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창·노영필> 학기초, 학부모들이 벗어나지 못하는 고민의 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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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창·노영필> 학기초, 학부모들이 벗어나지 못하는 고민의 늪
노영필 철학박사
  • 입력 : 2023. 04.02(일) 14:10
노영필 철학박사
“선생님, 진로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아이가 어떤 것을 하고 싶어하는지 아세요?”

“춤을 잘 춰요. 댄서를 하고 싶답니다. 먹고 사는 걱정은 안 하면서요.”

“그래서 어느 고등학교를 가고 싶어합니까?”

“예고인데, 갈 정도의 실력이 안 돼서 문제입니다.”

“왜요?”

“대회 나가서 수상도 했지만 춤춘다고 공부를 전혀 안 했거든요.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하라고 했더니 …”



어디서부터 꼬였을까?



중학교 3학년 학부모들은 고민이 크다. 진로는 아이가 가보지 않은 길이고, 부모 역시 경험하지 않은 길일 수 있다. 학기초면 매번 듣는 하소연이지만 서로 다른 희망사항과 다른 관심 앞에 아이와 맞는 유형의 진로를 찾기란 쉽지 않다.

부모들의 관심 기준은 뭘까? 먹고 사는 문제, 상급학교로 갈 실력 문제, 멋대로 하고 싶다는 자유의 책임문제를 중심에 두고 대화를 한다. 아이는 느낌에 취해 멈춰있던 상태로, 방향감 없이 그냥 좋아 했을 터다. 그런데 어른들의 주제는 멀어 무겁고 클 뿐이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놀랄 정도로 바뀐 세상, 아이와 맞추지 못한 눈높이, 적절한 도움방법을 못찾은 부모의 역할은 갈수록 혼란만 더 커지고 있다. 온오프라인은 세대간의 문화 차이를 키워 부모자식 간의 갈등을 더 벌려놓았다.

기준은 어디에 둬야할까? 경험이 많은 부모일까? 문제를 해결해야 할 자녀일까? 자칫 도와줘야 할 자녀에게 강요에 그칠수 있다. 아이와의 이해지점을 찾는 일은 그래서 쉽지 않다.

돕는다는 것이 잔소리로 변질되고 소통방식의 차이를 외면하면 버릇없다는 착각으로 확대된다. 부모들에겐 고단한 세대갈등이다. 통제로 쉽게 상대하던 과거 우리들이 경험한 부모 자식들이 아니다.

부모들 세대가 겪었던 고분고분 문화와는 딴 판이다. 부모는 “네”였다면 요즘은 “왜요?”이다. 부모 원하던 대로 키울 수 있는 자식세대가 아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멈춰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게 중요하다. 부모의 희망은 부모들의 욕심으로 갇힐 수 있다. 그래서 자칫 의견을 낸다는 것이 불통의 부모가 되는 이유다.

디지털 매체처럼 쌍방향의 소통이어야 하는데 신문처럼 일방향 소통에 익숙한 부모라면 멀티적인 아이들을 상대할 수 없게 된다. 일방적인 대화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뭐든지 잘해줬다는 말은 위험하다. 부모 입장에서는 뭐든지 잘 해줬다는 고민을 쉽게 듣는다.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아이와 부모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못하면 잘 해준 게 아니다. 오히려 갈등의 위험지수가 높아진다.

부모가 내 관심을 중심으로 내가 주고 싶은대로 해놓고 부모자식 간에 벌어진 간격을 자식 탓 세대 탓만 할 때 갈등의 충격은 커진다.

“하고 싶은대로 하라” 해놓고 방치를 했는지 살펴야 한다. 들어주긴 했지만 아이의 고민이 해소되는 공감이 아니라 이해되지 못한 부모의 잔소리만 들었을 수 있다. 그 분야에 공부가 안 되어 있고 그분야의 방식을 모르면 자식과 겉도는 대화에 머무는 게 뻔하다.

다 안다는 것과 다 할 수 있다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부모는 자식을 다 안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더 큰 착각은 다 할 수 있다고까지 생각한다. 사실은 아이도 모르고 부모도 모르는데도 부모는 더 잘 안다고 오만해 한다.

무엇으로 맥을 짚어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인지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대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냥 멋대로 하라고 방임해 놓고 해야 할 일을 안 했다고 타박까지 하는 결과를 만들기 쉽다는 뜻이다.

아이는 전체를 볼줄 몰라 스트레스가 쌓였는데 어찌 자기 문제를 입체적으로 통찰한 것처럼 지적하냐는 것이다.

뭐든지 잘 해줬다는 것은 뭐든지 안 해줬다는 말이고 내 식으로만 잘 해줬다는 말은 단방향적 소통만 잘 했다는 엉뚱한 자랑이다. 진짜 잘 해주는 것은 기준이 아이 중심일 때다. 내 결론이 소거된 아이의 의견을 존중할 때다. 그래서 교육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사실 아이 중심이라는 말은 아이가 하려는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듣는 힘, 경청은 내 기준으로 의견을 절단하지 않고 고스란히 들으라는 뜻이다.

너의 조건으로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지 말자. 자기 판단이 가능하도록 전형자료를 찾아주고 입시 경향을 찾아주자. 자기 판단과 비교가 가능하도록 돕거나 전문가와 연결시켜주어야 한다. 그것이 실속있는 도움의 시작이다.

부모든 교사든 큰 실수를 하는 것은 바로 자기 기준으로 강요할 때다. 더 나아가 그 기준으로 결론을 내리고 아이가 따라야 한다고 강요할 때 갈등의 간극은 더 벌어지는 것이다. “한 아이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교육청의 슬로건이 모든 학부모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을까, 회의적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