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벽대전의 책사 제갈공명 모시는 사당 '곡성 무후사'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문화 기획
적벽대전의 책사 제갈공명 모시는 사당 '곡성 무후사'
한중수교 30주년 기념 차이 나는 남도-중국 인연자원⑦ 무후사, 천재 지략가 제갈량 배향||제갈량, 유비의 삼고초려에 책사로 뛰어난 활약||조조 대군 격파하는 ‘적벽대전’, ‘출사표’ 유명||무후사, 제갈량 시호 충무후(忠武侯)에서 유래||무후사 세운 제갈씨 미추이사금때 신라로 망명||후손들 곡성 오산면에 사당 세우고 봄가을 제사||시성으로 추앙받는 두보의 시 ‘촉상(蜀相)’ 새겨
  • 입력 : 2022. 09.21(수) 14:38
  • 최도철 기자

중국 쓰촨성 청두는 촉나라의 재상 제갈량(諸葛亮)을 모신 사당 무후사를 찾는 참배객과 방문객들로 일 년 내내 붐빈다. 규모는 비록 적지만 중국인들에게 신과 같은 반열에 오른 제갈공명을 모시는 사당이 남도땅 곡성에도 있다. 한중수교 30주년 기념 남도-중국 인연자원 시리즈 일곱 번째로 곡성의 '무후사'를 싣는다.

촉나라 승상 제갈량(諸葛亮)을 모시는 사당 '무후사'(곡성군 오산면 청단리) 곡성군 제공

곡성 무후사(곡성군 오산면 청단리)는 우리에게 제갈공명으로 더 유명한 촉나라 승상 제갈량(諸葛亮)을 모시는 사당이다. 사당의 이름은 제갈량이 충무후(忠武侯)라는 시호를 받은 것에서 유래했다.

우리에게 소설 삼국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제갈량은 한고조 유방의 책사 장자방에 비견될 정도로 유명하다. 제갈량(181~234)의 자는 공명이요, 시호는 충무후로 서주 낭야국 양도현(현 산둥성 린이시 이난현)에서 제갈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후한 말 등현 융중(지금의 호북성 양번 서쪽)에 은거했는데,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천하를 보고 있다고 하여 와룡(臥龍)이라 불렀다. 건안 12년(207) 유비가 삼고초려하면서 도움을 청하자, '융중의 대책(隆中對)'을 알려주었다.

"북으로는 조조가 굳건하여 그와 더불어 싸울 수 없으며, 남으로는 손권이 강동을 3대째 지배하고 있어 백성들은 그에게 의지하고 현명한 사람은 이미 그의 사람이 되었으니 그를 도울 수는 있어도 도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형주의 유표와 익주의 유장은 백성을 보살피는 역량이 부족하고 서툴러 그들의 안위를 지켜주지 못할 것이 분명하오니 먼저 형주와 익주를 취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십시오. 그 후 동쪽으로는 손권과 연합하여 북쪽의 조조에 대항하는 자세를 취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 유명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이다. 그는 더 나아가 국력을 키운 다음 위나라를 공격해 천하 통일의 과업을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유비의 책사로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삼국지에서 제갈량의 존재감이 가장 잘 드러난 장면이 '적벽대전'이다. 제갈량은 유비의 책사로서 홀로 강동으로 가서 손권과의 동맹을 성공시켜 적벽에서 조조 100만 대군을 무너뜨렸다. 적재적소에 장수들을 대기시켜 조조군을 대파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의 손권과 주유까지 농락하며 형주를 장악했던 것이다.

이후 익주를 점령한 후 유비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 촉을 건립(221)하자 그는 승상의 지위에 올랐다. 유비가 죽고 유선이 즉위하자, 제갈량은 유비의 염원이었던 천하통일을 위해 위나라를 정벌하고자 천하의 명문 '출사표'를 올린다.

제갈량 출사표

"…… 원컨대 폐하께옵서는 신에게 흉악무도한 역적을 토벌하고 한실을 부흥시킬 일을 명하시고, 만일 이루지 못하거든 신의 죄를 엄히 다스리시어 선황제 폐하의 영전에 고하시옵소서. 또한 한실을 바로 일으키는 데 충언이 올라오지 아니하거든 곽유지, 비의, 동윤의 허물을 책망하시어 그 태만함을 온 천하에 드러내시옵소서. 폐하께옵서도 마땅히 스스로 헤아리시어 옳고 바른 방도를 취하시고, 신하들의 바른 말을 잘 살펴 들으시어 선황제 폐하께옵서 남기신 뜻을 좇으시옵소서. 신이 받은 은혜에 감격을 이기지 못하옵나이다. 이제 멀리 떠나는 자리에서 표문을 올리니 눈물이 앞을 가려 무슨 말씀을 아뢰어야 할지 모르겠나이다."

