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송가인의 엄마는 왜 무당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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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송가인의 엄마는 왜 무당이 되었을까
  • 입력 : 2019. 07.10(수) 13:11
  • 편집에디터

전남 진도 지산면 앵무리 소앵무 재수굿(날받이, 송순단 시댁) [2012.5.27]

나주 공산면에서 진도 지산면으로

송순단, 현재 대표적인 진도씻김굿 연행자다. 트로트 가수 송가인의 엄마로 잘 알려져 있다. 1958년 진도군 지산면 길은리(고길 마을)에서 송병수와 여금순의 첫째 딸로 태어난다. 위로는 오빠 송지군, 아래로는 두 여동생과 한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어머니는 나주 공산면에서 아버지 따라 진도로 유랑 생활을 온 어린 소녀였다. 사당패나 협률이나 그런 유파를 따라왔을 터인데, 구체적인 정황을 알기는 어렵다. 아들을 못 낳아 집안에서 쫓겨났다고도 한다. 진도에 온 후 얼마 있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린 딸만 홀로 되었다. 여차여차 고길 마을 박종필의 수양딸로 들어갔다. 호적에 박금순으로 되어있는 이유다. 지산면 소재지 마을 면장댁 식모로 들어갔다. 그동안 잘 보였던지 중매를 해줬다. 고길마을 송씨와 결혼을 했다. 첫 아들을 낳고나서 딸 송순단을 낳았다. 이후 여금순은 진도굿판에 뛰어들게 된다. 세월이 지나 큰 딸 송순단 또한 굿판에 들어간다. 남도의 씻김굿 가계들이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승계되는 이른바 세습당골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것과는 좀 달라 보인다. 하지만 진도의 유명했던 당골 이완순이 신내림을 받은 강신계열 무당이자 전통적인 이씨 세습당골이었음을 전제해보면 송순단의 어머니 여금순 또한 우연한 무당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주로부터 이어진 어떤 내력이 있지 않을까. 송순단은 문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을 보냈다. 동생들을 돌보는 일이 주 임무였다. 7살 손아래인 동생부터 3명을 어린 나이에 업어 키웠다. 첫째 딸의 임무였다. 돌봐야했던 동생들을 업고 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결국 국민학교(초등학교) 3학년 1학기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 꼴을 베어 소를 먹이고 산골짜기를 찾아 소풀을 뜯기는 일이 주요 일과였다. 열다섯 되던 해 목포로 식모살이를 떠난다. 어머니의 무업을 이으려고 그랬을까. 대를 이어 식모살이를 하게 되다니.

대를 이은 식모살이, 어머니의 죽음과 외눈봉사 아버지

열다섯 살에 시작한 식모살이는 열여덟 살까지 이어진다. 목포의 한 내과의사 집이었다. 식모살이 도중 어머니가 바다에 빠져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한다. '원창개'라는 곳이었다. 영산강과 서남 연해를 마당삼아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밀물과 썰물 즉 조금과 사리 때를 눈감고도 계산할 줄 안다. 개펄의 특징 또한 누구보다 잘 안다. 어머니 또한 그런 분이셨다. 나주는 물론 진도의 흔한 개펄들이 삶의 터전 아니었나.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을까. 참으로 이상했다. 갯고랑(개옹)에 나가 굴조개를 캐다 밀물을 미처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운명이 그만치였다고 말은 하지만 참으로 어처구니없었다. 어린나이에 식모살이를 한 돈을 모아 장례를 치렀다. 오빠는 서울에서 노동일을 하고 있었고 아버지 또한 생존해있었지만 장례 치룰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이다. 어린 동생들 데리고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외눈봉사 아버지는 날이면 날마다 술이었다. 아버지가 외눈봉사라 그랬을까. 눈을 팔아 너를 살지언정 너를 팔아 눈을 산들 그 눈 해서 무엇 하리. 심청전의 심학규가 절규하며 부른 노래가 떠오른다. 어쩌면 송순단은 또 다른 심청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살아온 얘기를 어찌 구설로 다할 수 있겠는가. 나 또한 송순단의 집과 담을 같이 쓰는 옆집에서 태어났다. 외눈봉사 송순단의 아버지와 당골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이제는 어렴풋하다. 나의 큰 이모와 여금순은 평생의 무업(巫業) 동기이자 인척이었다. 각설하고 송순단이 열아홉 되던 해, 보따리를 싸고 다시 서울로 향한다. 오빠가 칼국수집에서 일하고 있어 거처를 정할 수 있었다. 방직공장에 들어가 날마다 야근을 한다. 우리네 '언니'와 '누나'들이 경제부흥을 위해 재봉틀을 돌리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고향에 두고 온 동생들이 못미더워 고향으로 내려오기도 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생활을 반복한다. 애증의 세월이었다.

