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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기념재단, 전남도청 항공사진 필름 및 잡지 기증받아
5·18기념재단은 최근 1980년 전남도청 일원을 촬영한 희귀 항공사진 필름과 5·18 이후 해외의 인식을 살펴볼 수 있는 잡지 등을 기증받았다고 26일 밝혔다. 지난 4일 재단이 기증받은 항공사진 필름은 1980년 당시 전남도청 슬라이드 및 사진촬영 기사로 근무했던 김영주 선생이 촬영한 것이다. 이 항공사진은 1980년 당시뿐만 아니라 옛 전남도청 일원을 조명하는데 결정적인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 지난 4월22일과 4월27일 양일에 걸쳐 5·18 관련 해외잡지와 신문 스크랩 자료 등 해외기록물도 기증받았다. 기증받은 잡지는 1980년 6월2일자 뉴스위크(Newsweek)·타임지(TIME), 1980년 5월 23일부터 6월 6일자까지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아사히신문(朝日新聞) 등 43점에 이른다. 이번에 기증받은 신문 및 잡지 자료는 기증자인 음광석 선생이 오랫동안 조사하고 수집한 것이다. 해당 기록물을 통해 5·18에 대한 해외인식을 살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5월 단체, 5·18유공자법 개정안 환영
5·18유공자법 개정안 발의에 5월 단체가 환영의 뜻을 밝혔다. 해당 개정안은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가 부상을 얻은 유공자들의 범위를 확대하는게 골자다. 25일 5·18 3단체(유족회·부상자회·공로자회)는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이 대표 발의한 '5·18민주유공자예우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5·18유공자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3단체는 "일부 개정안은 기타 1급·2급의 상이등급 판정을 받은 사람을 '그 밖의 5·18민주화운동희생자'가 아닌 '5·18민주화운동부상자'에 포함함으로써 5·18민주유공자에 대한 예우를 강화하려는 것"이라며 "적극 환영하며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고 말했다.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이날 '5·18민주유공자예우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5·18유공자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 법률안은 5·18민주화운동 참가 끝에 기타 1급·2급의 상이등급 판정을 받은 사람도 장해등급을 받은 사람과 동일하게 예우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현행법의 경우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상이를 입은 사람 중 5·18보상법에 따른 장해등급 판정을 받은 사람만 5·18민주화운동부상자로 예우하고 있어,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계속 이어져 왔다.
'5·18 42주년'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가상현실로 본다
1980년 5월21일 광주항쟁의 참혹했던 상황을 가상현실(VR)을 통해 만날 수 있게 됐다. 25일 5·18기념재단에 따르면, 재단은 5·18민주화운동 42주년을 기념해 항쟁 당시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상황을 VR 영상으로 구현한다. '그날의 애국가'라는 제목으로 KBS와 공동 제작한 이번 영상에는, 1980년 5월21일 오후 1시부터 오후 5시 사이 금남로에서 자행된 계엄군의 집단 발포와 이후 시민들의 저항 등이 담겼다. 영상 제작에는 △항쟁 당시 가두방송을 진행한 차명숙씨 △항쟁의 매 순간을 촬영한 나경택 전남매일 기자 △11공수부대 63대대 소속 이 모 중사 등 3명의 증언이 활용됐다. '그날의 애국가'는 26일 오후 2시 광주 동구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특별 상영회를 통해 첫 선을 보인다. 특별 상영회에는 영상 제작을 이끈 이조훈 감독이 직접 제작 배경과 주목할 만한 순간들을 소개할 예정이다. 이 감독은 "집단 발포가 시작된 오후 1시부터 오후 5시까지를 시민, 계엄군의 증언을 통해 재구성해 완성했다. 이들의 증언을 통해 공백의 퍼즐이 맞춰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며 "당시 광주시민들의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함성과 숭고한 희생을 오감을 통해 느낄 수 있길 바란다"고 밝혔다.