하지만 4차례에 걸친 북벌은 모두 실패로 끝난다. 이에 제갈량은 다시 3년간 국력을 키워 5차 북벌을 단행했다. 제갈량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오장원에 진을 치고 위나라와 대치했다. 그러나 천운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천하 통일의 뜻을 뒤로한 채 오장원에서 54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이후 촉은 더 이상 북벌을 시도하지 않았고 끝내 위나라에 멸망당했다.

제갈씨는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왔을까? 제갈씨는 원래 낭야(瑯琊)의 제현(諸縣)에 거주하던 갈씨였다. 제현에 살아 제갈씨로 불렸으며, 시조는 제갈량의 아버지 제갈규(諸葛珪)이다. 한나라가 망하자 5대손인 제갈충이 미추이사금 때 신라로 망명했고, 그의 21대손 제갈공순이 흥덕왕 때 귀화했다. 그 후 고려 현종 때 제갈홍과 제갈형 두 형제가 제갈씨를 제씨와 갈씨로 한 자씩 나누어 성씨로 삼았다가, 대한제국 때 중추원과 장례원에 성씨를 합쳐줄 것을 상청하여 제씨와 갈씨 일부가 다시 제갈씨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곡성 무후사 제갈량 영정

곡성 무후사에는 이백과 함께 중국역사상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는 두보의 시 '촉상(蜀相)'이 새겨져 있다. 두보는 안록산의 난으로 피난을 가다가 제갈량의 사당을 찾아 그의 충절과 의리를 기리는 시를 남겼다고 한다.

시는 두시언해를 요즘 말로 고쳐 아래와 같이 읽힌다.

"승상의 사당을 어디가 찾으리오 (丞相祠堂何處尋)/ 금관성 밖 잣나무 우거진 곳이로다 (錦官城外柏森森)/ 섬돌에 비친 푸른 풀은 절로 봄 빛이 되었고 (映階碧草自春色)/ 잎 사이 꾀꼬리는 속절없이 고운 소리로다 (隔葉黃鸝空好音)/ 세 번 돌아봄을 어지러이 함은 천하를 위한 헤아림이요 (三顧頻煩天下計)/ 두 조를 거친 것은 늙은 신하의 마음이라 (兩朝開濟老臣心)/ 군사를 내어 가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 (出師未捷身先死)/ 길이 영웅으로 하여금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게 하도다 (長使英雄淚滿襟)"

원래 우리나라의 제갈량 사당은 선조 36년(1603) 평안도 영유현(평원군)에 세워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하던 선조가 영유현에 오래 머무르면서 여기에 제갈량의 사당을 세우라고 명했던 것에서 연유한다.

사당을 세운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첫 번째는 임란 중에 우리를 도와준 명에 대한 보답으로 세웠다는 것이다. 이후로 전국 각지에 제갈량을 받드는 무후사와 관우를 받드는 관왕묘가 세워졌다.

두 번째는 선조가 피난 중 영유현에 머물면서 주민들이 바친 음식을 받고 그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세웠다는 설이다. 영유현 서쪽의 산이 와룡산(臥龍山)인데, 그 이름이 제갈량의 별호인 와룡과 같아서 사당을 세워 영유현을 높여 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숙종 21년(1695)에는 송나라 때의 충신 악비를 추가 배향했다. 이후 영조 26년(1750)에 송나라의 문천상을 추가해 삼충사(三忠祠)라 고쳤다. 이어 순조 12년(1812)에 제갈인문이 삼충사에서 제갈량의 영정을 모사해와 관왕묘에 함께 모셨다.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러 제갈하백이 관왕묘에 모셔진 제갈량을 따로 모실 수 있도록 상소를 올려 허가를 받았다. 이에 1903년 곡성군 오산면 청단리에 무후사를 세우고 매년 봄가을에 제를 올리고 있다. '곡성군지'에는 '무후사는 제갈무후의 영정을 모셔둔 사당으로 오산면 청단리에 있으며 그 자손인 제갈하백이 계묘년 여름에 건립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갈량의 후손 제갈하백은 일제 강점기에 활동했던 곡성 사람으로, 노사 기정진의 문인이다. 그는 무후사 건립을 통해 가문을 일으켜 세우고,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곡성 무후사 두보 시 촉상

곡성 무후사 부의당(강당)

최도철 기자 docheol.choi@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