결혼식도 없는 혼인, 이어지는 일련의 죽음을 신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고향 진도로 내려와 가사를 전담하던 시절, 스물한 살 때였다. 옆 동네 놀러갔다가 앵무 마을의 스물여덟 총각 조연환씨와 눈이 맞아 결혼을 한다. 결혼식도 없는 결혼, 시댁으로 거처롤 옮긴 것뿐이었다. 혼인이랍시고 했는데 얼마 있지 않아 서울에서 칼국수집 일꾼으로 있던 오빠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한다. 식물인간 상태로 보름정도 버티다 운명했다. 혼인한 몸이라 간호 한 번 제대로 하질 못했다. 공돌이 오빠와 공순이 본인, 산업발전기 우리나라를 일으켜 세웠던 모래알 같은 존재들 아니었던가. 이것이 가슴에 못을 박는 한으로 남았다.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첫째 아이를 낳았는데 뇌막염에 걸렸다. 시댁에서는 병원보다는 굿을 하라고 졸랐다. 송순단은 병원에 가야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송순단이 무업의 길을 걷게 되는 것과는 상반된 아이러니다. 끝내 병원에 가지 못했다. 돌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애기가 죽었다. 엄마와 오빠에 이은 죽음, 애기를 가슴 깊이 묻었다. 애기의 죽음으로 시댁과의 갈등이 더욱 커졌다. 홀로 나와 일 년여 남의 집 작은방 살이를 했다. 어려운 시절이었다. 가슴에 묻힌 한들이 그랬는지 이른바 영적인 꿈들을 꾸기 시작한다. 앓기 시작한 신열은 주체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귀신들렸다고도 하고 선몽했다고도 하는, 이른바 영(靈)이 왔던 것. 처음에는 신을 떼어내기 위해 처방을 구한다. 그러나 신을 떼어내기는커녕 증상은 더욱 심화되기만 했다. 점쟁이와 살기 싫다는 남편의 강력한 반대가 계속되었다. 남편과 영적인 신(神) 중에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주위 보살들의 도움을 받아 신내림 굿을 한다. 굿을 주선한 오보살을 첫 번째 신어머니로 모시게 된다.

팔공산에서 받은 신선의 노트, 송순단은 무엇을 쓰고 있을까

신을 받기 위해서 간 곳이 대구 팔공산이다. 갓바위는 한 가지 소원을 꼭 들어준다는 바위로 이름나 있다. 곰뫼, 곰산, 꿩산이라고도 한다. 통일신라 이후 왕이 제사를 지내는 오악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 영험 많은 산에서 기도를 드렸기 때문일까. 팔공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신선으로부터 노트를 받는 꿈을 꾼다. 현몽이었다. 무당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것으로 해석을 한다. 진도로 돌아와 신을 모신다. 어머니, 오빠, 시댁 큰아버지, 명두(明斗) 등이다. 모두 불운하게 운명한 사람들, 가슴에 대못처럼 박혀있는 예컨대 정상적인 생애를 보낸 사람들이 아니다. 어린 나이에 죽은 첫째 아이를 명두 신으로 모신 것 또한 그런 연유다. 좀 나중이긴 하지만 죽음의 행렬이 이어진다. 어렸을 때 업어 키웠던 동생이 교통사고로 죽게 된 것. 외눈봉사 아버지의 죽음까지 합세하니 일련의 죽음이 연속된 형세라. 어머니를 비운에 잃은 어린 소녀 가장이 차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현몽을 통해 영하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고 찾아오는 손님들이 늘기 시작한다. 법사들과 강신들을 모아 굿을 시작한다. 진도씻김굿 조교였던 이완순씨 문하생으로 들어간다. 사제지간으로 맺어진 두 당골은 서로 굿을 알선해가며 보완적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송순단에게 오보살이 강신계의 신어머니라면 이완순은 세습무계의 신어머니다. 이완순 또한 내림굿을 받아 강신무와 세습무를 병행했던 사람이라 계보적 유사성이 많다. 왕성한 학습의욕과 능력 때문에 어눌하던 세습무의 씻김굿을 완벽하게 소화해내게 된다. 이후 이완순씨가 지병으로 급사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이완순씨의 당골판을 인수하게 된다. 이후 왕성한 활동으로 진도지역 씻김굿의 대표주자로 우뚝 서게 된다. 돌이켜본다. 송순단이 팔공산에서 받은 신선의 노트에는 무엇을 기록해가고 있을까. 그 노트는 지금 얼마만큼 채워져 있을까. 현재 딸 조은심이 송가인이라는 이름으로 일약 트로트계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송가인을 보기 위해, 그녀의 노래를 듣기 위해 연일 표가 매진된다 한다. 송순단의 남은 생애, 팔공산에서 받은 노트에 무엇을 기록해갈지 끊임없이 상고하길 바란다. 이어진 죽음들을 당차게 딛고 일어서 진도의 대표적인 당골이 되었고 송가인은 트로트계의 여왕이 되었다. 그래서다. 더불어 사는 이웃들, 하루 46명씩 자살해나가는 이 왕국을 치유하는 국가무당이자 국민가수로 길이 남기를 바란다. 거울처럼 보이지 않은가. 우리들의 어린 시절들. 갱물(바닷물) 들어오던 돌담 아래 작은 농어촌마을에서 태어나 그 숱한 죽음들 이겨내고 살아온 너와 나, 우리의 행로들. 돌담 아래 이름도 빛도 없이 피었다 지던 들꽃들 사랑했듯이, 이제는 송씨 모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그 사랑 기꺼이 나눌 수 있기를.