80년 불타는 광주MBC 컬러 사진 첫 공개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기록했던 광주 거리를 걸으니 감격스럽습니다." 1980년 5월 당시 일본 아사히신문사 기자로서 광주 현장을 취재해 사진 자료를 남긴 고 아오이 카츠오 기자의 딸들이 광주를 방문했다. 24일 나카츠카 마리(54)씨와 아오이 유카(48)씨는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진행된 '아사히신문사 미공개 컬렉션 특별전'에 참석해 이 같은 소회를 밝혔다. 특별전에 전시된 사진들은 아오이 카츠오 기자가 아사히신문사에 사진기자로 재직하면서 1980년 5월19일부터 28일까지 10일 동안 5·18민주화운동 현장을 찍은 것들이다. 특히 이번 특별전에는 5월20일 불에 타고 있는 광주MBC 건물 컬러 사진이 최초로 공개됐다. 나카츠카 마리 씨와 아오이 유카 씨에 따르면, 아버지 아오이 카츠오 기자는 지난 2017년 세상을 떠났고, 아사히 신문사가 아오이 카츠오 기자의 사진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5·18민주화운동 사진 기록물들이 발견됐다. 아오이 카츠오 기자는 1980년 당시 회사 동료 고 사이토 타다오미 기자와 함께 기획기사 준비로 한국에서 취재활동을 하던 중, 급하게 광주로 내려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1980년 5월18일부터 29일까지 발행된 아사히신문과 6월6일자 주간 아사히 등의 잡지에는 아오이 카츠오 기자가 찍은 사진 덕분에 5·18민주화운동과 광주 상황을 설명한 여러 편의 기사가 게재될 수 있었다. 나카츠카 마리 씨와 아오이 유카 씨는 "아버지가 생전 광주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중요한 사진 자료가 나왔다는 점에서 놀랐다"며 "그날의 기록들이 42년 만에 세상에 나와 아버지가 굉장히 기뻐할 것 같다.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걸었던 광주 거리를 똑같이 거닐었는데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이번 특별전에서 공개된 사진은 총 200여 점에 달한다. 전시에서는 불타는 MBC 컬러사진, 반란군부가 동원한 계엄군이 버스에서 시민들을 끌어내려 구타하는 것을 연속으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등 5‧18민주화운동 당시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도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참여작가 2명이 아사히신문사가 소장한 5‧18민주화운동 사료를 토대로 제작한 영상, 미디아아트, 콜라주 등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의미를 담은 작품도 함께 전시한다. 이날 개막식에는 아사히신문사를 대표해 한국 특파원으로 있는 다케다 하지무 기자를 비롯해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진자료를 남긴 나경택 전 전남매일 기자, 장휘국 광주시교육감, 문영훈 광주시 행정부시장 등이 참석했다. 이와함께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5·18당시 광주에서 아오이 카츠오 기자의 통역을 도왔던 김상모 씨를 찾고 있다.
