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 2024 다시 뛴다]청룡의 해 맞는 ‘용의 여인’, 화려한 비상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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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신년특집 2024 다시 뛴다]청룡의 해 맞는 ‘용의 여인’, 화려한 비상 꿈꾼다
●광주 출신 박소빈 화가
연필로만 완성한 흑백 드로잉
거대한 화면 속 몽확적인 세계
동서양 섞인 화풍 세계가 주목
‘베니스 비엔날레’ 협력 특별전
“그리는 시간이 가장 행복해요”
  • 입력 : 2024. 01.01(월) 16:57
  • 도선인 기자 sunin.do@jnilbo.com
길이 17m의 화폭에 연필 드로잉으로 ‘용과 여인’을 그리며 주목 받은 박소빈 작가가 지난달 27일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양배 기자
그녀의 화폭은 고혹적이면서도 사랑스럽다. 거대한 고대의 벽화를 그리듯, 길이 10m가 넘는 거대한 캔버스에 몸을 맡긴 채 몽환스러운 상상의 세계를 기록해간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힘과 영원의 상징인 신의 존재, 용과 한 여인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 연필, 단 한 자루로 완성한 흑백의 드로잉은 아주 오래된 옛 이야기를 목도한 듯한 감동을 준다. 2024년 청룡의 해를 맞이하는 ‘용의 여인’ 박소빈 화가의 세계다. 최근 뉴욕에서 한 달간의 개인전을 마치고 지난달 14일 오랜만의 국내 전시를 소화하기 위해 광주를 찾은 박 작가를 만났다.

● ‘용의 해’ 베니스·항저우 전시

그녀를 대표하는 시그니처는 단연 ‘용’이다. 용의 기운이 맞아 들어선 까닭일까? 벌써 올 한해 국내외 전시 일정이 꽉 찼다. 가장 큰 이벤트는 오는 4월부터 11월까지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선보이는 개인전이다. 전시장은 베니스 중심지인 산 마르코 광장 인근에 있는 산비달아트센터로 현지 갤러리 중에서도 유수의 화가들이 거쳐 간 역사가 깊은 곳이다. 박 작가는 이번 베니스 전시에서 ‘용과 여인’의 세계를 그린 대표작을 비롯해 주술적 수행의 시간을 담아낸 문자 드로잉 등 최신작까지 다채롭게 선보일 예정이다.

이 전시가 관심을 모으는 것은 오는 4월 개최되는 제60회 베니스비엔날레 기간에 열리는 한국인 화가의 초대 특별전이기 때문이다. 베니스비엔날레 기간에는 전 세계 미술애호가들과 관계자들이 한곳에 모이는 만큼 인근 갤러리와 문화기관들도 다채로운 전시를 잇따라 개최해 그야말로 끝나지 않는 미술축제가 이어진다. 따라올 수 없는 명성과 권위를 지닌 비엔날레 기간에 베니스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전시 기회는 그 자체만으로 화가 인생에서 획기적인 사건인 셈이다.

베니스비엔날레 일정 참여는 미술인에겐 일생에 한 번도 어려운 영광스런 일인데 박 작가에게는 벌써 두 번째다. 앞서 2019년 베니스비엔날레 기간에 현지에 있는 라보라토리움(Laboratorium) 갤러리에서 초대 개인전 ‘시와 같은 몸짓(Poetry in Motion)’을 진행한 바 있다. 동양의 한 여성 작가가 단 한 자루의 연필를 들고 선보인 끊임없는 데생에는 강인하면서도 절제된 에너지가 깃들었고 베니스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일찍이 2000년대 중반부터 뉴욕, 북경을 오가며 활동한 박 작가의 활동 영역이 더 넓어진 순간이다.

올해 중국 항저우에서 개관을 앞둔 숭덕미술관의 개관 기념 전시에 초대된 일 또한 용의 해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일정 중 하나다. 2011년 광주시립미술관이 파견하는 중국 북경 레지던시에 입주하면서 꾸준히 현지에서 경력을 쌓은 ‘박소빈’의 위상이 중국 미술시장에서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되는 사례다. 2월 말부터 열리는 숭덕미술관 개관전에는 중국인 작가 2명과 함께 참여하는데, 박 작가는 미술관 2층 전체 전시공간에서 개인전을 선보인다.

박 작가는 “국내 전시와 베니스, 항저우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포함해 올해만 벌써 4개의 전시 일정이 예정돼 있다. 앞으로도 광주 작업실을 그대로 두고 북경 등 여러 나라를 오가며 전시와 작업을 활발히 이어나가고 싶다”며 “올해는 특히 코로나19 시기를 겪으면서 새롭게 발견한 예술세계인 ‘문자 드로잉’을 본격적으로 선보일 예정이라 다짐이 앞서는 해”라고 말했다.

