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반목하고 갈등하며 분단된 나라를 더 세분하여 나누는 이유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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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전남일보]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반목하고 갈등하며 분단된 나라를 더 세분하여 나누는 이유가 무엇인가
350.조선통신사를 생각하며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를 두고도 과학을 얘기하는 이들이 많다. 자연과학(science)만 과학이라고 생각하고 민심이자 천심인 사람들의 마음은 과학이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일까?
  • 입력 : 2023. 06.15(목) 13:44
고려첩장불심조조. 동경대 사료편찬소 소장
복원 조선통신사선.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조선통신사행렬도. 대영박물관 소장
조선이 일본으로 보낸 외교사절을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라 한다. 고종 때는 이름을 수신사(修信使)로 고쳐 부른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풀이다. “통신사는 조선시대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막부장군에게 보낸 공식적인 외교사절이다. 사절의 명칭은 조선측은 통신사, 일본측은 일본국왕사라 했다. 태종 때부터 통신사의 파견이 정례화되어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총 20회(조선 전기 8회, 조선 후기 12회)가 이루어졌다.” 이에 비교되는 것이 연행사(燕行使)이다. 연나라의 수도가 연경(燕京)이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청나라의 수도, 지금의 베이징으로 보낸 사신을 이르는 말이다. 인조 15년(1637)부터 고종 31년(1894)까지 모두 507회 파견되었다. 연구자에 따라 ‘연행사’의 호명이 부적절하다며 명나라로 파견한 사신은 부경사(赴京使), 청나라로 파견한 사신은 부연사(赴燕使)로 구분하기도 한다. 중국 사례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은 통신사에 대해 말한다. 오늘, 여기, 우리, 조선통신사를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인가? 누군가에 의해 유행된 격언,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를 곱씹는다. 지난 일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경계의 다짐이 조선통신사를 상고하는 첫 번째 까닭일 것이다. 문제 삼는 것은 우호 교린의 상징이었고 수많은 학술, 사상, 기술, 예술 교류 등의 통로가 되었음에도 임진왜란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정세판단과 실기(失機)다. 일본이 정한론(征韓論)으로 치달은 이유야 수백 가지가 넘겠지만, 이에 대응한 견한론(遣韓論, 조선을 무력으로 정복하지 않고 외교사절을 파견하여 평화적인 교섭을 하자던 주장)은 왜 확장되지 못했을까.



삼별초의 고려첩장불심조조(高麗牒狀不審條條)



일본 막부 장군에게 파견한 사절단에 통신사라는 호칭을 처음 쓴 것은 고려시대인 1375년 무로마치(室町)막부의 장군에게 왜구 금지를 요청하는 사절을 파견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1270년 진도에 웅거하였던 삼별초가 승화후 온을 내세워 또 하나의 고려를 건국하고 일본으로 사절단을 파견한 바가 있다. 이때 삼별초는 남해, 거제 등 30여 개 섬을 포함하여 전라, 경상의 거의 전 해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일본연대기인 『길속기(吉續記)』의 기록 중 1271년 9월 2일 ‘고려첩장(高麗牒狀)’이 그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일본에서는 고려 정부와 진도의 삼별초 정부를 구분하지 못했던 것 같다. 몽골에 대한 태도를 이상하게 여기고 이해되지 않는 점들을 조목별로 정리한 것이 ‘고려첩장불심조조’이다. 원본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이를 간추린 내용이 동경대학 사료편찬소에 소장되어 있다. 몽골을 야만적인 적으로 지칭하는 등 반몽 의지를 명백히 드러냈다. 몽골을 위취(韋毳)라 했다. 짐승의 가죽이라는 뜻이다. ‘피발좌임(被髮左袵)’이라 했다.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다는 즉, 미개한 오랑캐라는 비난이다. 항몽 의지를 드러내고 삼별초 정부와 일본과의 공동 운명을 강조한 외교 문서다. 다시 사전의 설명을 참고한다. “조선 전기에는 일본과의 사절 왕래가 많아 조선 사절의 일본 파견이 18회였고 일본 국왕사의 조선 파견이 71회였다. 조선 국왕이 파견한 사절이 모두 통신사로 불렸던 것은 아니다. 회례사, 회례관, 보빙사, 경차관, 통신, 통신사 등 명칭도 다양했고 수행 목적이나 편성도 다양했다.” 조선 전기의 통신사 파견은 대개 왜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왜구 금압을 요청하고 장군 습직을 축하하는 등 우호선린 관계를 유지하는 따위가 그것이다. 임진왜란 직후에는 ‘회답겸쇄환사’라는 이름으로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도쿠가와(德天)막부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636년에 다시 통신사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명·청 교체 시기에는 일본과의 연대 확인 등을 목적으로 했다. 청나라의 압력에 대한 견제 협력과 해금 정책에 대한 탐색 등을 목적으로 삼기도 했다. 중화질서(중국을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의 붕괴가 조선과 일본 간의 연대감을 추동했다. 그간 청나라를 중심으로 한 책봉체제를 배제하고 조선과 일본 양국의 독자적인 대등 외교를 수립했다고나 할까. 탈중화(脫中華)의 우호선린을 구축했다고나 할까. 두루뭉술하게 말하자면 양국간의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통신사 파견의 초점이 있었다.