"무거운 마음 이해한다"…5·18 계엄군 끌어안은 오월어머니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투입됐던 공수부대원 3명이 42년 만에 5·18 희생자 유가족을 만나 사죄했다. 24일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에 따르면, 지난 19~20일 이틀 간 광주 동구 전일빌딩245 9층 '오월어머니 트라우마 사진전' 전시장에서 계엄군 3명이 5·18 희생자 유가족 10명을 만났다. 3공수여단 출신 김모 중사와 박모 중대장·11공수여단 출신 최모 일병을 비롯, 5·18 최초 사망자인 김경철 열사의 어머니 임근단 여사와 '오월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추혜성 대표 등 1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만남은 조사위의 계엄군에 대한 전수조사 과정에서 '피해자들을 만나 사죄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일부 계엄군의 요청으로 성사됐다. 이 자리에서 김 중사와 박 중대장은 "늦었지만 진심으로 사죄한다. 우리가 당시 너무 심했다"며 고개를 떨구며 용서를 빌었다. 이에 유가족들은 "양심선언과 증언을 하기까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겠느냐"며 눈물을 흘렸다. 임 여사는 "이제라도 찾아와 줘서 고맙다. 무참하게 죽어간 내 아들을 만나는 것 같다"며 이들을 끌어 안기도 했다. 그러면서 "계엄군들이 가지고 있는 무거운 기억과 트라우마를 이해한다"고 토닥였다. 최모 일병은 "피해자 가족이 용서해 주신 그 마음을 다른 계엄군들에게도 알려 더 많은 제보와 증언이 나올 수 있도록 설득하고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허연식 조사위 조사2과장은 "오월어머니들이 계엄군들의 사죄와 고백을 받아주고, 용서해주면 더 많은 계엄군들이 마음을 열고 증언과 제보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며 "앞으로도 이런 자리를 더 많이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음표로 그리는 오월의 기록"…'Remember 5·18'
"광주에 대한 무지함이 죄책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저의 부채의식이 'Remember 5·18'의 시작이죠." 광주에서 엔터테인먼트 '아트브레인컴퍼니'를 운영하는 조정훈 씨는 5·18민주화운동 42주년을 기념해 뮤지컬 장르의 노래 'Remember 5·18'를 공개했다. 광주시립합창단 소속 이형기 씨와 윤은주 씨의 음색은 어느새 1980년 5월 그날의 진실을 마주한다. 바로 '지워지지 말아야 할 이야기들을 노래하자'라는 한뜻으로 광주에 모인 아티스트 '가람휘락'이다. 여기서 가람휘는 '강을 담을 만큼 큰 그릇'을 뜻하고 여기에 '즐거울 락'을 더했다. 이들이 지난 18일 조정훈 씨의 개인 유튜브 페이지를 통해 공개한 Remember 5·18 뮤직비디오는 벌써 조회 수 2000회를 넘었다. "이유를 알 수 없다고 고개를 가로젓는 사람 아직 이 땅에 너무 많아. 그만 잊으라 하지 외면하라 말하지 비난하면서 조롱하듯 말하지… 그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면서." Remember 5·18의 가사 한 부분처럼 노래는 '무지'에 대한 지적으로 시작된다. 잘 모르면서 5·18민주화운동이 잊히는 것, 왜곡되는 것에 대한 경계다. 가람휘락은 노래라는 대중 장르를 통해 1980년 5월 광주에 대한 기록을 시도하고 있다. 조정훈 씨는 "19살 때 처음 광주에 왔는데, 당시 터미널에 희생자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리얼한 그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었다"며 "강원도 사람이라 5·18을 전혀 모르던 상황에서 본 사진이었는데, 그냥 광주가 이상한 동네인줄만 알았다. 뒤늦게 같은 한국 사람으로서 광주를 몰랐던 것에 대한 부채의식을 느꼈다"고 말했다. 5·18에 대한 왜곡과 폄훼가 극심한 시대, 가람휘락은 현실 고증에 중점을 뒀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의 도움을 받아 뮤직비디오 장면 역시 당시 모습들로 채운 이유기도 하다. 조 씨는 "단순하게 감정적으로 노래를 다루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당시 영상자료, 문헌자료 등을 찾아보고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며 "총소리, 바퀴 달린 장갑차 소리 등 음향까지 당시 영상을 찾아 수백 번 듣고 가장 가까운 해당 총기의 소리를 삽입했다"고 말했다. Remember 5·18에서 연달아 울리는 3번의 총소리가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는 예다. 5월20일 광주역 일대에서 집단 발포가 이뤄졌는데, 당시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이 발포 명령 및 경고를 뜻하는 권총 3발을 공중에 발사했다. 이를 드라마 메타포로 활용한 것이다. 조 씨는 또 "영화 '택시운전사'의 실제 인물 고 김사복 선생님의 아들 김승필 씨와 5·18 당시 광주시민들을 지켰던 고 안병하 치안감 가족분들과도 인연이 있는데, 이분들의 만남도 큰 계기가 돼 노래 작업을 앞두고 있다"고 말했다. 그날의 무게감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던 목소리의 주인공 이형기 씨와 윤은주 씨에게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음악의 존재 이유를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라 생각했기에 견뎌냈다. 이형기 씨는 "내가 겪지 않은 5·18을 너무 쉽게 노래하지는 않는지, 감정적으로만 다가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고민이 많았다"며 "줄거리 자체가 무게감이 느껴져 담담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윤은주 씨는 "노래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평온한 사람들의 이야기다"며 "이유 없이 죽어간 시민들에 감정이입을 하다 보니 울컥해 녹음이 중단되기도 했다"고 말했다. 한편 가람휘락은 Remember 5·18을 시작으로 매달 기억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가람휘락은 위안부 소녀들의 이야기, 3·1운동, 독도 등의 소재에서 모티브를 얻어 곡들을 차례로 공개할 예정이다.
