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 목우암(牧牛庵)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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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 목우암(牧牛庵) 가는 길
  • 입력 : 2021. 01.28(목) 11:01
  • 편집에디터

무안 승달산 목우암 극락보전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 이윤선촬영

원명이 꿈을 꾸었다. 백운산 총지사에서 소 한 마리가 내려오더니 어떤 암자에 이르렀다. 뒤따랐으나 소는 오간 곳 없고 계곡 바위 위에 소 발자국만 보였다. 그 자리에 풀을 엮어 암자를 만들었다. 목우암(牧牛庵)이라는 이름이 생긴 내력이다. 목우(牧牛)는 소를 먹여 기르거나 혹은 먹여 기르는 소라는 말이다. 풀을 엮어 만들었으니 초당(草堂)이요 백운숲 정기 받았으니 초의(草衣)일 것이다. 총지사(摠持寺)는 승달산 지맥 백운산(白雲山)에다가 정명(淨明)이 창건한 절이다. 때는 신라 성덕왕(702~737년), 서역 금지국(金地國) 사람이니 지금으로 보면 중앙아시아 어디쯤 금(gold)과 관련된 나라의 승려였던 모양이다. 인근의 법천사도 비슷한 시기에 정명이 지었다. 고려 인종 때(1131년) 원나라 임천사(臨川寺) 승려 원명(圓明)이 중창한다. 총지사 승려의 수가 800여명, 아홉 개의 암자, 200여동의 승방이 있었다 한다. 폐사(廢寺)와 관련해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충청도 석성현감을 지낸 임면수가 총지사 뒤쪽에 아버지의 묘를 썼던가 보더라. 이에 불만을 품은 승려들이 묘에 참나무 말뚝을 박아버렸더니 임면수는 절에 불을 질러버렸다. 1810년(순조 10년)의 일이다. 승려 중 일부가 분신(焚身)을 하거나 인근 법천사로 피신한다. 불교 세력과 유교 기득권 세력의 갈등을 상징하는 설화 한 토막 같다. 공교롭게도 1896년 법천사마저 화재로 폐사된다. 이때 모시던 목조 삼존불상을 지금의 목우암으로 옮겼을 것이라 한다.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지만 어쩌면 비로자나불이 소 먹여 키우는 초암으로 자리를 옮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무안 승달산 목우암(牧牛庵)과 삼존불

목우암 오르는 길, 여전히 호젓했다. 예년에 없던 폭설 후라서인지 겨울비 내려 소슬할 뿐이었다. 법천사와 목우암 갈림길에는 변함없이 석장승이 맞이한다. 제 딴에는 눈을 부라린다고 치켜떴는데 왠지 이웃집 사람처럼 서글서글하다. 총지사 오르는 마을 입구에도 석장승 2기가 있다. 나주 운흥사와 불회사의 석장승 등 해학적인 조선후기 양식중 하나다. 할 얘기가 많으므로 따로 지면을 할애하기로 한다. 때마침 김희태 전남도문화재전문위원 등 지인들이 의기투합을 해 요모조모를 따져봤다. 전문가들이 분석한 자료의 일부를 여기 인용해둔다. 극락보전에는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이 모셔져있다.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약칭 목우암 삼존불이라 한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72호, 목조 삼본불이다. 협시보살은 각각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다. 복장유물 일부는 도난당했다. 다행해 본존불 바닥의 조성내용이 남았다. 각종 문헌자료들도 남았다. 전적(묘법연화경)과 다라니 등이다. 묵서의 내용으로 보면 1614년(조선 광해군 6년)에 제작되었다. 수화승 각심, 화승 응원, 고한, 덕현, 경륜, 인균 등의 작가 이름이 보인다. 화승 응원(應元)이 만든 목조불상이 국가보물로 지정된 사례가 여러 건 있는 것으로 봐서 이 불상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된다. 극락보전 뒤쪽의 축성각 목조 아미타여래좌상도 1666년 제작되었다. 극락보전 안에는 왕실의 위패가 모셔져있고 조상기문에는 왕에 대한 발원이 적혀있다. 뒤편 법당을 축성각이라 지은 이유다. 금성 주지스님이나 무안군 이정운 의원 등에 의하면 목우암의 풍수가 천하명당이라 한다. 풍설이기는 했지만 현재의 전남도청이 무안 남악에 자리를 잡은 것도 승달산(불교)과 목포의 유달산(유교), 영암의 선황산(도교)의 기운을 모은 꼭지점이라지 않았는가. 실제 목우암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안온하고 아름답다. 혹시 아는가. 승달산에 있던 아홉 개의 암자와 200여개의 승방이 십우도의 소 키우는 휴게공간으로 되살아날지.

