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을 바라보고 있다. 연암 박지원은 고려시대에 지어진 의주의 통군정에서 압록강을 바라보면서《열하일기》를 시작하고 있지만, 나는 지금 강 건너 중국쪽에서 압록강을 바라보면서 시작한다. 시대의 차이는 있다지만 같은 강이다. 그러나 바라보는 연암과 나, 두 사람의 심정은 다를 것이다. 그리운 땅을 눈앞에 두고도 갈 수 없어 안타까워하는 것이 나라면, 연암은 눈 앞에 펼쳐지는 드넓은 땅을 바라보며 새로운 것과의 만남에 대한 기대감이 압도적이었을 것이다. ...... 나는 중국 쪽 호산장성에 올라 망원렌즈로 통군정을 찾아보다가 유람선을...
편집에디터2022.08.25 16:15심적암 의병 위령탑(대흥사 입구) 심적암 전투지 안내판 '남한폭도대토벌작전' 당시 체포된 호남 의병장들(윗줄 맨 왼쪽이 황두일) 심적암 현장의 우물터 황준성(黃俊聖, 1879~1910)은 대한제국 국군의 참령(參領)이었다. 국권 피탈 과정에서 이루어진 군대 해산에 반대한 후 완도와 해남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저항하다 순국한 인물이다. 참령은 계급 체계상 현재의 소령에 해당되지만, 당시는 대대장으로 3품 품계였고, 장군으로 불렸다. 지금의 소령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급 군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대한제국의 황궁과 황실을 지켰던 박승환 시위대 1연대 1대대장이 군대 해산에 반대하고 자결하였는데, 당시 계급이 참령이었다. 참령 이상으로 의병장이 된 분은 만주에서 활동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와 황준성, 두 사람뿐이다. 이동휘는 군대 해산 당시 참령으로 강화진위대...
편집에디터2022.08.24 15:14"해모수와 사통한 뒤 버림받은 유화를 이상하게 여긴 동부여의 왕 금와가 그녀를 방에 가두었는데 햇빛(日光)이 비추니 몸을 이끌어 이를 피하고 해그늘(日影)이 좇아와 비추니 받아들여 이로 인해 잉태했고 하나의 알을 낳았다." '삼국유사' 「고구려조」 주몽 탄생 기사를 김지하가 인용한 대목이다. 흰그늘이란 작명의 출처를 엿보게 해준다. 이렇게 설명한다. "햇빛(日光)과 해그늘(日影)이 분명히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병도는 각각 '햇빛'으로 번역했으니 '해그늘' 곧 흰 '그늘'의 깊고 무궁한 신화적, 신비적, 미학적 의미, 그 창조적 ...
편집에디터2022.08.18 16:56탑동마을 전경. 영랑생가 뒤편 세계모란공원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이돈삼 이 새끼, 저 새끼, 내부총질 등 비속어가 일상으로 들려온다. 정제되지 않은 저급한 언어들이 정치권에서 난무한다. 말의 품격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옛말에 '벼슬이 높은 1품은 아홉 번 생각한 다음 한마디 말을 하고, 9품은 한번 생각하고 아홉 마디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요즘 정치인들은 한번 생각하고, 아홉 마디 이상의 말을 뱉어내고 행동하는 것만 같다. 우리말을 잘 다듬어 쓴 '언어의 정원사'를 만나러 간다. 언어의 정원사는 내면의 서정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한 영랑 김윤식(1903∼1950)을 가리킨다. 목적지는 '남도답사 일번지' 전라남도 강진이다. 강진은 김종률․정권수․박미희 트리오가 부른 '영랑과 강진'의 노랫말처럼, 영랑의 글이 음악이 되어 흐르는 곳이다. 감성길로 단장된 탑동마을의 골목길...
편집에디터2022.08.18 15:46랑비앙 라다 언덕에서 바라본 풍경. 차노휘 달랏 시내에서 12km 떨어진 곳에 달랏의 지붕이라고 하는 산 두 개가 있다. 두 산은 락즈엉현에 위치한 두옹산(Núi Ông)과 바산(Núi Bà)이다. 바산은 해발 2,167m, 옹산은 해발 2,124m이다. 달랏시 중심에서 바라본 바산은 왼쪽에 있고, 옹산은 오른쪽에 있다. 이 두 산을 묶어 사람들은 랑비앙( Langbiang)이라고 부른다. 랑비앙은 꼬호족의 전설에서 끄랑(K'lang)과 호비앙(H'biang)의 이야기에 나오는 두 사람의 이름을 합성한 것이다. 랑비앙 입구 매표소 그리고 지프. 차노휘 옛날 이 산악지대는 소수민족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그 중 라트족(tộc Lát) 족장에게 '끄랑'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두옹산으로 사냥을 갔고 그곳에서 열...
