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이야기>화순 독상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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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이돈삼의 마을이야기>화순 독상마을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 입력 : 2021. 03.11(목) 11:03
  • 편집에디터

오지호기념관과 독상마을-면소재지 들녘에서 본 풍경이다.

화순 동복으로 가는 길, 날씨가 좋다. 겨우내 앙상하던 나뭇가지가 봄물을 가득 머금었다. 새순이 돋아나는 나무도 보인다. 다사로운 봄햇살에 봄꽃도 여기저기서 벙글어진다. 꽃이 만든 그림자가 짙고 깊다. 빛깔도 저마다 다르다. 마치 오지호(1905∼1982)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오지호는 기존의 풍경화에다 빛과 그림자를 더했다. 나아가 빛과 그림자를 그림의 중심으로 이끌었다. 여수 출신의 김홍식(1897∼1966), 신안 출신 김환기(1913∼1974)와 함께 한국 서양화단의 1세대로 통한다.

'회화는 광(光)의 예술이다. 태양에서 난(生) 예술이다. 회화는 태양과 생명과의 관계요, 태양과 생명과의 융합이다. 그것은 광을 통하여 온 생명이요, 광에 의하여 약동하는 생명의 자태다. …(중간생략)… 회화는 환희의 예술이다. 환희는 회화의 본질이다.'

생전 오지호가 신문에 쓴 '순수 회화론'의 일부분이다. 그림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가장 좋은 그림이고,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그림의 조건이다.

오지호의 작품 '남향집' '시골' '설경' '항구' '바다풍경' 등도 그랬다. 작품에 다양한 빛이 스미고,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다. 오지호의 그림이 서늘한 것 같으면서도 따뜻한 인상을 풍기는 이유다.

오지호는 1905년 성탄 전야인 12월 24일 화순군 동복면 독상리에서 났다. 본명은 점수, 호는 모후산 자락에 사는 사람 '모후산인'이다. 보성군수를 지낸 아버지 오재영은 고종의 죽음을 보며 자결을 했다. 그의 아버지는 학식과 덕망이 높았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 오지호가 창씨개명을 거부한 것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오지호는 동복보통학교에 다닐 때부터 미술로 칭찬을 자주 들었다. 서당을 다니며 한문도 익혔다. 그림에 눈을 뜬 것은 서울 휘문고보에 편입해 나혜석의 유화를 접한 뒤부터다.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다.

1931년 일본 도쿄(東京)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오지호는 녹향회에 참여했다. 김주경 등이 만든 녹향회는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미술대전에 반대한 민족주의 성향의 미술단체였다.

1935년부터 10년 동안은 개성 송도고보 교사로 일했다. '점수'에서 '지호(之湖)'로 이름을 바꾼 것도 이때였다. 그의 그림 세계도 밝고 맑은 색채와 경쾌한 붓놀림의 인상주의 화법으로 변해갔다. 1938년 김주경과 함께 2인 그림집도 냈다. 한국 최초의 원색 그림 모음집이었다.

광복과 함께 찾아온 좌익과 우익의 대립은 화단에도 선택을 강요했다. 오지호는 태 자리와 이웃하고 있는 광주로 내려왔다. 때마침 조선대학교에 미술학과가 설치됐다. 조선대 교수로 제자들을 가르치며, 지산동 초가에서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광주 포로수용소에 갇혔다가 무죄로 풀려나기도 했다.

1960년대 들어 그의 그림세계는 한층 더 깊어졌다. 한편으로는 경지에 오르며 단순화됐다. 색채는 청색계열이 자주 등장하면서 강렬한 인상을 풍겼다. 호남은 물론 우리나라 서양화단의 개척자로 살았다.

오지호는 미술이론가로도 활동했다. 국어교육에 대한 관심도 많았다. 한문 폐지론에 맞서 국·한문 혼용을 주장했다. 1982년 12월 25일 성탄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태어난 독상마을에 생가가 있다. 1700년대 중반까지 동복향교가 있던 자리다. 생가는 1800년대에 지어졌다. ㅡ자형으로 당시 일반적인 민가와 비슷하게 생겼다. 예전의 초가지붕이 기와로 바뀐 것을 빼고는, 오지호가 나고 자란 그 시절 그대로다. 창밖으로 무등산이 보이는 사랑채에 그림방도 보존돼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화실이다. 크기는 6평 남짓이다. 생가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묘지는 생가에서 가까운 안성리, 신성마을 뒷산에 있다. 군인들의 유격 훈련장이 한눈에 보이는, 햇살 좋은 언덕배기이다.

마을에 아담한 오지호기념관도 있다. 오지호 탄생 100주년에 맞춰 문을 연 기념관이다. 그의 작품 '항구' '남향집' '처의 상' '시골소녀' 등을 여기서 만난다.