22년 만에 막 오른 오월극의 고전 '금희의 오월'
5·18민주화운동을 주제로 한 첫 연극 '금희의 오월'이 22년 만에 무대에 올려졌다. 오월극을 전문으로 하는 지역 극단 토박이는 지난 20일과 21일 5·18기념문화센터 민주홀에서 '금희의 오월'을 공연했다. '금희의 오월'은 광주항쟁을 연극으로 형상화한 최초의 작품으로 '오월극의 고전'이라 불린다. 작품은 최후항쟁까지 옛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산화한 이정연 열사와 그의 동생 이금희가 주인공이며 이정연 열사의 가족, 대인시장 상인들의 이야기가 극화된 작품이다. 특히 계엄군이 5월21일 광주를 봉쇄하고 외곽으로 퇴진한 이후부터 시민자치가 실현돼 '해방 광주'라 불리는데, 이 기간을 표현한 6~7장의 마당극 장면은 작품의 하이라이트다. 금희의 오월은 1987~1988년 창작돼 그해 4월 제1회 전국민족극한마당에서 초연된 후, 전국 각 지역과 미국 7개 도시, 캐나다에서 공연됐다. 이처럼 5·18을 연극의 형태로 전 세계에 알렸으며 삼엄했던 1980년 후반 5·18민주화운동의 전 과정을 사실적으로 담아내 '현장 보고 성격의 리얼리즘'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80년 5월 박효선 열사을 비롯한 지역의 문화활동가들이 주축이 된 문화선전대가 기획하고 실행한 옛 전남도청 앞 분수대에 펼쳐진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 이로 인해 박효선 열사는 자칭 항쟁지도부 홍보부장이 됐다. 오월의 영원한 홍보부장 '박효선'에게, 오월극은 천명이었다. 최후항쟁 지 옛 전남도청을 지키다 빠져나와 동료들의 죽음을 겪었던 박효선 열사는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을 느꼈고 이 죄책감은 그의 작품세계를 이뤘다. 금희의 오월과 더불어 박효선 열사가 희곡을 쓰고 연출한 '모란꽃'과 '청실홍실'은 오월 삼부작이라 불린다. 모란꽃은 5·18 당시 가두방송을 했던 고 전옥주 선생을 모티브로 삼은 심리극이다. 극 중에서 5·18민주화운동에 참여, 북한 간첩 '모란꽃'으로 몰린 이현옥은 심리치료 목적으로 연극 무대에 선다. 5·18민주화운동 피해자들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밝힌 오수성 교수의 도움을 받았으며 작품이 만들어진 1993년 생소했던 '오월 트라우마' 개념을 확립시켰다. 또 투쟁의 현장을 직접 드러내기보다 치유되지 않은 후유증을 사이코 드라마 기법을 활용한 사회심리극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험성 짙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청실홍실'의 경우 들불7열사 중 한 명으로 항쟁지도부 기획부장으로 알려진 김영철 열사에 관한 이야기다. 김영철 열사는 옛 전남도청 최후항쟁에서 계엄군에 체포된 뒤 상무대로 연행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이후 광주교도소에 투옥돼 1981년 출소했지만, 오월의 굴레는 쉽사리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반복된 고문과 거짓 자백을 두려워해 시도한 자살 기도로 김영철 열사는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고 여생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청실홍실은 그의 지독한 삶이 배경이 되고 있으며 부인 이순자 여사가 넋두리처럼 내뱉는 대사가 극의 90%를 차지하는 일인극 형태다. 이외에도 5·18이 벌어진 직후 2년 여간 계속된 본인의 도피생활이 배경이 된 '그들은 잠수함을 탔다'를 쓰고 연출했으며 광주 MBC 특별기획 다큐드라마로 만들어진 '시민군 윤상원'과 5·18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 열사의 35일간의 미국 출항기 '밀항탈출'의 극본을 완성했다. 