편집에디터2022.08.18 15:43임실필봉농악-블로그 후니의 감성기행에서 인용 "수컷 굴뚝새는 영토를 얻게 되면 흔히 있기 마련인 침입자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음악상자 리토르넬로'를 만들어 낸다. 그러고 나서 영토 안에 직접 집을 짓는다. 심지어 12개씩이나 지을 때도 있다. 암컷이 다가오면 한 집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집 속을 들여다보는 암컷에게 들어오라고 재촉한다. 꼬리를 낮추고 노랫소리를 점차 약하게 한다.(중략) '구애'의 기능 역시 영토화되어 있다. 하지만 영토의 리토르넬로를 매혹적으로 만들기 위해 강도를 바꾸기 때문에 그 정도는 집짓기보다 덜하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이하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에 나오는 설명이다. 오래전 소리의 영토와 재영토화에 대해 소개하면서 인용해둔 대목이다. 리토르넬로에서 공명(共鳴)까지란 부제를 붙였던 이유는 지난 칼럼에서 다룬 'ᄆᆞᆷ톨로지'와 수렴 및 확장...
편집에디터2022.08.11 15:18연변의 '용정'에 있는 대성중학교 교실의 칠판에 윤동주의 '서시(序詩)가 작곡된 악보가 쓰여 있었다. 1941년 11월 20일에 쓴 이 시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유고집에 수록된 서시다 독립운동의 열혈청년은 아니었지만 진실한 자기 성찰을 바탕으로 순수하고 참다운 인간의 본성을 되새기게 함으로써 일제의 감옥에서 비운의 생을 마감했던 항일애국 시인 윤동주 오늘도 그가 그리워짐에 시로 대신한다. 윤동주의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
편집에디터2022.08.11 14:29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기념 사진 속 김재호(원안 인물) "3·1운동의 주동자는 나다. 쇠는 불에 달구고 두들길수록 더욱더 단단해진다. 얼마든지 해볼 테면 해봐라!" 광주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 김복현(金福鉉, 1890~1969)이 법정에서 한 말이다. 이후 김복현은 '철(鐵)'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되면서 김철로 불린다. 그는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되지만, 그가 꿈꾼 통일 조국의 꿈을 가슴에 묻은 채 생을 마감한다. 김철이 남긴 항일 정신은 장남 김재호(1914~1976)로 이어진다. 김재호는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 단원이 되고,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치열한 독립전사였다. 김철에서 김재호로 이어지는 항일 정신의 뿌리는 한말 나주 의병을 이끈 김철의 부친 의병장 김창곤이었다. 할아버지를 이어 아들이, 그 아들의 아들이 또 하...
편집에디터2022.08.10 16:18호텔에서 바라본 달랏 시 풍경. 차노휘 여행이라는 길 여행(旅行)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가 사는 곳을 떠나 유람을 목적으로 객지를 두루 돌아다니는 것'을 말한다. 꼭, 아름다운 경치나 이름난 장소만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일 것이고 설렁 자의가 아니더라도 '떠남'으로 인해 어떤 깨달음을 얻는 여정이기도 할 것이다. 차마고도에서 오체투지로 6,000km를 가는 여정이 있는가 하면, 전세기를 타고 미리 꽉 짜놓은 일정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해치우고 오는 여행도 있을 것이다. 극과 극의 여행 방법이지만 이 둘의 공통점은 익숙한 장소를 벗어났다는 점이다. 익숙한 장소는 '일상을 영위하는 곳'이며 '이 세상'에서 '베이스캠프' 삼아 살고 있는 곳일 것이다. 천상병은 에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편집에디터2022.08.04 17:09진분홍 배롱나무 꽃과 어우러지는 만연사. 사철 아름다운 절집이다. 이돈삼 대웅전 앞의 당간지주 사이로 본 절집 풍경. 진분홍 배롱나무 꽃과 요사채가 어우러진다 . 이돈삼 맑은 공기를 마시며 가볍게 걷는다. 어르신들은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다. 호숫가에 설치된 운동기구와 한몸이 되기도 한다. 데이트를 하는 젊은 연인들은 마냥 즐겁기만 하다. 여름 한낮도 싱그럽다. 녹음이 우거져 괜찮다. 봄날엔 벚꽃과 철쭉꽃으로 화사했던 길이다. 가을에는 울긋불긋 단풍과 노란 은행잎이 버무려진다.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에도 멋스럽다. 밤에는 별천지를 이룬다. 사방이 어두워지면 호수에서 보름달이 떠오른다. 달 속에선 토끼 두 마리가 절구방아를 찧는다. 수변도 황홀경을 선사한다. 화순 동구리 호수공원 이야기다. 평범하던 저수지가 공원으로 변신한 것은 지난 2013년부터다. 화순군이 연못분수와 ...
