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취재수첩>맥주 한잔의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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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전남일보]취재수첩>맥주 한잔의 여유
박소영 경제부 기자
  • 입력 : 2023. 10.22(일) 17:34
  • 박소영 기자 soyeong.park@jnilbo.com
박소영 기자
어릴 적 어른들이 맥주 한잔을 벌컥 들이키곤 ‘캬-맛있네. 시원해’를 연발하는 모습에 도대체 저건 무슨 맛이길래 저렇게 맛있게 마실까 궁금해하곤 했다. 물을 찾다 잘못 마신 맥주의 맛은 ‘캬’는 커녕 그 자리에서 모조리 뱉어버릴 정도로 썼다.

이제는 어른들이 말했던 맥주의 맛이 단순한 맛이 아닌 친구를 만나든 혼자 사색을 즐기든 그날의 노고를 맥주 한잔으로 씻어내는 일종의 정화 의식임을 알게 됐다.

하지만 고물가 시대, 나만의 정화 의식조차 위협받고 있다. 맥주 네 캔에 1만원은 옛말이 됐고 주점·음식점 맥줏값은 6000원까지 치솟았다.

한 시민은 맥주를 서민들의 가장 저렴한 스트레스 해소제라고 했다. 우리는 스트레스 해소조차 가장 저렴한 것으로 하는데 가장 저렴한 것조차 비싸지다니 상심이 크다고도 덧붙였다.

최근 주류업계 시장 점유율 1위인 오비맥주가 원자잿값과 물류비 등 제반비용 상승을 이유로 지난 11일부터 카스, 한맥 등 맥주 제품 출고가를 평균 6.9% 인상했다. 1위 업체인 오비맥주가 선제적으로 맥줏값을 올리면서 여타 주요 주류업체들도 가격을 줄줄이 올리는 도미노 인상이 우려되고 있다.

이번 맥줏값 인상에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맥주 주원료인 홉 생산량이 꾸준히 감소한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따르면 기후변화 여파로 유럽 지역의 홉 생산량이 2050년까지 감소할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면서 홉을 전량 수입하는 국내 주류업체들의 맥줏값 인상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맥줏값 인상은 시민들의 맥주 한잔의 여유뿐만 아니라 주점·음식점을 운영하는 소상공인들의 근심도 키우고 있다. 맥주 출고가가 오르면 소매 가격뿐 아니라 주점·음식점 등에 주류를 납품하는 도매 가격도 오르기 때문이다. 점주들은 비싼 도매가에 매장 주류 가격을 올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로 고민이 깊다.

12년째 조대 후문에서 자리를 지켜왔다는 한 고깃집 주인은 물가 상승과 주세 물가연동제로 주류업체가 매년 인상한 주류 가격 속에서도 학생들의 얇은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맥주·소주 가격 4500원을 유지했지만, 이번 인상으로 내년부터 주류값을 올릴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마저도 학생들을 생각해 500원만 올리겠다고 했다.

취재하면서 매번 듣게 되는 말이 있다. ‘모든 게 올랐다’라는 말이다. 언제는 과일이, 또 언제는 우유가, 이제는 맥주가 올랐다. 도시가스, 전기세 같은 공공요금도 올랐다.

카페, 음식점, 주점 소상공인들은 물론 대학생, 직장인들도 계속해서 오르는 물가에 더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말한다.

‘모든 게 오른’ 지금, 맥주 한잔의 여유는 이제 시간적·내면적 여유로움을 뜻하는 것이 아닌 경제적 여유를 뜻하는 말이 돼버린 듯하다.
박소영 기자 soyeong.par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