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간재 전남취재부장 |
가을이 되면 흥얼거리던 노래 '가을편지'다. 고은 시에 김민기가 곡을 붙였다. 여러 가수들이 불렀지만 최근 작고한 가수 이동원의 음색이 가장 입맛에 맞는다.
2, 3절 가사도 '가을남자'의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낙엽이 흩어진 날/헤매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낙엽이 사라진 날/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허허 참.
좀 더 젊었던 날 부른 가을노래에 김광석이 빠질수 없다. '흐린 가을하늘에 편지를 써'.
어떤 노래든 애틋한 감성으로 소화해내는 마술같은 음색이다.
'최애 구절'은 김광석이 백코러스 화음을 넣어 부른 마지막 클라이맥스 대목이다. 불가능에 가까운 옥타브까지 끌어 올려가며 부르곤 했다.
옛 선인들 역시 가을이 되면 '가을남자'가 됐었나 보다.
대표적인 시가 중국 송나라 문인 구양수(歐陽脩·1007~1072)가 쓴 '추성부(秋聲賦)'다. 가을밤 독서하다 밖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느낀 감흥을 동자와 대화하는 형식을 빌렸다.
가을 밤 소슬하니 바람이 불고 나뭇가지가 흔들리자 그 소리에 놀랐다.
"이상하구나. 처음에는 우수수 바람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뛰어오르며 부딪치는 것이 마치 파도가 한밤중에 일어나고 비바람이 몰려와 물건에 부딪혀 쨍그랑거리는 듯하다. 또 마치 적에게 다가가는 병사들이 재갈을 물리고 질주하는데 호령소리는 들리지 않고 사람과 말이 내달리는 소리만 들리는 듯하구나."
동자를 불러 물었다. "저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알아 보거라."
동자가 답했다.
"별과 달이 맑게 빛나고 은하수가 하늘에 있어 사방에 인기척은 없는데 소리는 분명 나무 사이에서 나는 듯합니다."
구양수가 말했다. "아 슬프도다. 가을의 소리구나."
그의 시 마지막 구절은 반전을 이루며 미소 짓게 한다.
"동자는 대답도 없이 머리를 떨어뜨리고 조는데, 단지 사방 벽에서 벌레 소리만 찌륵찌륵하고 들려와 나의 탄식을 돕는 듯하더라."
선인들의 호젓한 삶은 언제나 찬사의 대상이다.
이 시는 800년 뒤 조선에서 한폭의 그림으로 부활했다. 조선 4대 화가인 단원 김홍도(1745∼1806?)의 '추성부도(秋聲賦圖·보물 제1393호·55.8×214.7㎝)'다.
그림 오른쪽에 메마른 가을산이 보인다. 능선 위를 수평방향의 '갈필(물기없는 붓에 먹을 조금만 묻혀 사용하는 필법)'로 그려 음영을 줬기에 시간이 한밤중 임을 알 수 있다.
왼쪽에는 보름달이 훤한데 천지사방이 고요해 적막감이 감돈다.
가운데 중국식 초옥 둥근 창 안에는 글읽는 선비 구양수가 밖을 내다보고 있다. 동자가 왼쪽을 가리키며 뭔가를 아뢰는 모습이 보인다.
김홍도는 두 사람이 대화하는 이 부분을 스냅사진처럼 포착해 그림으로 표현했다.
김홍도가 사망 1년 전인 61세에 그린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인생의 덧없음, 영원한 자연에 대한 깨달음을 담고 있다.
'이태원 희생자 참사'로 전국민이 슬픔에 잠겨 있다. 울적한 가을밤 '추성부'를 읽으려 책을 펼쳤지만 도통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박간재 기자 kanjae.par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