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산자에서 죽은자로 넘어가는 경계 넘기의 비밀 ‘이슬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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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전남일보]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산자에서 죽은자로 넘어가는 경계 넘기의 비밀 ‘이슬털이’
351.‘이슬털이’와 누룩의 비밀
처녀의 첫 월경 때 피가 비치면 ‘이슬 비친다’고 했다. 생명의 잉태와 관련된 이슬 곧, 참이슬의 의미가 영돈마리 의례 속에 마치 시루떡처럼 포개져 있다.
  • 입력 : 2023. 06.22(목) 14:42
고 김대례 당골의 영돈마리 이슬털이. 진도군 제공
씻김굿 이슬털이에서 관 위에 누룩을 올리고 넋이 들어있는 주발과 솥뚜껑을 올린 모양. 이윤선
진도씻김굿 영돈마리 만드는 과정. 2022년 11월 진도씻김굿보존회 제공
진도홍주만들기 중 보리쌀로 만든 누룩을 완성한 모양. 전남도 무형문화재 위원들 조사
‘이슬털이의 두 출처’, 한국학호남진흥원에 연재하는 내 칼럼 ‘진도의 상장례 다시 읽기’ 세 번째 글의 제목이기도 하다. 호남학진흥원 연재를 시작한 까닭은 한국학이 나아가야 할 바를 좀 더 명료히 하기 위해서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나 안동국학원에 대응하여 장차 이를 바를 내 방식으로 풀어내는 셈이랄까. 내 속셈은 이름도 빛도 없이 스러지고 일어나던 기층문화의 맥락 추적에 있다. 겹치고 포개져 마치 일노래의 후렴처럼 늘 반복되는 말들이, 귀한 지면을 소비하는 말의 성찬이 아니라, 고된 노동에서 돌아와 찐 감자와 신 김치, 막걸리 한 잔 놓고 묵상하는 고결한 성찬이 되기를 바란다. 호남진흥원을 응원하는 차원에서 얘기를 풀어 둔다.



씻김이라는 의례극의 서사



남도의 씻김굿에 대해 주목해온 나의 시선은 시나브로 힌두의 시바나 비슈누로 확장되었다. 싸목싸목 넓힌 시야는 기독교의 예수에 닿고 이슬람교의 무함마드와 불교의 고타마 싯타르타에 닿았다. 지난 30여 년 인도에서 동아시아를 돌며 눈에 밟히는 풍경들을 뇌 주름 굽이굽이 채워 두었다.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씻김’이 필요한 시대라 표방하는 것은 이를 뭉뚱그린 발설이다. 내 학문(學問)의 정초(定礎)에 부어 넣은 골재들, 나의 질문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니, 내가 궁금한 점을 물어 이치를 알아차리고자 했던 아마도 유년이었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 큰 이모는 굿을 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국민가수가 된 송가인의 가계를 살피면 내 이모의 내력이 보인다. 가인의 외할머니 여금순과 함께 서부 진도와 조도의 여러 섬들을 누비며 씻김굿이니 망자혼사굿이니 따위의 굿들을 연행하던 속칭 ‘점쟁이’ 혹은 ‘당골래’였다. 이 또한 적절한 기회를 보아 풀어나간다. 씻김굿의 여러 절차가 끝나고 ‘이슬털이’ 순서가 되면 고인을 상징하는 ‘영돈마리’를 한다. ‘영돈’은 ‘영(영혼)+돗(돗자리)’의 와음이 정착된 예로, ‘영혼(靈魂)을 말아 넣은 돗자리’라는 뜻이다. 망자의 옷을 돗자리에 말아 세운다. 말아 세우면 마치 기둥이나 사람이 서 있는 모양새가 된다. 돗자리 위에 누룩을 놓는다. 누룩 위에는 또아리(똬리)를 놓는다. 그 위에는 복개 혹은 주발(뚜껑이 있는 밥그릇)에 넋(한지로 오린 신체)을 오려 넣어 올린다. 맨 꼭대기에는 솥뚜껑을 놓는다. 솥뚜껑 아래는 이어서 연행할 ‘길닦음’에 쓸 ‘질베(길을 상징하는 베)’의 끝을 연결해둔다. 망자가 미혼이었을 경우 솥뚜껑은 바가지로 대체된다는 증언도 있다. 물론 나는 이를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고 보는 입장이다. 이것이 망자를 상징한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쑥물, 향물, 맑은물과 누룩



