐 호(胡)자를 써서 호박이라고 했단다. 아마도 지구상에서 가장 큰 열매를 맺기도 하고 일단 심어놓기만 하면 별 문제없이 잘 자라주는 친근한 식물로 사랑받는다. 호박에는 건강에 좋다는 항산화 성분인 베타카로틴이 많아서 임산부에게 가물치나 잉어를 넣어 고아 먹이면 붓기가 잘 빠지며 칼륨이나 각종 미네랄도 많아서 혈압강하, 피부미용 등에 좋다고 한다. 여러 가지 이로운 점을 차치(且置)하고, 나는 호박잎을 쌈 싸 먹는 것을 좋아한다. 또 어린 돼지 앞다리 살을 넣은 애호박 국밥을 최고로 즐긴다. 광주 광산구의 어느 애호박 국밥을 먹기 위해 한 두 시간 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은 일상이고 어떤 날은 재료가 동나서 못 먹고 되돌아 온 적이 있는데, 다른 이들도 애호박 국밥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 같다.

교육 현장에서 체벌을 해서는 안 되지만 식물도 매가 필요할 때가 있나 보다. 우리 세대들은 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께 매 맞는 일이 종종 있었다. 3학년 때로 기억된다. 꿈 내용을 발표하는 수업시간이었다. 여러 아이들은 흥이 나서 기차나 비행기를 타 보았다거나 서울에 갔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어서 같은 반 친구 서복남이 손을 들고 "저는요, 어제 밤에 선생님이 엿장수였어요." 라고 말했다. 교실이 웃음바다가 됐다. 순간, 선생님께서 복남이를 앞으로 불러 신고 있던 슬리퍼로 뺨을 인정사정없이 후려치셨다. 지금 생각하니 고무신짝이나 쟁기 보습 등 농기구를 마루 밑에서 몰래 꺼내어 엿 바꿔먹던 시절이었으니 얼마나 엿이 먹고 싶었으면 그런 꿈을 꾸었을까?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있다.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페레가 아이들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존중하여 체벌하지 말라는 주장이다. 요즘은 교육을 위한 사랑의 매까지도 불허하는 세상이니, 지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선생님이었다.

유년시절에 매 맞는 호박 넝쿨을 본 적이 있다. 늘 자애로웠던 우리 어머님은 아버지 없이 자란 나에게 때로는 엄하기는 하셨지만 직접 매를 때린 적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지깽이를 들고 "땅값 해라! 땅값 해라!" 하시면서 호박 넝쿨을 때리셨다. 내가 보기에는 말도 못하는 호박넝쿨을 때리시니 장난 같기도 하였고, 다 된 농사를 망쳐 놓은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호박이 매를 맞는 이유를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우리집 울타리 밑의 호박넝쿨은 불을 때고 남은 부엌재를 자꾸 내다 주거나, 냇가에서 다슬기를 잡아 삶은 것을 탱자가시로 알맹이만 빼먹은 후 내다 버린 껍데기가 거름이 되어 넝쿨이 기세 좋게 담 너머까지 뻗어 나갔다. 거름기가 너무 많으니 암꽃은 피지 않고 필요 없는 숫꽃만 많이 피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매를 때리는 행위는 바로 재배론의 적심(摘芯), 즉 순지르기 방법으로 생장을 억제하고 측지(側枝)의 발생을 많게 해서 열매를 많이 맺게 하는 효과를 어머님은 알고 계셨던 것이다.

호박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이 되면 불현듯 이제는 뵐 수 없는 어머님 생각이 난다. 호박잎이 너무 무성해질 때면 그 옛날 어머님처럼 댓가지를 들고 호박넝쿨을 때려주고 싶다. 어머님! 이렇게 때리면 될까요?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