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윤회매(輪回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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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윤회매(輪回梅)
  • 입력 : 2021. 04.29(목) 14:50
  • 편집에디터

윤회매 문화관 다음 김창덕 제공

윤회매 문학관 다음 김창덕 제공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 동안 붉은 꽃은 없는 것일까. 권력 무상을 빗댄 언설이지만 성한 것이 반드시 쇠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낙엽 진 나무들이 봄에 싹을 틔우고 씨 속에 담겨있던 기운들이 언 땅을 비집고 나와 종국에는 거대한 나무가 된다. 쇠한 것이 다시 성하는 것인지. 이전 것이 사라지고 새로 생성되는 것인지. 본디의 것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을 가역(可逆)이라 하는데, 순환하는 이 생성은 가역적인 것인가 불가역적인 것인가? 불교에서는 윤회를 말한다. 수레바퀴처럼 삼계육도의 생사세계를 그치지 않고 돈다는 뜻이다. 기독교에서는 거듭남과 부활을 말한다. 전혀 다른 개념 같지만 맥락은 유사하다. 내가 십여 년 차를 만들면서 정했던 이름이 '아직은 보내지 않은 봄'이다. 나 마실 분량만 만드니 무슨 브랜드까지야 되겠는가만, 곡우 전 참새의 혀 같은 어린잎을 따 일순에 그 기운을 담아낸다는 의미로 사용해왔다. 봄을 가둬두는 셈이랄까. 구증구포(九蒸九曝), 온전한 봄은 작설(雀舌)잎을 아홉 번 덖어야 그 말려 웅크린 세계로 포섭된다. 이를 뜨거운 물에 풀어놓으면 오므렸던 봄이 다시 풀려나온다. 향이 그렇고 감칠맛이 그러하며 품은 기운이 그러하다. 봄이 갔다가 다시 온 것인가. 새로 생성된 것인가. 차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이덕무가 창안한 매화 또한 그러하다.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했던 이덕무

청장관 이덕무(1741~1793), 개성이 뚜렷하고 박학다식했다. 서출이라 크게 등용되지 못했다. 박제가, 이서구, 유득공과 함께 사가(四家)라 부른다. 큰 벼슬은 하지 못했으나 일가를 이루었다. 아들 이광규가 1795년에 정조의 명을 받아 편집하고 이완수가 교정한 것이 71권 33책의 <청장관전서>다. '청장(靑莊)'은 또 다른 호 신천옹(信天翁, 바닷새)처럼 먹잇감을 애써 쫓지 않는 해오라기다. 청렴하고 고매한 선비정신을 담아낸 이름이니 이덕무가 지향한 세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였을까. 매화를 찻자리에 오래도록 배치하는 방법을 창안했다. 밀랍으로 만든 윤회매(輪迴梅)다. 그의 저서 <윤회매십전>에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다. 관련 연구자 강진선은 이렇게 정리한다. <윤회매십전(輪迴梅十箋)>은 매화광 이덕무가 젊은 시절의 박물독서 경험을 두루 반영하여 저술한 지식편집이다. 송나라로부터 이어진 <매보>의 성과 및 <삼재도회>에 반영된 매화 삽도 등을 바탕으로 밀랍으로 만든 매화를 창안했다. 특히 연암 박지원과의 교유초기부터 보여준 모범적인 정보편집을 주목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예컨대 시사(詩社)의 동인들이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적은 글)' 등의 저작을 자신의 글 속에서 활용하며 납매를 따라 만들었겠는가.