편집에디터2022.08.04 15:222003년 덴마크 스톡홀룸 광장, 진도강강술래. 이윤선 "너를 어쩜 좋니/ 촉촉한 코를 내 얼굴에 대고/ 폭폭폭 숨을 쉬며 자는 너를(중략)/ 내가 뭐라고/ 나 같은 게 뭐라고/ 자그마한 생 전체를 맡겨두고/ 온몸으로 말을 걸어오는 너" 이토록 다정한 연인이라니. 대체 누구이길래 몸을 던져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 맘을 던져 사랑하는 것일까? 그것도 오로지 화자 한 사람만을 말이다. 이런 사랑이라면 사람의 삶이 어떤 한순간인들 무슨 상관있으랴. 그 순간을 영원처럼 살면 되는 것을. 하지만 사람에 대한 사랑 얘기가 아니다. 한건희의 '고양이는 서른 살, 개는 세 살'(부크크)에 나오는 시다. 사람이었으면 더욱 좋을 뻔했으려나? 반려동물과의 이런 관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깊고 넓다. 식용이 일반적이었던 복날 풍습의 정서와는 격세지감이다. 급류에 휩쓸린 차 안에서, 개를 먼저 구...
편집에디터2022.08.04 15:1620세기 이후 독일 미술사에서 비운의 천재 서양 현대 사상가였던 발터 벤야민(Walter Bendix Schönflies Benjamin, 1892~1940)은 제1차 세계대전 나치 정원의 야만의 문명 속에서 '문명의 역사는 새로운 몰락의 과정이다' 이자 '과거 속에서 희망의 불꽃을 점화할 재능을 요청한다.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 것' 이라 말한다. 개인의 역사를 넘어 현대 미술사에 그 궤적을 남겼던 치욕적 과거 독일의 역사는 어쩌면 많은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현재까지 회개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자신의 작품 앞에서 이를 증명하는 현대 미술작가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1945년 독일)는 문화적 기억과 정체성의 다층적인 주제로 작업하는 것으로 잘 ...
편집에디터2022.07.31 17:10비경은 언제나 그랬다 아무에게나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고. 지리산 뱀사골 깊숙한 곳에도 숨겨진 것이 있다 실비단 폭포가 그것이다 이끼의 생생함이 더해져서 일명 이끼 폭포라고도 부른다 에서 선정한 한국의 100대 볼거리 중 하나라고 하는 걸 보면 분명 비경임에는 틀림이 없음이다 6·25전쟁 직후 빨치산들이 이 아래에 있는 단심폭포에서 맹세 서약을 하고 숨은 샛길로 반야봉 비트를 향해 오르면서 이 폭포의 가냘픈 매력에 빠져 잠시나마 현실의 고달픔을 털어낼 수 있었을까나. 그래서인지 더욱 애처로운 비경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지금은 반달가...
편집에디터2022.07.28 14:42씻김굿(이슬털이). 진도군 제공 몇주 전 조선일보 조용헌살롱에서 '씻김굿의 이슬털이는 술 만들기''는 내 이론을 다루어 주었다. 씻김굿의 핵심거리인 '이슬털이'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이 시대가 장차 씻김의 시대로 나가야 한다는 점을 상재(上梓)한 글이다. 내 오랜 주장이기도 하지만, 비로소 내 생각들이 인용되는 듯하여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감사드린다. 이 언급을 기회로 다가오는 명절 백중을 빌미 삼아, 기왕의 설을 보충해 둔다. 진도뿐 아니라 남도 전역의 씻김굿 중 가장 핵심적인 대목이기도 하고 또 이 시대가 더불어 어깨 겯고 나가야 할 덕목이라는 점을 환기한다. 누룩과 솥뚜껑을 솔가지(근래는 빗자루)로 씻는 의례 이슬털이. 이윤선 남도씻김굿 이슬털이 방법과 유교적 맥락 진도를 중심으로 하는 남도의 씻김굿은 우리나라 남도 무속의례의 대표성을 갖고 있다. 사안마다 다른 이름을 붙...
편집에디터2022.07.28 14:42매천의 초상화, 그 자체가 역사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자결한 매천 황현(黃玹, 1855~1910),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그의 얼굴만으로 충분하다. 얼굴은 그가 살아온 그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황현의 제자 김상국은 「매천 선생 묘지명」에서 황현의 외모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체구는 작으나 정갈하고, 이마는 넓어 얼굴의 삼분의 이를 차지하고, 눈은 틀어진 듯하나 번개 치듯 빛나며, 사람을 볼 때 안광이 하늘에 비치고, 수염은 용과 같이 가볍고 시원스럽게 펼쳐진 듯하였다." 김상국이 쓴 묘지명은 매천의 외모를 표현하고 있지만, 그의 정신세계를 헤아리게 해 준다. 황현의 인물 사진 두 장도 남아 전한다. 삶을 마감하기 직전인 1909년, 소공동 대한문 앞에서 해강 김규경이 운영하는 사진관 '천연당'에서 찍은 것이다. 한 장에는 테두리 오른쪽에 친필로 '매천 55세 소영(梅泉...
편집에디터2022.07.27 0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