소설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를 각색해 5·18 당시 대안 언론이었던 투사회보가 만들어진 과정을 연극의 한 장면으로 재연하기도 했다. 임해정 극단 토박이 대표는 "금희의 오월은 1980년 5월 광주와 10일간의 항쟁을 전면적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강력한 생명력을 갖고 있다. 이번 공연 준비는 또 한 번 그 생명력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며 "출연하는 배역도 많고 공연 조건이 까다로워 공연을 못 했던 시간이 벌써 22년이나 됐다. 올해를 시작으로 오월극 고전이라는 명성에 누가 끼치지 않도록 공연이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금희의 오월을 연출한 박정운 연출가는 "박효선 선생님이 떠난 지도 20년이 훌쩍 넘었지만, 금희의 오월을 작업하면서 어느새 지나 가버린 시간을 되돌려 다시 한번 1980년 5월 광주 금남로에 서 있다"며 "금희의 오월은 광주 곳곳의 투쟁과 항쟁, 고통과 분노, 아픔과 상처, 학살과 죽음들, 그 속에 피어난 광주시민들의 희생과 나눔이 담긴 집합체다"고 말했다. 한편 올해 금희의 오월, 마지막 공연은 오는 27일 5·18기념문화센터 민주홀에서 치러진다. 관람료는 무료이며 예약문의는 (062-222-6280).
"5·18 당시 계엄군, 의도적 상체 조준 사격"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개최한 구술증언집담회에서 계엄군이 의도적으로 시민들의 상체를 조준 사격 했을 것이라는 의료인 증언이 나왔다. 22일 민주화운동기록관에 따르면, 지난 20일 기록관 다목적 강당에서 '하얀 가운의 오월 시민군, 의료인 현장보고' 집담회가 열렸다. 이날 구술 증언에 참여한 김성봉 당시 광주기독병원 응급실장은 1980년 5월21일 동구 금남로에서 자행된 계엄군의 집단 발포 과정에 '의도적인 상체 조준 사격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김 실장은 "석가탄신일이었던 당시 광주기독병원은 정상 운영하고 있었다"며 "점심이 지나고 약 1시께 총상을 입은 환자들이 병원으로 몰려들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총상 환자들을 면밀히 들여다보니 처음 도착한 환자들은 대부분 허벅지 아래쪽에 총상을 입은 채 병원에 실려왔다"며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날 수록 복부와 가슴, 머리에 총상을 입은 환자들이 찾아왔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는 군인들이 처음에는 훈련을 받은 대로 하체를 조준 사격하다 점점 상체를 노려 쏜 정황이다"며 "마치 짐승을 사냥한 듯한 무자비한 모습이었다"고 밝혔다. 전두환 보안사가 사후 보상 규모 축소를 위해 숨진 광주시민들을 대상으로 폭도와 비폭도로 나누는 작업을 진행했다는 증언도 이어졌다. 문형배 당시 전남대병원 병리학과 전공의는 "(1980년) 6월10일 보안사에서 연락이 와 군인 짚차를 타고 저녁께 505 보안대에 도착했다"며 "당시 나는 이곳에서 숨진 165명의 광주 시민들에 대한 폭도와 비폭도 분류 작업을 했다"고 밝혔다. 그는 "보안사는 '폭도는 죄인이고 비폭도에겐 후한 보상을 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저와 다른 민간인 대표들은 보상을 많이 받게끔 하자는 취지로 '모두가 비폭도다'고 설명했다"며 "그러나 끝내 보안사는 60여 명을 '폭도'로 규정 지었다. 현재까지도 이에 대한 보안사의 사과는 없다"고 지적했다. 홍인화 5‧18기록관장은 "42년이 흘렀지만 항쟁의 현장만큼이나 긴박했던 의료 현장 의료진의 헌신을 그동안 제대로 조명하지 못했다"며 "이번 집담회를 계기로 피의 의료 현장을 지킨 의사들의 체험을 구술증언으로 담고 기록하고 재조명하겠다"고 전했다.