매화가 윤회하는 법

이덕무가 밀랍으로 매화를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윤회매라는 이름 짓기에서 그 일단이 드러난다. 송나라 시인들이 노래했던 납매에서 나아가 매화의 철학을 다시 세웠다고나 할까. 내 방식으로 말하자면 아직은 보내지 않은 봄, 아니 날마다 윤회하는 봄의 철학을 납매를 통해서 주장하고 싶었던 게다. 벌이 꽃가루를 채집해 꿀을 만들고, 이 꿀로 다시 꽃을 만드니 이것이 윤회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덕무의 윤회매는 조선인문학의 르네상스기를 이끌었던 많은 학자들에 의해 인용되었다. 박지원은 이덕무가 자세하게 구성한 19식을 써서 3그루 19송이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유득공도 이를 배워 납매관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박제가 또한 다르지 않다. 강진선은 <매화희신보(1238)>와 <삼재도회>의 '매화도(1597)', 이덕무가 상술한 <윤회매십전(1768)>등을 비교했다. '십전'의 '일지원(一之原)'에 나타난 이덕무의 생각이 분명하다. "벌이 화정을 채취하여 꿀을 빚고 꿀에서 밀랍이 생기고 밀랍이 다시 매화가 되니, 이것을 일러 윤회매라 한다. 대저 산의 꽃이 산 나무 위에 피었을 때 어찌 그것이 꿀과 밀랍이 될 줄을 알며, 어찌 꿀과 밀랍이 벌집 속에 있을 때 그것이 윤회매가 될 줄을 알겠는가. 매화가 밀랍을 잊고 밀랍이 꿀을 잊고 꿀은 꽃을 잊게 되는 까닭인 것이다." 그는 또 말한다. "윤회매가 매화가 되기 전에는 그것이 밀랍이지 꽃이 아니었다. 매화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은 밀랍의 전신이 꽃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문장을 깨칠 수 있고 또 이치를 배우는 자가 연구한다면 기질을 변화시키는 법을 깨달을 것이다." 그렇다. 이덕무가 납매를 윤회매로 이름 지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덕무 일파 이후 오랫동안 윤회매의 전승이 끊긴 듯했다. 매화가 갖는 은일과 지조의 심상을 구기고 심미적 완상물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근자에 김창덕씨의 손으로 복원되었다. 이덕무가 일러준 대로 제작한다. 밀랍을 끓인 뒤 75도로 식혀준다. 손끝으로 온도를 감지한다. 매화고리로 한 번 뜨면 콩 껍질처럼 매화 잎 하나가 완성된다. 다섯 잎을 만들어 조합하면 매화 한 송이다. 백매, 홍매, 연분홍 매화 등을 만든다. 꽃술은 노루털로 만든다. 45~47개 정도를 모아 밀랍으로 묶고 황가루를 끝에 묻히면 마치 진짜 같은 꽃술이 완성된다. 다 핀 꽃잎보다는 꽃봉오리가 살짝 맺혀있는 상태가 격조 높다. 이 미학은 매화 가지를 꽂는 달항아리에 가 닿고 당대 인문의 르네상스를 폈던 시인묵객들의 노래에 가 닿는다. 보름달로 성하였다가 열닷새 만에 이지러지고 초승달로 쇠하였다가 다시 차오르는 달의 이미저리가 매화와 한 몸이다. 윤회이고 태극이다. 경계할 것이 있다. 매실이라는 열매를 탈각한 매화 감상의 심미는 아무리 시를 쓰고 납매를 만들고 윤회와 거듭남의 이치를 상고해도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20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윤회매를 감상하고 날마다 순환하는 이치를 깨닫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덕무가 말해두었다. 청장관 해오라기의 자족과 은일의 기품, 아니 무엇보다 온전한 기질의 변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윤회는 같은 것의 반복이기도 하고 새로운 것의 탄생이기도 하다. 윤회매는 밤낮으로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지도 모른다.

남도인문학 - 윤회매(輪回梅)1

남도인문학 - 윤회매(輪回梅)2

남도인문학팁 –다음(茶愔) 김창덕의 윤회매에 기대어

이덕무가 창제했던 윤회매(輪回梅)를 1996년에 복원시켰다. 14살에 사찰의 장엄에 이끌려 출가했다. 동국대 불교대학원 불교미술사 전공, 범어사, 태안사, 개암사 등에서 20여년 수행하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 환속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윤회매는 달항아리에 장식하기도 하고 돌가루로 입체감을 낸 찻사발을 화폭에 그려 장식하기도 한다. 복합예술품이다. 지화(紙花)를 공부했기에 자연스럽게 납매(蠟梅)를 복원했다. 선화(禪畵)로도 일가를 이루었다. 범패와 다도에 조예가 깊다. 그가 이룩한 서화와 춤과 차, 지화와 납매를 횡단하는 철학은 무엇일까. 세계일화(世界一花), 세상은 하나의 꽃이다. 각자의 내면에 들어 있는 꽃이다. 아니 모든 개체가 하나의 꽃이다. 일이관지(一以貫之), 한 이치로써 모든 일을 꿰뚫는다. 이덕무의 윤회매뿐 아니라 그의 영혼까지 깊숙이 닮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작품 중에 내가 매료되었던 것 하나를 든다면 나주 정관채(국가무형문화재 제115호)전수교육관에 전시되어 있는 윤회매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오히려 더 유명하다. 환속 후 텃자리 삼은 광주에서 그의 에너지가 어떻게 소비되거나 네트워크 되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주목할 뿐이다. 어쩌면 청장관 이덕무가 윤회한 것은 아닌지. 그의 차실 아정한 달항아리는 늘 200여 년 전 설중매를 피워내는 중이다. (윤회매문화관은 광주시 남구 서서평길 21-2에 있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