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 이윤선의 남도인문학>시김새와 장단으로 울리고 웃긴 ‘남도음악의 저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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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전남일보] 이윤선의 남도인문학>시김새와 장단으로 울리고 웃긴 ‘남도음악의 저력’
361) 남도음악의 쟁패(爭霸)
나는 남도문화의 저력을 믿는다. 남도 사람들의 충정과 자정 능력을 신뢰한다. 정율성 논란 등 황당한 편 가르기는 역사적 퇴행과 진보적 미래를 검증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일지 모른다.
  • 입력 : 2023. 08.31(목) 14:47
산조합주. 국립국악원 제공
지난 1세기 수많은 장르가 쟁패를 거듭했다. 역사, 종교, 사회, 문화, 풍속 등 거의 전 분야에 걸친 파란이었다. 내부적인 요인도 있지만, 열강들의 각축이라는 외부 충격이 컸다. 하나의 양식이 바뀌기까지 수 세기가 소요된 이전의 사회에 비한다면 불과 한 세기에 혁명적인 전환이 일어났다. 음악 장르라고 다를 바 없다. 간단없는 파고를 일반인들이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승자가 갈렸다. 오늘날 우리 음악에서 어떤 장르가 득세하는가를 보면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예컨대 전통음악 쪽에서는 판소리와 산조가 국악계를 점유했다. 한국음악사라는 측면에서 보면 지난 1세기 동안 일어난 가장 괄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민요는 한 세기 동안 트로트와 가요를 거쳐 부단히 변화되었다. <향가>뿐 아니라 『시경』이나 『초사』에 기대어 해석하자면, 민중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장르의 변용이었다. 와중에 열강의 외압 혹은 수용 등 일본이나 미국가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교회음악 혹은 서양음악은 시나브로 한국음악을 장악하여 학교 교육을 평정해버렸다. 이에 대응했던 국악은 국가적으로 강제되어 그나마 명맥이 유지되었다. 이들 우열 다툼의 행간을 살피면 지금은 사라지거나 잊힌 각양의 장르와 파편들이 보인다. 지난 칼럼에서 나는 남도라는 개념을 삼남의 전통으로부터 지금의 남도로 수렴되었다고 분석한 바 있다. 그 중심에 남도음악이 있고 판소리와 산조가 있다. 이 지점에서 의문이 생긴다. 판소리와 산조를 오로지 남도음악이라고 할 수 있나? 궁중음악에 대칭되는 음악이기에 전국 민간음악의 총화로 봐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 전국 민간음악의 총화다. 문제는 대개 이 판소리와 산조를 남도음악의 요체로 이해하거나 설명한다는 점이다. 내 질문의 포인트다. 반론의 여지도 있고 간단치도 않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지난 한 세기 숱한 장르 간의 쟁패를 통해 판소리와 산조가 남도의 색깔을 덧입게 된 것이다.