남도인문학팁

송순단이 무당이 된 이유에 대해

감당할 수 없는 일련의 죽음들이 송순단을 무당으로 내몰았음을 얘기했지만, 내 논고에서 밝힌 몇 가지를 부언해두고자 한다. 송순단이 경험한 가족의 연이은 죽음과 시댁과의 갈등은 신병이라는 빙의(憑依) 또는 퇴행 장치를 통해 현실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 구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년시절의 유일한 문화경험이었을 굿판의 학습과 더불어 이 죽음들은 점차로 송순단에게 현실적 부담감과 심리적 퇴행을 부채질 했을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의 익사는 주정뱅이이자 외눈봉사였던 아버지로부터의 탈출에서 그 암울한 현실로 다시 복귀하는 동기가 되었다. 심지어 손위 오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년 동안 식모살이로 저축한 자신의 자금을 통해 어머니의 장례를 치루는 현실은 이를 여실히 증명해 주고도 남는다. 결국 이 상황은 어떤 형태로든 집안에 대한 책임 있는 역할을 강요받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현실타개의 일환으로 선택했던 강신무(降神巫, 신을 받아서 무굿을 하는 무당)로의 입무(入巫)가 진도 무권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이완순을 통해 세습무로 다시 입무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굿판의 판세가 변화한다. 세습무에서 강신무로 변화하는 시대 흐름과는 대조적이다. 왜일까. 심리적 안정을 찾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더 이상 강신업(降神業)으로 도피할 이유가 없어져 버린 것. 이것은 세습계열의 씻김굿 연행만을 충실히 이행하는 결과를 설명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특히 씻김굿이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는 현실이 중요하다. 송순단의 심리적 추동과 연결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개인의 강신적 투사를 승화해 사회적 욕망을 추구하는 단계로 나아갔다고나 할까. 영적인 개인의 상속지분을 통해 진도사회의 사회적 상속의 지분을 확대해 나간 것이라고 할까. 이제 딸 송가인이 가수로 그 영역을 확장해가고 있으니, 개인에게는 사회적 욕망의 충족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죽음을 딛고 일어서 성공한 모델이라는 점에서 우리 사회로의 피드백의 질과 대중 향유의 폭을 기대 이상으로 넓혀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관련연구로 <이윤선, '도서지역 무속의 변천에 대한 연구-무당 송순단과 진도지역을 중심으로-', '남도민속연구', 2004> 이외 <이윤선, '구술진도민속음악사(1)', 이소북, 2004>있으니 참고 가능할 것이다.

전남 진도 지산면 앵무리 소앵무 재수굿(날받이, 송순단 시댁)송가인이 엄마를 도와 길닦음굿을 하는 장면 2012.5.27

전남 진도 지산면 앵무리 소앵무 재수굿(날받이, 송순단 시댁) [2012.5.27]

송순단 안당굿 장면

전남 진도 지산면 앵무리 소앵무 재수굿(날받이, 송순단 시댁), 노래하는 송가인과 친구들. [2012.5.27]

탁성으로 즉흥적인 사설을 읊어내는 송순단의 손님굿 장면, 2002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