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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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대
"42년만입니다."
노병하 사회부장
  • 입력 : 2022. 09.26(월) 17:43
  • 노병하 기자
노병하 부장
처음 소식을 접했을때, 잠시 멍했다. 그러더니 금새 눈이 흐려졌다.

옛 광주교도소 무연고자 묘에 매장돼 있던 유골 중 1구가 5·18 행방불명자의 DNA와 일치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기억은 2017년 9월로 거슬러 갔다. 그때 사회부는 하나의 문서를 두고 빙둘러 앉아 긴장하고 있었다. 문서의 이름은 '광주사태시 소요체포자 치료현황'. 1980년 5월 광주교도소로 끌려간 시위대, 그 중에서도 중상자들을 어떻게 치료했는지에 대한 문서였다. 처음엔 문서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치료가 시작된 21일에만 143명이 기록됐으며, 이들은 모두 '중상자' 또는 '응급환자'로 분류됐다. 하지만 정작 치료에 쓰인 의약품은 해열진통제, 과산화수소수 소독약 등 기초약품들 뿐이었다. 특히 일부 심각한 중상자들은 죽기 직전의 상태였지만 방치됐다. 그런 환자들은 후에 행적마저 묘연했다.

중상자들이 방치되고 또 사라진 것이다. 사회부는 당시 광주교도소에 있던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어렵사리 당시 의무과 소속이었던 민경덕 전 교도관을 만났다.

민 교도관은 "교도소에 중상자를 치료할 만한 시설이나 약품이 없었다. 의료인도 2명 뿐이었다"면서 "첫날 치료를 제대로 못하고 다음날 아침에 가보니 어떤 사람은 누운 채로 대소변을 볼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다음날에는 그 환자를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다른 증언도 찾아냈다. 증언자에 따르면 계엄군은 체포자들을 한 명씩 조사실로 불러내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고 허리는 세운 채 고개는 숙이도록 했다. 발가락이라도 움직이면 개머리판이나 곤봉으로 찍어 눌렀다. 심지어 살인 행위도 벌어졌다는 증언도 있었다.

취재할 때마다 분노가 치밀었다. 여러 번의 교차 체크 끝에 사회부는 암매장 장소 여러곳을 특정했다. 기사의 반향은 컸다. 광주시와 오월재단은 광주교도소의 땅을 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유골은 발견되지 않았다.

서글펐다. 기사가 틀려서가 아니었다. 도대체 어디에 꽁꽁 숨겨 놨길래, 37년이 지나도 발견되지 않는 것인가. 행불자에 대한 안타까움이 너무 컸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그리고 지난 25일, 그토록 애타게 찾았던 이가 42년만에 세상에 모습을 보였다는 소식을 접했다. 갑작스런 소식에 눈이 흐려졌다.

그 눈으로 뉴스를 보며 오랜 세월 지나 다시 하늘을 맞이한 그 전라도 선배에게 나즈막히 인사를 드렸다. "어서오세요. 42년만 입니다. 뵙게 돼 정말 다행입니다."





노병하 기자 bhno@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