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아침을 열며·이승현>새로 쓰는 호남 의병사(義兵史), 이남(李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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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아침을 열며·이승현>새로 쓰는 호남 의병사(義兵史), 이남(李楠)
이승현 강진 백운동 원림 동주
  • 입력 : 2024. 03.06(수) 14:04
이승현 백운동 원림 동주
1555년 5월, 왜구 6~7천 명이 배를 타고 강진, 영암, 해남, 진도 등 서남해안에 쳐들어왔다. 을묘왜변(乙卯倭變) 이다.

명종 10년 5월 21일, “해남 현감 변협(邊協)이 달량(達梁)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달려가 전 무장현감 이남(李楠)과 군사 3백 명으로 싸우다 적에게 격파되어 이남(李楠)은 죽고 변협은 패배하여 겨우 몸만 빠져나왔습니다. 우도수사와 진도군수가 어란포(於蘭浦)에 와서 구원하다 역시 패하였는데, 이날 달량이 함락되었습니다. 달량이 함락된 뒤에 왜인들이 어란포에 들어와 불을 질러 남해 연안이 초토화 되어 그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명종 10년 8월 23일, “예조에서 임금께 올리길 ‘이번 호남에서 전사자나 및 피살자가 5백 10여 명에 이르니 전사한 전 현감 이남(李楠) 등 6인을 1등급으로 하여 쌀과 콩 각 5섬, 종이 20권, 젯상 각 1건을 주고 다른 전사자나 피살자들은 합동으로 위령제를 지내어 원혼을 위로하게 하되 제문과 향폐 모두 내려보내소서’ 하니 임금께서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위에서 인용된 내용은 명종실록의 기록이다.

명종실록에 기록된 이남(李楠, 1505~1555)은 해남 출신으로 광양 현감, 무장현감을 지내고 처가인 강진 금당리에서 거처하였다. 계유정난 시 단종을 지키려다 수양대군에게 형제가 죽자 멸문지화를 피하여 호남으로 이거 한 강릉 대도호부사 이영화의 손자이다.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가솔 및 향리 주민들과 거병하여 해남 달량진 전투에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남은 8명의 아들을 뒀는데 5명이 무과에 급제한 무장 집안이었다. 둘째 아들은 내금위장(왕의 경호실장)을 지냈고 셋째 아들은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내다 육진에서 순절하였다. 임금이 장례 동안 풍악을 금지하고 애통해 했다. 조카는 의주 부윤 이준으로 정유재란, 병자호란 때 참전하였고 춘신사(외교사절)로 청나라 개국 황제인 누르하치와 외교하여 조공을 줄였다. 일족인 이계정 충청 수사는 원산 앞바다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조정에 오른팔을 잃었다고 통탄했다. 같은 일족인 이항(李璜), 이순(李珣, 이숙형(李淑亨), 이원해(李元海)는 임진왜란에 선조를 호종하면서 나라를 지켜냈다.

근대에 와서 을사늑약 전후 나주, 함평, 창평 등에서 항일운동을 펼친 이 연근(李淵根)은 고막원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순절했다. 나주 공산에 항일의사 충절비가 세워져 있다. 이들 모두 원주이씨(原州李氏) 가문 출신이다. 충절과 도의가 대대로 이어지니 문필가인 조용헌 선생은 최근 조선일보 칼럼을 통해 원주이씨 가문을 ‘호남의 의병 명문가’라고 상찬(賞讚)하였다.

원주이씨 가문은 다양한 문화유산도 창달하였는데 한국의 대표 전통 정원이라 불리는 ‘백운동 원림’을 조영하였고, 한국 최초 녹차 브랜드인 ‘백운옥판차’를 탄생시킨 차의 종가이기도 하다. 이러한 충절과 풍류는 높은 정신세계의 산물로 원주이씨 가풍(家風)이자 가문이 일궈낸 독보적 문화유산들이다.

거울을 아무리 닦아도 미추(美醜)는 달아나지 않듯이 사람의 행적과 행실 또한 그렇다. 언젠가는 고스란히 드러난다. ‘티끌만 한 공덕조차도 내세우거나 묘비도 세우지 말라’는 이남(李楠)의 유지에 따라 봉분만 덩그렇게 남아 후손들은 매년 하루 술 한 잔 올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거의 오백 년이 지나서야 그의 행적을 캐내고 공적을 기리게 되었으니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3월 8일 강진읍 아트홀에서 ‘최초의병 이남(李楠) 장군’을 기리는 선양사업회가 창립되고 김덕진, 김만호, 김창수 교수의 연구물들이 발표되는 학술 세미나도 열린다. 문중원들의 열정도 높고 지역 언론과 지역민들의 관심이 크다.

이 행사는 전남도에서 추진하고 있는 ‘남도 의병 역사박물관’ 건립에서 촉발된 것이다. 남도의병 정신을 기리는 역사박물관은 2025년 하반기에 개관 예정으로 나주에 조성 중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임진왜란 중심의 의병 영역을 을묘왜변까지 확장하고 호남 최초의병 이남(李楠)을 발굴하는 등 호남의 의병사(義兵史)가 새롭게 쓰이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의병박물관이 건립 되는지 조차도 모르는 도민이 태반이다.

이남(李楠)처럼 한 가문에서만 숭모해오거나 기록도 없이 묻힌 의병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니 가문이나 연구자, 언론, 관청에서 샅샅이 찾고 선양해야 한다. 의병역사 박물관에서 보다 선제적이고 적극적으로 등재 신청과 지원 방법을 알리고, 물적, 인적 지원을 했으면 한다.

한국은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같은 강대국에 둘러싸여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대국들의 헤게모니 싸움에 휘둘리고 자칫 나라를 잃거나 전란의 화를 입을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현재도 그렇다.

죽음과 파괴가 일상이 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으로 천만 명의 난민이 이웃 나라에서 떠돌고 징병을 피해 해외로 나가버리는 젊은이들이 많아 전쟁 수행이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달량진 전투에서도 당시 전라 우수사, 광주 목사, 강진 현감은 구원요청에도 불구하고 겁을 먹고 형세만 살피다 서남해안이 함락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급박한 변란에 퇴임한 관리임에도 부귀를 버리고 스스로 전란에 뛰어든 이남(李楠) 같은 선조들은 공직자들의 귀감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는 애국과 충절의 푯대가 아닐 수 없다.

가문의 공덕을 굳이 열거한 이유는 충의 정신과 행동은 느닷없이 생기거나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문의 가풍(家風)이 되면 후대가 선대를 보고 듣고 행동하게 된다. 그래서 효자 집안에 효자가 나고 충신 집안에 충신이 나게 되는 것이다. 한 국가의 국풍(國風)도 마찬가지이다. 의병역사박물관을 세우는 목적이기도 할 것이다.

‘의병 역사박물관’ 건립을 계기로 잊히고 묻힌 의병들과 그 흔적을 찾아내어 충혼을 기리고 역사를 교훈 삼고 나라의 정기가 이어져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자손만대에 이어지길 바란다. 이것이 이남(李楠) 의 충절정신이고 우리가 이남(李楠 )을 기리고자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