박소빈의 초기 작품인 스물셋의 자화상. 첫 개인전 때 선보인 작품으로 이후 광주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 1993년 광주서 첫 개인전

스물셋, 박 작가는 1993년 광주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당시 선보인 작품들은 강렬한 누드화, 거친 묘사가 인상적인 자화상과 삶의 풍경들이었다. 이십 대 초반 어린 여성의 화풍이라고 하기엔 개방적이고 대담한 작품이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한 청년작가의 그림이었지만, 자신이 그려야 할 것은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구축한 특유의 화풍이었다. 직설적인 민중미술에 천착해 있었던 당시 광주 화단에 다양성으로 점철된 현대미술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렸다. 뉴욕과 중국을 넘나들며 미술계를 사로잡은 ‘용과 여인’의 세계가 탄생한 순간이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한 해에 개인전을 열면서 전업 작가로 데뷔했어요. 대학 시절 완성한 유화작품들이었는데, 학교생활을 하면서도 전국에 이런 화풍은 없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남들보다 빠른 개인전이 가능했던 이유죠. 지금 생각해보면, 뭘 알고 그 나이에 개인전을 치렀을까 생각이 들어요. 관람객들도 깜짝 놀랐어요. 중년의 화백이 등장할 줄 알았는데, 너무 어린 여자아이가 전시작가라도 등장하니깐요.”

시작부터 이름을 알린 박 작가는 이후 광주에서 탄탄대로를 걸었다. 남맥회, 광주전남미술인공동체 등의 활동을 하면서 대가들과 교류했고 광주 출신 화가로서 기억해야 할 시대상을 자신만의 언어로 그려나갔다. 2000년대 넘어서는 하정웅 청년작가 초대전, 광주미술상 수상, 광주시립미술관 청년작가 초대전 등 광주에서 굵직한 이력들을 쌓아 나갔다.

지난 2017년 중국 북경의 금일미술관에서 진행된 박소빈 작가의 초대전에 대표작이었던 ‘부석사 설화’라는 작품이다. 당시 박 작가는 한국인 최초로 중국 현대미술 아트씬을 이끄는 금일미술관 본관에서 개인전시를 열었다. 광주시립미술관 제공
● 뉴욕서 성공적인 해외 데뷔

2007년은 뉴욕에서 첫 해외 개인전시를 열어 해외 활동의 물꼬를 튼 기념비적인 해다. 박 작가는 2007년 11월 뉴욕 텐리(TENRI)문화관에서 ‘미녀와 야수’라는 타이틀로 초대전을 열었다. 동서양의 소재가 오묘하게 섞인 박 작가의 화폭은 그곳에서 굉장히 새롭고 독특한 것이었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이방인 작가의 개인전이었는데, 현지 대표 예술잡지에서 해당 전시의 리뷰가 나오기도 했다. 그야말로 성공적인 해외 데뷔였다.

눈도장을 제대로 찍은 박 작가는 이후 2009년 뉴욕 브루클린의 보스 스튜디오에 입주하면서 세계무대로 뻗어 나갔다. 중국에서의 작품활동은 2011년부터 시작했다. 박 작가는 2011년 광주시립미술관 북경 레지던시에 선정돼 중국에 진출했다. 2017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북경의 금일미술관에서 본관 전시를 열었는데, 중국 현대미술 아트씬을 이끄는 미술관으로 정평이 나있는 곳이라 국내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이 때 박 작가는 길이 17m, 높이 3m 크기의 화폭에 장작 49일 동안 영필 드로잉을 펼치는 퍼포먼스로 현지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이 전시를 계기로 홍콩과 텐진, 런던, 청두에 진출했다. 여러 곳을 오가며 머문 공간은 ‘용과 여인’의 세계에 흔적처럼 남아 있다.

용과 여인. 이물적인 서로의 존재를 뒤엉키도록 감싸며 드러내는 것은 결국 ‘사랑’이다. 가장 아날로그적인 미술 도구인 ‘연필’을 고집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가장 순수한 정서를 표현하기에 적합하고 그 시절 이제 막 발을 뗀 미술학도의 초심을 되새기게 한다. 매일 10시간 이상 작업해도 훨씬 더디게 그림을 완성할 수밖에 없지만, 그 시간만큼은 순수한 예술가로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다. 붓질 인생 30년이 훌쩍 넘었지만, ‘그리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예술가는 자신이 이해한 시대를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하고 기록하는 사람이에요. 화폭에는 나에게 영향을 준 스토리나 시대를 재해석한 3차원, 4차원의 세계가 구축돼요. 대학 시절 우연히 알게 된 ‘의상대사를 흠모하다 용이 돼 그를 지킨 선묘 여인의 전설’은 그림 ‘용과 여인’으로, 코로나19 시기의 지독한 격리 경험은 주술하듯 예술가의 본능을 써 내려간 ‘문자 드로잉’으로 이어졌죠. 청룡의 해에는 어떠한 풍경들이 펼쳐질지 기대가 됩니다.”
도선인 기자 sunin.do@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