미황사가 검은소라면 목우암은 흰소일까?

소가 점지하여 지은 절 이야기는 목우암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황사의 소 이야기가 유명하다. 해남 사자(Lion)포구에 배 한척이 들어오려 했다. 마을사람들이 가까이 가기만 하면 멀어지곤 했다. 달마산에서 정진 중이던 의조화상이 향도 100여명과 함께 물가에 나가 기도를 올렸다. 비로소 배가 포구에 닿았다. 인도에서 온 배라고 했다. 배 안에는 검은돌과 금으로 된 함이 있었다. 검은돌에서는 검은소가 나왔다. 금함에는 불상과 경전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날 밤 의조화상에게 남방 우전국의 왕이 현몽하였다. 검은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세우라 하였다. 다음날 소 앞세웠더니 지금의 자리에 멈춰 서는 것 아닌가. 서쪽 향해 아름다운 소리로 세 번 울고 드러누웠다 해서 미황사(美黃寺)라 부르게 되었다. 목우암의 소는 총지사를 매개삼아 서역 금지국으로부터 왔고 미황사의 소는 남방 인도에서 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중앙아시아 및 남방 인도와 교류가 활발했던 모양이다. 미황사의 소가 왜 흑우(黑牛)인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깨달음의 비유는 대개 흰소(白牛)로 표현한다. 이것을 딱히 남방과 북방의 지리적 출처로 나눌 수야 없겠지만 근원한 장소와 인물들이 상관했던 소를 배경으로 삼았다는 점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미황사의 소가 검은소이니 목우암의 소를 흰소라고 해볼까? 소(牧牛)의 비유는 수선사(修禪社, 보조국사비명 참고)의 선(禪)사상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창시자인 지눌 스스로 목우자(牧牛子)라 하였다. 하지만 부처님의 이름 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arta)의 고타마가 우(牛), 우왕(牛王), 수우(水牛)라는 산스크리티어 'go'와 어미 'tama'가 붙어 최상급의 용어가 된 것을 보면 불교의 발생부터 소와 관련되어있는 것 같다.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주목할 때는 열 가지의 단계라는 의미로 십우도라 한다. 불교 초기 경전에는 탁발과 목동의 비유가 많이 나온다. '증일아함경', '마혈천자품', '유교경', '법화경', '비유품' 등이 그것이다. '숫타니파타'에 '소치는 사람', '무소의 뿔', '밭가는 사람' 등의 비유가 있다.

남도인문학팁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심우도(尋牛圖)는 보명선사의 목우도와 곽암의 십우도가 대표적이다. 곽암선사의 십우도는 심우(尋牛, 소를 찾아 나서다)에서 입전수수(立廛垂手, 저자거리로 들어감)까지 지난 칼럼에서 소개하였으니 생략한다. 보명선사의 목우도는 미목(未牧, 아직 기르지 못하다), 초조(初調, 처음으로 다스리다), 수제(受制, 제재를 받아들이다), 회수(廻首, 머리를 돌리다), 순복(馴伏, 길이 들다), 무애(無碍, 걸림이 없어지다), 임운(任運, 흐르는 대로 맡기다), 상망(相忘, 소와 사람 둘 다 잊다), 독조(獨照, 홀로 비춰보다), 쌍민(雙泯, 함께 소멸하다)이다. 나 같은 땔나무꾼의 눈으로 보면 보명선사의 목우도가 심중에 닿는다. 배냇소 받아 코뚜레 뚫고 멍에 얹어 논갈이 밭갈이 하다가 남김없이 육보시까지 하는 생애의 묘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소처럼 우직한 삶이 깨달음인지도 모르겠다. 외뿔소와 관련하여 잘 알려진 숫타니파타(經集) 사품(蛇品)의 경구는 대개 혼탁하고 미혹하는 세상을 갈망하지 말고 욕망과 집착을 버리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나는 뱀이 허물을 벗듯 재생과 거듭남의 주문이라 생각하고 즐겨 쓴다. 나약한 우리에게 늘 힘을 주어서일 것이다. 흰소의 해 초입 목우암 오르며 담담한 지혜를 얻는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목우암 현판, 이윤선촬영

무안 승달산 목우암 삼존불 안내판

무안 승달산 목우암 안내판

무안 승달산 목우암 오르는 길

무안 승달산 목우암 전경, 이윤선촬영

무안 승달산 목우암 축성강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

무안승달산 목우암 극락보전 내 왕실 위패(가운데부분은 유실), 이윤선촬영

축성각, 영산전 전경, 이윤선촬영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