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사람들의 외침-신안 암태도 농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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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섬사람들의 외침-신안 암태도 농민항쟁
박간재 전남취재부장
  • 입력 : 2020. 12.07(월) 12:25
  • 박간재 기자
박간재 전남취재부장
"감옥에 들어 앉아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일본놈들 하고 싸울 사람은 누구니 누구니 해도 그놈들 한테 짓밟히고 있는 농민들 밖에 없더라 이겁니다. 지금 우리가 직접 왜놈들 하고 싸우는 것은 아니지만 한발 더 내처 생각하면 그대로 독립운동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소작쟁의 만이 아니라 독립운동이 되는 거니까 그렇게들 알고 마음 단단히 먹읍시다(중략). 암태도 소작쟁의는 여러분들이 신념을 가지고 투쟁하는 한 절대로 승리할 것입니다. 승리를 위해 만세삼창 하겠습니다. 만세!, 만세!, 만세!. 소작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불 속에라도 뛰어들겠다는 투지 뿐이었다."(송기숙 대하소설 '암태도' 중·1979년 창작과 비평에 연재)

신안 암태도. 30년 전 소설 속에서 처음 만났다. 대학 다닐 당시 송기숙 교수는 전남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송 교수를 본 건 교재를 옆구리에 끼고 인문대 앞을 걸어가던 모습이 전부다. 비장한 눈빛에 무표정 하면서도 알수없는 분노가 이글거리는 듯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삶은 고난의 길이었다. 소설가, 교육자로 성공한 그가 '실천적 지성'으로 5·18 당시 내란죄로 몰리며 복역했다. 지하써클에서 활동하던 후배가 "형! 송기숙 교수의 소설 '암태도'를 꼭 읽어보세요"라는 말을 듣고 책을 읽은 뒤에야 알았다. 그 분의 표정이 왜 그렇게 비장한 모습이었는지를.

70~80년대 대학생 필독서인 소설 '암태도' 덕택에 '잊혀진 역사'로 사라질 뻔한 암태도 소작쟁의가 세상에 알려졌다.

며칠 전 암태도를 다녀왔다. 소설 속 만재와 연엽의 사랑이 이뤄진 곳, 가는 길은 설레임이었다.

압해대교를 지나고 나니 천사대교가 반긴다. '상전벽해'다. 압해도~암태도가 천사대교로, 암태~자은, 암태~팔금~안좌도가 다리로 연결됐다. 암태도 기동 삼거리 애기동백 파마머리 벽화, 자은도 무한의 다리, 안좌도 김환기 화백 생가, 반월·박지도 퍼플섬 등은 신안 최고의 '핫 플레이스'가 됐다.

볼거리 많은 신안군은 불과 100년도 채 안된 시기엔 차별과 가난, 분노의 땅이었다.

암태도(1923.09~1924.08)를 시작으로 지도(1924.10~1925.05), 자은도(1925.11~1926.01), 도초도(1925.09~10), 매화도(1927.08~12), 하의도(1928.02~04) 등 6개섬에서 소작쟁의 농민항쟁의 횃불이 타 올랐다. 농민들이 일제와 지주들의 소작료 착취와 탄압에 의연하게 맞섰다.

당시 일제는 토지조사 사업과 산미증식 계획으로 저미가(低米價) 정책을 폈다. 수익이 줄자 지주들은 소작료를 8할(80%)로 올리며 가혹한 수취를 자행했다. 서태석의 주도로 암태소작인회를 결성한 농민들은 지주 문재철(1883~1955), 나카시마 세이타로, 천후빈 등에게 소작료를 논 4할, 밭 3할로 내려줄 것을 요구했다. 의견이 묵살되자 농민들은 소작료 불납동맹을 벌였고 지주 공덕비를 부수는 등 분쟁은 악화돼 갔다. 소작인 습격과 구속, 지주 편만 드는 일본 경찰에 격분한 서태석 등 농민 400여 명은 배를 타고 목포 지방법원 앞에서 농성과 아사동맹(단식투쟁)을 감행했다. 마침내 소작료를 4할로 내리겠다는 약정을 받아냈다. 조선시대 소작료가 5할이었으니 암태도 농민들이 거둔 승전보였다. "…뼈가 닳게 일하여도 살수 없거늘, 놀고먹는 지주들은 누구의 덕인가…봄동산에 좋은꽃 지주의 물건 가을밤에 밝은 달도 우리는 싫다." 승리하고 돌아오는 뱃머리에서 그들은 '소작인의 노래'를 목놓아 불렀다.

1923년 '암태도 소작쟁의'는 전국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민중 운동사의 큰 획을 그었으며 향후 국내 민중운동의 기폭제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소작쟁의 선봉에 섰던 서태석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항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했다는 그는 출소후 고문 후유증과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다 1943년 압해도 논에서 벼포기를 움켜쥔 채 생을 마감했다. 지난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고 2008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안장됐다.

그의 헌신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을까. 그의 며느리는 광주학생독립운동 도화선이 됐던 나주역 댕기머리 사건의 당사자인 박기옥(전남여고)이니 말이다. 신안과 광주 나주는 한 몸이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지난 1997년 후손들은 뜻을 모아 암태도에 6.74m 높이의 '암태도소작인항쟁기념탑'을 세웠다. 뒷면에는 쟁의 참여자 43명의 이름과 송기숙 교수의 글을 새겼다. 결코 그날의 뜻을 잊지 말자는 신안 군민들의 바램이자 염원을 담고 있다.

암태도와 자은도 등 신안 땅은 물론 전북 고창, 충남일대까지 200만 평 이상을 소유했던 지주 문재철은 어떻게 됐을까. 소작쟁의가 끝난 5년 뒤 반전이 일어났다. 문재철은 1929년 농민 활동가 박복영을 통해 은밀히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했다. 1941년 목포에 학교를 세웠다. 그의 성 '문(文)'과 고향 암태도의 '태(泰)'자를 딴 문태학원(현 목포 문태고등학교)이다. 1993년 민족교육운동에 앞장섰다는 점이 인정돼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지난 7월. 신안군에 의미있는 사업회가 출범했다. '신안군농민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오병균)'다. 일제강점기 농민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 하고 명예회복에 나서겠다는 취지다. 학술조사 독립 유공자를 발굴하고 농민운동 참여자들의 독립 유공자 서훈을 돕는다. 농민운동 후손찾기에도 힘을 보탠다. 신안군 농민운동이 '강진군 소작쟁의단 사건' '완도 소안도 살자회 사건'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어 이에 대한 시정에 나선다. 빈 터로 남아 있는 서태석 생가 복원, 관련 유적 정비, 신안군 전체 항일농민운동을 기념하는 시설을 세워 올곧은 역사를 정립하겠다는 각오다. 잘못된 역사는 바로잡아야 한다. 신안군농민운동기념사업회의 출범이 반가운 이유다.

박간재 기자 kanjae.par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