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영신역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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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대
해남 영신역사마을
  • 입력 : 2022. 11.28(월) 16:26
  • 최도철 기자
최도철 미디어국장
가을이 깊어가는 11월 중순, 해남 옥천에서 의미있는 축제가 열렸다. 겨우 30여 가구 남짓 사는 작은 마을 영신리에서 개최된 '제1회 실사구시 역사문화축제'다.

'실사구시-인내천의 땅, 해남'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축제는 영신마을에서 나고 자란 덕촌 양득중(梁得中 1665~1742) 선생과 지강 양한묵(梁漢默, 1862~1919) 선생이 남긴 '실사구시'와 '인내천'의 의미를 알리고 기념하기 위해 마련됐다고 한다.

양득중은 역사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덕촌에 대한 학계연구도 미미하다. 남긴 저서는 그의 문집인 덕촌집(德村集)이 유일하다. 한국 유학사에서 그는 명재 윤증의 수제자로 언급될 뿐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실사구시의 실천가' 양득중이 반계 유형원의 정신을 계승한 실학 사상가라는 평가와 함께 호남 실학의 선구자로 주목받고 있다.

양득중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70여 차례 실려 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게, 그의 나이 65세에 영조를 만나 당시의 허위지풍(虛僞之風)을 낱낱이 열거하고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아뢴 내용이다. 임금은 승지에게 '실사구시'를 크게 써서 들이라고 명했다. 벽에 걸어놓고 네 글자를 부신(符信)으로 삼은 것이다.

중국 고전에 있던 '실사구시'가 당색을 초월해 시대의 폐단을 없애는 개혁의 기치로 등장한 것이다.

그로부터 200년의 세월이 흐른 뒤 기록하고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인물이 영신마을에서 태어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높고 낮음이 없다는 인간 존중의 사상, 인내천(人乃天)을 주창했던 양한묵 선생이다.

이준 등과 함께 헌정연구회를 조직했고, 서울에 천도교 중앙총부를 결성해 활동했던 양한묵은 기미년 3.1운동 당시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개최된 독립선언식에 참석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사람이다.

천도교계를 대표해 서명한 후 일경에 붙잡혀 서대문감옥에 수감됐고, 석 달도 채 지나지 않은 5월 26일 가혹한 고문으로 순국했다. 옥중에서 숨진 유일한 민족대표로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라는 뜻을 끝내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양한묵 선생의 생가가 있는 영신마을은 생가 복원과 함께 선생의 흉상과 독립선언서 사본 등이 전시된 기념관이 준공됐다. 또 선생이 공부하던 '소심제'를 비롯해 순국비, 덕촌사, 덕촌영당 등이 있다.

해남길에 나선다면 옥천 영신역사마을을 거닐며 '실사구시'와 '인내천', 그리고 조선 실학의 싹이 어떻게 태동하고 꽃피웠는지 그 내력과 흔적들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을 듯하다.

최도철 기자 docheol.choi@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