왜 이런 형식을 갖게 되었을까? 쑥물, 향물, 맑은물 세 가지의 물을 각각 작은 그릇에 담고 솔가지 혹은 빗자루로 찍어서 씻는다. 빗자루보다는 솔가지에 찍어내는 것이 원형적이다. 이 세 가지의 물에 대해서는 다음 차에 풀어 쓴다. 찍어낸 물로 망자를 상징하는 ‘영돈’을 쓸어 내린다. ‘질베’로는 세 가지의 물 즉, 삼합의 물기들을 닦아낸다. 신칼로 연신 솥뚜껑을 두드리며 무가를 연창한다. 솔가지나 빗자루가 ‘영돈’을 씻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씻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무가가 진행되는 동안 ‘영돈’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곧, 망자의 몸과 넋이 깨끗하게 씻겨진다고 관념한다. ‘영돈마리’ 의례를 하는 문화권에서는 모두 누룩을 사용한다. 남도의 씻김굿만이 아니다. 지역에 따라 ‘온누룩’을 사용하는가 ‘누룩 가루’를 사용하는가가 다를 뿐이다. 질문이 생긴다. 하고많은 오브제들 중 왜 누룩을 사용했을까? 망자의 신체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누룩 외에도 예컨대 메주 등 더 근사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누룩의 효능이나 기능에 대해서는 구구절절 토를 달 필요가 없다. 누룩 효모는 발효의 대명사다. 전 세계의 발효문화 중에서 동아시아 특히 우리나라의 것들이 주목된다. 심지어는 간장, 된장을 담을 때도 전통적으로 누룩을 사용했던 적이 있다. 일부 농가는 지금도 그렇게 한다. 기본적으로 누룩은 술을 만든다. 술은 마시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신을 경배하는 데 사용된다. 나는 이를 ‘술 만들기’ 의례와 불탑 노반(露盤)의 감로수(甘露水)받기로 해석한 바 있다.

가장 원시적인 방법을 설명한다. 쌀과 누룩을 빚어서 익힌 술이나 술지게미를 솥에 넣고 그 위에 시루를 놓은 다음 솥뚜껑을 뒤집어 덮는다. 뒤집은 솥뚜껑의 손잡이 밑에는 주발을 놓아둔다. 솥에 불을 때면 증발한 알콜의 증기가 솥뚜껑에 미리 부어 둔 냉각수에 의해 응축된다. 이것이 솥뚜껑의 경사를 따라 손잡이를 타고 뚝뚝 떨어져 주발에 고이게 된다. 이보다 조금 발전한 것이 소줏고리(古里)라는 증류장치를 만들어 쓰는 경우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방식은 후자의 것이다. 마치 아침 이슬처럼 보이기에 이 술 내리는 과정을 ‘이슬털기’라고 했다. 씻김굿의 ‘영돈마리’를 이슬털이라고 하는 이유에 비추어보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증류주를 내리는 방식은 이처럼 이슬처럼 방울이 맺혀 있는 것을 한 방울씩 받아내는 방식이다. 곧 이슬을 털어내는 방식이기에 ‘이슬털기’이고 ‘이슬털이’이다. 씻김굿의 이슬털이에서 반드시 누룩을 사용하는 이유나 굳이 이슬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이유가 바로 술 만들기(삭히기, 익히기)와 관련이 있다는 증거다. 굳이 표현하자면 솥뚜껑은 소줏고리의 뚜껑이며 그 안에 든 망자의 넋이 발효되는 과정, 다시 말하면 산자에서 죽은자로 넘어가는 경계 넘기의 비밀을 여기서 읽어낼 수 있다. 불탑 노반에 대해서는 지난 칼럼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남도인문학팁

이슬 비치는 원형



소주 회사 브랜드 중 ‘참이슬’이 있다. 누가 기획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표에 두꺼비를 그려두었다. 한자로 고쳐 쓰면 ‘진로(眞露)’이다. 이는 도깨비와도 친연성이 높다. 왜 도깨비의 출처를 두꺼비로 해석하였는지, 도깨비와 두꺼비의 양면성에 대해서는 졸저 『한국인은 도깨비와 함께 산다」(다할미디어)에서 거듭 밝혀 두었다. 남성성으로 확정되어버린 도깨비를 왜 여성성의 맥락을 끌어내 해명하고자 했는가가 그 핵심이다. 김지하의 ‘여신’이나 ‘수왕사’에 기대어 차차 설명해나가겠다. 이슬과 참이슬의 행간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우리 조상들은 처녀의 첫 월경 때 피가 비치면 ‘이슬 비친다’고 했다. 출산 때에 양수가 터지기 전 피가 얼핏 비칠 때도 이슬 비친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슬의 의미를 상고 해보라. 생명의 잉태와 관련된 이슬 곧, 참이슬의 의미가 영돈마리 의례 속에 마치 시루떡처럼 포개져 있다. 내가 졸저 『산자와 죽은자의 축제』의 부제 ‘진도 상장례와 재생의례’라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도사람들이 영돈마리 의례를 굳이 이슬털이라 호명해왔던 까닭 말이다. 농악 상쇠의 부포놀음에서도 이슬털이가 있다. 모양새는 달라도 그 맥은 영돈마리의 이슬털이와 다르지 않다. 다만 연행자들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저 전승된 것이니 따를 뿐이다. 불교 전래 이후 노반(露盤)의 이슬털이와 상관하는 것은 이전 칼럼으로 대신한다. 유교의 제사 술 만들기를 불교 노반의 이슬에 앞서 분석한 것은 불교보다 유교가 앞선 전통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