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적 유전자·박재항> 잔인한 달과 메이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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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적 유전자·박재항> 잔인한 달과 메이퀸
박재항 한림대학교 글로벌학부 겸임교수
  • 입력 : 2022. 05.18(수) 15:49
  • 편집에디터

박재항 겸임교수

5월 1일 아침에 집밖으로 운동하려 나서는데, 찬바람이 불며 쌀쌀한 기운이 얼굴을 때린다. 혼잣말로 '5월인데'라고 하면서 스마트폰으로 기온을 확인하니 6도였다. 겨울에 살짝 포근해졌다고 할 때의 기온이 아닌가. 단지 하루 날이 가는 것이었지만, 달이 바뀐다는 데 너무 큰 의미를 둔 것인가 싶었다.

일년 열두 달의 달마다 상징하는 비유나 별명이 있다. 달의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많이 알려지고 쓰이는 게 아마도 4월과 5월일 것이다. 4월이라고 하면 '잔인한 달'이란 T.S. 엘리오트의 시 구절을 조건반사처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실제로 글에서 쓰면 진부한 표현이라는 '클리셰'라고 폄하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엘리오트는 4월의 어떤 면을 보고 '잔인함'의 딱지를 붙인 것일까? 편안하게 가사(假死) 상태로 남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생물들을 새 생명의 싹을 키우라며 깨우기에 잔인하다는 게 정설이다. 엘리오트가 1910년 프랑스 유학 시절에 만나서 남다른 감정을 품었던 쟝 베르드날이란 의대생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때가 4월이라서 그랬다는 설도 있다. 흔히 '만물이 소생하는 봄'을 4월에 가져다 붙이곤 하는데, 새롭게 시작하는 삶 자체가 전혀 반갑지 않은 이들도 있고, 반대로 죽음이 더 가깝게 연상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 이 땅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4월의 날씨조차도 내게는 음산함이 먼저 연상되곤 한다.

4월 들어 쌀쌀한 날씨에 불평을 해대면, 어머니께서는 "4월 들어서도 날씨가 차면 얼마나 찬데. 4·19 때 날씨가 얼마나 찼는지… 마음도 미어지고 얼어붙은 상황에서 바람은 또 그렇게 차게 불어댔는지"라고 회상에 잠기며 말씀을 하시곤 했다. 그래서인지 4·19 때의 사진으로 내게 가장 선명하게 각인된 모습은 박봉우 시인의 '휴전선'에 묘사된 것처럼 잿빛 분위기에 '꼭 한번은 천둥 같은 화산'으로 일어날 듯이 '불안한 얼굴'을 한 군중의 모습들이었다. 흑백사진이지만 차고 건조한 바람에 얼굴에 든 홍조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며 그 모습들이 더욱 깊게 새겨지면서, 흡사 직접 겪은 양 바람 찬 초봄의 어느 날은 '오늘 날씨가 꼭 4·19 때 같구나'하는 혼자 생각이 우습게도 자연스레 일어나고, 그 군중들의 기운이 느껴지며 멀리서 함성까지 들려오는 착각에 빠진다.

쌓인 눈 아래에서 보내는 겨울이 오히려 따뜻했다고 엘리오트는 잔인한 4월의 비유 바로 다음에 썼다. 마른 뿌리나 구근이 풍족하지는 않지만 연명할 수 있게 해주었는데, 눈이고 구근이고 녹고 파헤쳐지며 안온함을 깨우는 시기가 4월이다. 새로운 창조를 향한 혼란과 고통이 수반된다. 봄을 기대한 안일함에, 찬 기온과 바람이 겨울이 그리 쉽게 물러가지 않을 것이라고 환기시킨다. 4월은 내게는 정서적으로 겨울에 더 가깝다. 그래서 달력의 월이 바뀐 5월, '계절의 여왕'은 다르리라고 기대하며 밖으로 나갔던 것이다.

'계절의 여왕'이란 5월의 브랜드는 어디에서 왔을까? 라일락, 아카시아 향이 풍기며 야외 활동에 알맞은 날씨가 어우러진 가장 아름다운 달이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굳이 '왕'도 아닌 '여왕'이라고 했을까? 여러 꽃들이 피어나는 시기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서구의 'May Queen(메이퀸·5월의 여왕)'이 약간 틀어져서 쓰인 표현이라는 게 아주 조심스럽게 내놓는 나의 가설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16세기 영국의 농촌 마을에서 봄맞이 축제를 5월 초에 벌이면서 여성과 남성 대표들을 선발하여 퍼레이드를 했는데, 그 여성 대표를 메이퀸이라고 했다. 산업혁명 이후 도시 거주 노동자들이 많아지고, 5월 1일 노동절 행사가 크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행사인 거리 퍼레이드 선두에 설 대표 여성을 뽑게 되었는데, 그를 역시 메이퀸이라고 불렀다. 이후에는 여성 교육기관, 특히 여자 대학교에서 지성과 아름다움을 갖춘 대표를 메이퀸이라고 하면서 선발하는 행사를 벌이곤 했다. 한국에서 메이퀸은 이상과열 현상이 벌어졌는데, 한때는 대한뉴스에서 매년 특정 대학교의 메이퀸 선발 소식을 전할 정도였다. 학생 간의 경쟁도 치열해져서 미용과 성형 및 스피치 등을 위해 과다한 투자를 하고, 독재 정권하의 사회 분위기와도 맞지 않는다는 비난이 일면서 흐지부지 70년대 말부터 없어졌다.

미인대회처럼 메이퀸 행사를 열기에 한국의 5월은 너무 뜨거웠다. 1980년 5월 광주의 날씨는 어땠을까? 당시 초등학생으로 광주 시내에 살았던 친구가 '90년대 초에 이런 얘기를 해줬다. 그의 아버지가 대학생이었던 동생들이 위험하다며, 그들을 포함한 전가족을 이끌고 담양으로 피난을 갔다. 광주의 소식을 들을까 광주에서 나오는 차들을 도로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 옆에서 놀고 있는데, 트럭 한 대가 와서 서더니 그의 아버지에게 광주로 들어갈 수 있냐고 물었다. 그의 아버지는 시내로 갈 수 없다고 위험하다며, 트럭 운전사를 다독이고 위로하며 돌려보냈다. 곧 이어 다른 트럭 한 대가 왔는데, ○○제과의 아이스크림 운반차였다. 그의 아버지가 어떤 길을 택하면 들어갈 수 있을 거라며 격려를 하고 기운을 불어넣어주며 광주로 트럭을 보냈다. 친구가 아버지에게 왜 전의 트럭은 막고, 이번 건 가라고 했냐 묻자 아버지가 대답했단다. "날도 이리 더운데 광주 사람들도 시원한 것 좀 먹어야재."

실제 1980년 5월 18일 주의 광주는 날씨도 뜨거웠다. 18일의 최고기온이 25.1도였고, 19일과 20일은 22도, 17.5도로 좀 내려 갔으나, 이후 21일부터 4일 동안은 25도를 훌쩍 넘어 28도까지 올라갔다. 정확한 기온 수치를 알기 전에 친구 아버지의 아이스크림 트럭 이야기를 들으며 그 뜨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는 그때 광주의 사진들 속에서 시민군과 시위대에게 음료수를 건네 주는 아주머니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분들이야말로 5월의 여왕, 메이퀸이었다. 아마도 그분들은 과장되고, 어울리지 않다며 손사래를 치며 거부하겠지만 말이다.

18일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5·18민주화운동 42주기 기념식이 열린 가운데 뮤지컬 배우 이지훈과 오월어머니 합창단이 합창을 하고 있다. 뉴시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