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양심 있는 일본인들의 고백 연극 ‘봉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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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전남일보]양심 있는 일본인들의 고백 연극 ‘봉선화’
금요행동 이어온 나고야시민모임
연극단, 광주 방문 세 번째 공연
빛고을시민문화관 600여석 만석
소송지원 40년간 투쟁과정 극화
정신영 할머니 등 피해자 관람도
  • 입력 : 2024. 02.25(일) 17:45
  • 도선인 기자 sunin.do@jnilbo.com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의 강제 노역·인권유린 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들이 펼쳐온 40여 년간의 투쟁 과정을 극화한 연극 ‘봉선화’가 지난 24일 빛고을시민문화관 대공연장 600여석을 가득 채운 가운데 막을 내렸다. 광주문화재단 제공
광주문화재단과 일본나고야시민연극단이 야심차게 준비한 연극 ‘봉선화’가 지난 24일 빛고을시민문화관 대공연장 600여석을 가득 채운 가운데 막을 내렸다. 연극 ‘봉선화’는 1944년 미쓰비시 중공업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로 동원되었던 근로정신대 피해 할머니들의 강제 노역·인권유린 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들이 펼쳐온 40여 년간의 투쟁 과정을 그리고 있다. 제목 봉선화는 3·1운동 다음 해인 1920년 발표된 우리나라 최초 가곡 ‘봉선화’에서 차용한 것으로 나라 잃은 슬픔을 꽃 ‘봉선화’로 은유한 곡이다.

이 연극은 지난 1998년부터 일제 강제동원 피해할머니들을 도와온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지원회’와 연극단체 ‘아이치현민의 손에 의한 평화를 바라는 연극모임’이 합작해 만든 작품이다. 창작 초연은 2003년 일본 나고야에서 첫선을 보인 뒤 2022년에 나고야공회당에서 두 번째 공연이 진행돼 1000여 명이 관람하는 등 호응을 얻었다. 이번 광주 공연은 세 번째이자 첫 해외공연으로 피해자들 출신지역에서 막을 올린 의미 있는 자리였다.

이번 공연을 위해 배우 23명, 관계자와 관객 19명 등 40명의 일본인이 광주를 방문했다. 출연진이 연극을 본업으로 하는 전문배우가 아니라 중학생부터 직장인, 퇴직자까지 나고야시의 평범한 시민들이 함께 했다는 데 그 의미가 크다. 40여 년간 근로정신대 문제를 추적하면서 투쟁의 중심에 선 인물, 지난 2017년 광주시 ‘명예시민증’을 받은 다카하시 마코토 나고야소송지원회 회장도 함께 광주를 방문, 연극 관람에 동참했다.

연극은 ‘나고야소송지원회’ 소속 회원 및 일본 시민들이 지난 2007년부터 매주 금요일 미쓰비시 중공업 앞에서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며 전개하고 있는 ‘금요행동’의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 금요행동은 나고야소송지원회가 미쓰비시 중공업을 대상으로 전개한 소송이 여러차례 기각되면서 새 활로를 모색한 결과물이었다. 일제강점기 미쓰비시의 만행을 처음 접한 일본 시민들의 물음과 소송지원단의 문답 형식, 양금덕 할머니·고 최정례 할머니 등의 사연을 재연하면서 일제 가해기업과 일본정부의 사죄 당위성을 말한다.

하지만 재판은 도쿄 최고 재판소에서 원고의 청구가 최종 기각되면서 이들은 좌절한다. 실패로 끝난 것만 같은 이들의 행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데, 피해 할머니들의 조국인 한국에서 광주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이 만들어진 것. 일본 시민들은 광주 시민들과 교류하면서 연대의 힘을 느낀다. 특히 이후 한국 법원을 통해서 손해배상 청구에 진전을 이뤄낸다.

2시간 동안 조선인 소녀들이 강제노역을 하던 중 숨죽여 부르는 ‘아리랑’에 관객들도 함께 눈시울을 붉혔고, 2018년 한국 대법원 승소판결 장면에서는 객석에서도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근로정신대 피해자의 인권유린 실태와 힘겨운 투쟁과정을 그려낸 공연이 끝나자 관객들은 일제히 기립박수로 감동과 감사함을 표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을 자행한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에서 지난 1월 최종 승소한 정신영 할머니도 연극 ‘봉선화’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정신영 할머니는 “홀어머니가 6남매를 키워 중학교도 못 갔는데, 학교를 보내준다고 해 따라갔다가 고생했다”며 “일본 사람들이 진실을 알려줘 너무나 고맙고 원이 없다”고 말했다.

일제에 강제동원됐다가 1944년 도난카이 대지진으로 사망한 최정례 할머니의 조카 며느리인 이경자 할머니도 “일본 사람들이 이렇게 훌륭한 연극을 만들어 주고 진실을 알려주는 것에 너무나 감사한 마음”이라며 “오랜 시간이 지나 우리에게도 잊히는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억해 준 것에 놀랐고 감사하다”고 전했다.

지난 24일 빛고을시민문화관 대공연장에서 연극 ‘봉선화’ 공연 후 기자회견이 진행되고 있다. 왼쪽부터 강기정 광주시장)·다카하시 마코토 나고야소송지원회 회장·나카 토시오 연출, 총감독·무토 요코(고 양금덕 役)·마츠모토 아츠히로(변호인단 사무국장 역).
나카 토시오 감독은 “첫 공연인 2003년도에는 배우로 출연했고, 연극을 통해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것에 대한 중요함을 느끼고 감독을 맡게 됐다”고 밝혔다. 봉선화 공연 중 모든 배우들이 ‘아리랑’을 유창하게 부를 수 있었던 건 일본에서 재일교포에게 직접 배우고, 연습한 결과라고 전했다.

양금덕 할머니 역할을 맡은 무토 요코 씨는 “(일본) 시민으로서 미쓰비시와 (일본)정부가 부끄럽다”며 “미쓰비시와 정부가 과거에 저질렀던 행실을 피해자들에게 정중하게 사과해야 한다는 걸 양금덕 역을 맡으며 더욱 절실하게 느꼈다.”고 전했다.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 40여명은 25일 국립5·18민주묘지 등을 방문하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내년 초 일본 도쿄에서 공연을 이어나갈 예정이다
도선인 기자 sunin.do@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