'남향집'은 오지호의 그림 성향이 잘 나타난 대표작이다. 나무의 그림자와 돌 축대의 응달이 청색과 보라색으로 처리돼 있다. 초가는 그가 해방 전까지 살았던 개성의 집이다. 초가를 과감히 좌우로 절단시키고, 원색의 터치를 태양의 세기에 따라 적절히 구사했다. 전형적인 인상주의 수법이다.

'처의 상'은 젊은 아내를 모델로, 순박하면서도 청순한 시골 색시의 모습을 표현했다. 붉은 색조의 배경이 인물을 효과적으로 살려준다.

아들 오승우와 오승윤, 손자 오병욱, 운보 김기창, 의제 허백련 등의 그림과 조각작품도 만난다.

오지호가 나고 자란 마을도 정감 있다. 동쪽으로 연화봉이, 남북으로는 금계산과 학교산이 자리한다. 서쪽으로는 동복천이 남북으로 길게 흐르고 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을 하고 있다.

마을을 가로질러 놓인 도로의 이름도 오지호로, 김삿갓로이다. '오지호로'는 동복면 소재지를 가운데에 두고 묘치와 유천리를 연결하고 있다. '김삿갓로'는 사평에서 동복을 잇고 있다. 삿갓 김병연이 긴 방랑생활의 마침표를 찍은 곳이 지척의 구암이다. 구암마을 앞에 연둔리 숲정이도 있다. 오지호와 함께 김삿갓의 흔적이 곳곳에 배어있는 마을이다.

오지호 생가 앞에 있는 정려도 눈길을 끈다.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는 석류문(錫類門)과 흙담에서 경외감이 먼저 든다. 오한추·효술 부자의 정려다. 1893년 고종이 내렸다고 적혀있다.

석등(石燈)도 있다. 절집이나 묘 앞에 있는 석등과 달리, 48개의 구멍이 파인 자연석이다. 오대승(1193~1265)이 돌구멍에 기름을 붓고 밤마다 불을 밝혀 나라의 평안과 자손의 번창을 빌었다고 전한다.

옛 동복현의 흔적을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동복초등학교와 동복면사무소가 중심이다. 면사무소는 동복현의 내아, 일제강점 땐 동복군청이 있던 자리다. 초등학교 본관 앞은 동복현의 객사였다. 일제강점기에 학교로 바뀌었다. 정문 자리는 동복현의 응취루가 있던 자리다.

동복장터에 3·1만세운동 기념탑도 있다. 독상리와 연월리를 잇는 다리를 놓아 준 김해운여사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다리 이름도 '해운교'로 불린다. 독상리에서 1756년에 옮겨간 동복향교는 연월리 마을 뒷산에 있다.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독상마을 안길-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동복향교-연월마을 뒷산에 자리하고 있다.

동복향교-연월마을 뒷산에 자리하고 있다.

동복향교-연월마을 뒷산에 자리하고 있다.

옛 동복장터에 세워진 삼일만세탑과 김해운여사가교기념비

오씨정려-오한추·효술 부자의 정려다.

오씨정려-오한추·효술 부자의 정려다.

오씨정려-오한추·효술 부자의 정려다.

오지호 그림-남향집, 1939, 유화, 80×65㎝

오지호 그림-남향집, 1939, 유화, 80×65㎝

오지호 그림-처의 상, 1936, 유화, 73×53㎝

오지호 묘-생가에서 멀지않는 안성리 신성마을 뒷산에 있다.

오지호기념관과 독상마을-면소재지 들녘에서 본 풍경이다.

오지호기념관과 독상마을-면소재지 들녘에서 본 풍경이다.

오지호기념관-기념관 앞에 설치된 조형물이다 .

오지호기념관-기념관 앞에 설치된 조형물이다 .

오지호기념관-내부 1층, 오지호의 생애와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오지호기념관-내부 지하, 기념관 소장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

오지호기념관-내부 지하, 기념관 소장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

오지호기념관-오지호의 작품과 미술관 소장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오지호기념관-오지호의 작품과 미술관 소장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오지호기념관-오지호의 작품과 미술관 소장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오지호생가-사랑채. 오지호의 화실이 들어있는 건물이다.

오지호생가-사랑채. 오지호의 화실이 들어있는 건물이다.

오지호생가-안채. 예전의 초가지붕이 기와로 바뀐 것을 빼고는, 오지호가 나고 자란 그 시절 그대로다.

오지호생가-안채. 예전의 초가지붕이 기와로 바뀐 것을 빼고는, 오지호가 나고 자란 그 시절 그대로다.

오지호생가-안채와 사랑채.

유격훈련장-오지호 묘에서 보이는 풍경이다 .

유격훈련장-오지호 묘에서 보이는 풍경이다 .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