돌이켜본다. 진도 삼별초 정부의 파견으로부터 조선통신사까지 700여 년을 돌아 나오는 길목에, 오늘의 한·중·일 그리고 북한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명·청에 사대하던 조공의 시대도 아니요,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기의 압제적 시기도 아니다. 그런데 예년에 없던 갈등과 불안이 엄습한다. 전쟁의 공포가 조성되는 까닭이 무엇인가. 반목하고 갈등하며 분단된 나라를 더 세분하여 나누는 이유가 무엇인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선조 24)에 황윤길과 김성일이 통신사로 다녀와서 선조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황윤길이 말했다.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입니다.” 김성일이 말했다. “그러한 정황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민심이 동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선조는 누구 말을 들었는가?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비탄에 빠졌던 역사가 명백하게 증명한다. 설마 700여 년 전 진도의 삼별초 정부처럼 중국을 ‘위친’이나 ‘피발좌임’으로 비난하는 자가 있을까?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를 두고도 과학을 얘기하는 이들이 많다. 비과학적인 말을 장황하게 아뢰어 민심이 동요했다고 말이다. 자연과학(science)만 과학이라고 생각하고 민심이자 천심인 사람들의 마음은 과학이 아닌 것으로 여기는 것일까? 지금 우리는 40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 김성일과 황윤길의 두 가지 보고를 듣고 있는 중이다.



남도인문학팁

도랑에 든 소, 등거리 민간 외교

“도랑에 든 소”라는 우리 속담이 있다. 이리하거나 저리하거나 풍족한 형편에 놓인 사람이나 형편을 비유하는 말이다. 개천에 든 소 혹은 두렁에 든 소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리하지도 못하고 저리하지도 못하는 결핍을 말할 때 사용되기도 하다. 두렁에 있으니 왼쪽의 언덕 풀도 뜯어 먹어야 하고 오른쪽의 언덕 풀도 뜯어 먹어야 한다는 뜻이다. 중국에 조공하고 일본에 강점당했던 역사를 상고해야 할 이유를 생각한다. 조선통신사와 연행사를 되새긴다. 속된 말로 등거리 외교를 생각한다. 기회를 보아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를 따로 소개하겠지만, 조선통신사를 상고하며 거론하고 싶은 것이 이 여행기다. 비유하자면 민간의 통신사라고나 할까. 일본 승려 엔닌이 838년부터 847년까지 당나라에 가서 불교를 배우고 돌아오는 과정에 장보고 선단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사실은 엔닌이 당나라 들어가는 과정에도 신라 상인들이 중추적이다. 재당 신라인들 아니었으면 엔닌의 깨달음이나 저작도 없었을 것이고, 심하게 말하면 일본 불교도 중흥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똑같은 현장을 보고 와서도 달리 말했던 황윤길과 김성일처럼, 후쿠시마 원전수를 놓고 달리 말하는 이들을 생각한다. 일본 내의 다른 목소리들도 경청한다. 친한파, 통신사 시절에 비유하자면 이른바 견한론(遣韓論)자들 말이다. 이들과의 연대가 절실한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이 있고 민간이 해야 할 일이 있다. 국가가 하지 못하는 일을 민간이 할 수 있다. 엔닌의 사례에서 보듯 장보고 시대에는 동아시아 바다를 신라가 장악했다. 일본도 중국도 신라인들을 따라잡지 못했다. 뜬금없이 생각하는 게 아니다. 제국적인 제패(制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유효한 아니 어쩌면 영원히 유효한 말일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