판소리와 산조가 남도의 색깔을 갖게 된 까닭



판소리 강의를 나갈 때마다 나는 평양의 노래와 남도의 소리를 비교해서 설명하곤 한다. 예컨대 춘향전 중의 아니리를 평양에서 읊자면 “춘향이 동무래 광한루 다녀왔습네다!”라고 할 것이다. 경상도라면 어떻게 읊을까? “니 춘향이가! 광한루 댕개 왔나!”라고 하지 않겠나. 판소리의 성음이라고 인식하는 남도풍의 걸쭉한 음색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아니리이다. 반면에 남도에서는 “춘향이가 광한루 댕개왔는디 이도령이 꽃귀갱을 나왔던 모양이드라”라고 할 것이다. 묵은김치처럼 곰삭은 맛이 나는 이 음색을 우리는 남도풍이라 한다. 신재효를 비롯한 남도 사람들은 이를 ‘그늘’이라 했다. 그래서 청아한 목소리로 꾀꼬리같이 아름답게 노래를 하면 남도 사람들은 참다운 소리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늘이 없는 소리라는 취지였다. 시인 김지하는 한 발짝 더 나아가 ‘흰그늘’이란 용어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지난 칼럼에서 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남도소리와 가요, 남도창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된 용어다. 판소리의 기원설 중 강창(講唱)문학 기원설 즉 옛이야기를 노래로 바꾸어온 역사를 전제해보면, 충청지역의 <중고제>를 포괄한다. 중고제에서 발원하여 조선 후기 중인과 궁중 패트런(후원자)들에 의한 <동편제>의 성립으로, 다시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서편제>의 재구성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경상지역의 간섭이 약해진다.” 판소리가 본디 삼남의 윗지방 경기도나 충청도에서 강창문학의 한 갈래로 시작하여 장차 남도지역의 선율과 장단으로 재구성되면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산조라고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판소리와 산조가 모두 삼남지방 혹은 서울 경기를 포괄하는 전국에서 발현하였다가 차차 남도풍으로 수렴되었음을 소개한 바 있다. 이렇게 진행된 데는 다양한 원인이 있을 것이기에 학자마다 견해가 다를 것이다. 나는 사회적 한 요인으로 삼남에 편재한 평야 지대의 농사와 재력을 들었다. 조선 중후기 이앙법의 확산과 논농사 기반의 재력을 통해 중상인 계층이 급부상되었고, 이들의 문화 향유 욕망이 마치 유럽 클래식의 발전처럼 판소리와 산조에 대한 패트런(후원)제도를 만들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중상인층이었던 신재효다. 사정이 이러하니 천민이거나 비교적 낮은 계급에 속했던 예술인들이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예술의 재구성에 매진하게 되었다. 폭포수나 동굴에 들어가 백일 수련을 하는 등 수련을 통해 득음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도 이런 사회적 배경이 있다. 일명 ‘어전광대’로 임금 앞에 나아가 소리를 하고 벼슬까지 받을 수 있었으니 신분 상승 등의 인정욕구를 해소하는 첩경이지 않았겠나. 이 환경변화를 주목하고 투신했던 남도지역 당골(무당)들이 많았기에 한때는 판소리가 무가(巫歌)에서 나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변화와 재구성에 사용된 기술이 바로 시김새와 장단이다. 구한말의 격동과 국권 상실의 일제강점기, 동족상잔의 전쟁이라는 시기를 건너오면서 불가피하게 사용되었던 ‘막기’와 ‘풀이’의 기술이었다. 이 기술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으므로 따로 기회를 마련해 소개하기로 한다. 결론적으로 지난 1세기 삼남 기반 혹은 전국 지평의 민간음악이 남도의 색깔을 지닌 판소리와 산조로 수렴되는 과정에서 남도인들이 한국음악사에 끼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남도인문학팁

정율성, 극단의 리트머스 시험지

20세기 초 서울은 동아시아 예술의 패권 다툼과 접속의 용광로였다. 중국의 경극, 일본의 가부키, 서양(미국)의 교회음악, 심지어 러시아의 서커스까지, 궁중음악과 민간음악의 활로 모색과 쟁투를 비롯해, 열강들이 밀어붙인 제국의 음악들이 뒤섞였다. 우리는 그 속에서 좌절했다가 다시 일어나 비틀며 오늘날의 한국음악을 재창조해왔다. 그중 남도음악이 시김새와 장단이라는 기술을 통해 한국인들을 웃게 하고 울게 하며 지난 1세기를 평정하였다. 교회음악으로 출발하여 중국의 영웅이 된 정율성도 그런 성과 중 하나다. 그래서 20여 년 전부터 대중국 관계 개선을 위한 아이템으로 활용해왔다. 이난영의 ‘저고리시스터’에서 ‘김시스터즈’ 등 신민요에서 트로트와 가요까지 확산된 것도 친일음악이라는 오점이 있지만 남도음악의 한 분파라는 점에서 다룰 수 있다고 봤다. 이것이 오늘날 K-팝의 노둣돌이 되었음을 이미 소개한 바 있다. 세계 경제 대국 10위권이라는 우리의 위치와 K-컬쳐로 대변되는 문화적 위상이 이 포지셔닝의 정당성을 말해준다. 우리가 그만큼 경제적 문화적 성장을 이루었으며 포용과 수용의 폭이 넓어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시방 일어나는 뜬금없는 논란을 보며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홍범도 논란도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근자에 월남한 북한 사람을 국회의원으로 뽑는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나는 남도문화의 저력을 믿는다. 남도 사람들의 충정과 자정 능력을 신뢰한다. 역사 이래 삼남을 수렴한 남도가 늘 나라의 위기마다 처해왔던 태도였고 방식이었다. 동학이 그렇고 5.18이 그러하다. 새로운 천년이 시작된 지 어언 20성상, 정율성 논란 등 황당한 편 가르기는 역사적 퇴행과 진보적 미래를 검증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일지 모른다. 사회적 공명이 이루어진 일들에 대해 뜬금없이 거꾸로 돌리려는 퇴행적 행보를 크게 꾸짖어야 마땅하다. 장차 비전을 향해 나아가자고 설득하고 그를 실천해온 것이 남도이고 남도 정신이다. 21세기 K팝이 세계무대를 쟁패하는데 일조해온 남도음악의 저력이 1세기를 관통하여 저리 찬란한데, 시대착오적 이념을 들어 조잡하고 저열한 수준으로 소비시키려는 행태를 어찌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가. 아무리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