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초 겪었지만 밀항 도운 것 후회한적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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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고초 겪었지만 밀항 도운 것 후회한적 없었죠"
●25일 윤한봉 선생 15주기 추모식 거행||5·18 마지막 수배자 밀항 도운 '주역들' ||정찬대·최동현 항해·기관사 올해도 광주행||이들 도움으로 무역선 탑승 35일간 밀항 ||한인 인권운동·반독재민주화투쟁 전개해||뉴욕 등 6개 지부 활동가들도 광주 내한
  • 입력 : 2022. 06.26(일) 17:52
  • 도선인 기자

1981년 경남 마산에서 윤한봉 선생의 무역선 탑승을 도운 왼쪽부터 최동현, 정찬대 씨.

"형님, 민주화고 뭐고 사람 죽는다는데… 밀항 한번 도울 생각 없는가."

5·18 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 열사 15주기 추모식이 25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거행됐다. 올해도 지난 1981년 미국 밀항의 주역들이 다시 광주를 찾았다. 흰머리가 희끗희끗 난 정찬대(66) 씨와 최동현(68) 씨는 당시 경남 마산항에서 무역 화물선 기관사와 항해사로 만나 35일간 윤 선생의 밀항 탈출을 도왔다.

이들의 도움으로 미국 정치 망명에 성공한 윤 선생은 '마당집' 등의 여러 단체를 설립해 한인 인권운동과 반독재민주화투쟁을 전개했다. 이후 마당집 활동가들은 7개 지역에서 사무실을 두기도 했는데, 이들 연합이 현재 미국에서 가장 큰 한인단체 나카섹(미주한인봉사 교육단체협의회)의 전신이다.

특히 이번 15주기 추모식에 나카섹 본부, 뉴욕, 시카고, 버지니아, 필라델피아, 휴스턴, L.A 지부의 7명 활동가가 윤한봉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광주에 내한했다. 이들은 지난 일주일간 한국에 머물면서 전태일 거리, 명동성당, 판문점 등 민주화 역사를 이끈 상징적인 장소를 답사했다.

윤한봉 선생이 미국에서 설립한 한인단체 후신인 나카섹 활동가들. 왼쪽부터 필라델피아 우리센터의 케이트, 버지니아 함께센터의 마야, 뉴욕 민권센터의 윤지 킴, 나카섹 본부의 레이첼, 시카고 하나센터의 다나, 휴스턴 우리 훈토스의 태리.

다시 시간은 1981년으로. 윤 선생은 5·18민주화운동 배후자로 몰려 내란음모 혐의로 현상 수배돼 도피생활 중이었다. "윤한봉은 잡히면 반드시 죽는다." 서슬이 퍼런 독재정권에서 흉흉한 말이 나돌았다.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 윤 선생은 미국으로 정치 망명을 결심했다.

1981년 4월29일 밤. 경남 마산에서 항해사와 기관사로 일하고 있던 20대 청년 최동현 씨와 정찬대 씨는 3만톤 무역 화물선에 윤 선생을 몰래 숨기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윤 선생과 함께했던 재야인사들의 가족 또는 후배였고, 해양대학교를 졸업해 해운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던 만큼 '윤한봉 밀항선 프로젝트'의 적격자였다.

추모식에서 만난 정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고향이 광주인데, 5·18 때 한 것도 없고… 잡히면 사람이 죽는다는데, 다른 선원들이 모르게 해보자고 결심한 거죠."

2등 항해사 자격이었던 최씨는 일부러 3등 항해사로 자격을 낮춰 배에 탔다. 3등 항해사가 선박 내에서 격리된 의료시설 담당이었기 때문이다. 최씨는 의료실 및 의약품 관리를 전담하면서 다른 선원들 몰래 윤 선생을 숨길 수 있었다.

밀항 기간만 35일이 걸렸다. 윤 선생은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격리공간에서 비상식량으로 버텼다. 밀항 비밀은 이들 셋만 아는 진실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최씨와 정씨는 결국 나중에 밀항으로 도왔다는 사실이 발각돼 광주서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그도 그럴 것이 5·18 이후 반정권 사건만 터지면 정권은 윤 선생을 배후자로 타겟을 정했기 때문이다.

윤 선생의 거취가 발각되는 일은 시간문제였다. 5·18의 마지막 수배자가 미국에 있다니, 지금 생각해보니 계엄당국 입장에서 상상도 못 할 일이라 서슬이 퍼래질 만했다.

5·18 이후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이들을 구속까진 할 수 없었지만, 선원들에게 여권과 마찬가지인 선원수첩을 뺏기고 회사를 통해 출국금지를 당했다. 한동안 배를 못 탔지만, 이때의 밀항 프로젝트를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들이 매년 추모식 때마다 5·18민주묘지를 찾는 이유다.

정씨는 "윤 선생은 항상 표준적 삶을 사려 실천했던 분이었다. 자신에게 엄격했고 이상은 한없이 높았다"며 "이번 추모식 때 윤 선생이 만든 미국 단체에서 젊은 활동가들도 내한해 감회가 새롭다. 그의 모범적 정신이 끊기지 않는 것 같아 뿌듯하다"고 말했다.

이날 나카섹 활동가 레이첼 씨는 "윤 선생이 머물렀던 광주를 방문해 뜻 깊다"며 "광주에서 느낀 5·18 정신을 미국으로 돌아가 다시 알려야겠다는 책임감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도선인 기자 sunin.do@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