42년만의 사과에 유가족들 "용서한다" 눈물
5·18민주화운동 기간 중 세상을 떠난 함평경찰서 경찰관 유가족과 가해당사자가 42년만에 마주해 화해의 시간을 가졌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19일 국립서울현충원 경찰충혼탑에서 5·18민주화운동 시위 진압 과정에서 함평경찰서 경찰관 4명이 사망한 사건과 관련 경찰 유가족과 사건 당사자가 만나 '사과와 용서, 화해와 통합'을 위한 만남의 장 행사를 개최했다. 1980년 5월 20일 야간, A씨(당시 고속버스 운전기사)는 시위대의 도청 진입을 차단하기 위해 진압대형을 갖추고 선 경찰들을 향해 고속버스를 몰고 돌진, 함평경찰서 소속 경찰 4명을 숨지게 하고 7명을 다치게 했다. 42년이 지난 현재, A씨와 유가족들은 경찰충혼탑에서 헌화·분향한 뒤 순직한 경찰들의 묘역을 찾아 참배했다. 이후 유가족과 둘러앉은 A씨는 연신 고개를 떨구며 "유족들에게 무조건적으로 미안함과 죄송함이 먼저 든다"며 "내가 지금이라도 그 현장을 꿈에서라도 한 번 봤으면 좋겠다. 뭐라 말할 수 없이 죄송하다. 막막하고 얼굴을 들 수 없다. 죄송하다"고 말했다. 경찰 유가족 대표는 "한 가정의 가장이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진압 작전 도중 시민이 운전하는 고속버스에 압사해 순직한 사건에 대해 국가는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다"면서 "오늘 당시 고속버스를 운전했던 가해자에게 사과를 받고 용서하는 자리를 갖게 돼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또한 다른 유가족은 "이번 사과와 용서의 만남이 끝이 아닌 순직한 경찰관들과 부상당한 경찰관들에 대한 치유와 명예회복이 시작됐으면 한다"며 "그 중심에 5·18조사위가 피해경찰과 함께 해달라"고 말했다. 5·18조사위 안종철 부위원장은 "이번 만남의 시간을 위해 쉽지 않은 발걸음을 해주신 유가족과 사건 당사자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며 "유가족의 심경을 충분히 헤아려 순직한 네 분과 부상당한 피해경찰관들 모두의 명예를 회복하고 유가족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도록 5·18조사위가 그 중심에서 경찰 가족과 함께하겠다. 제2, 제3의 만남이 이뤄지는 등 객관적 진상규명을 통해 국민통합에 기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5·18을 왜곡·폄훼하는 자들 기록, 역사의 증거로"
"5·18을 왜곡하는 이들의 얼굴과 만행까지도 기록할 겁니다. 훗날 그들이 역사의 심판을 받을 때 이 그림들이 하나의 '증거'가 되겠죠." 광주5·18민주화운동을 왜곡·폄훼하는 세력들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가운데,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5·18 망언자 풍자화 전시 '놈놈놈 얼굴전'을 기획한 서동환 광주아트가이드 대표가 그중 한 명이다. '놈놈놈 얼굴전'은 5·18 역사 왜곡 세력들의 얼굴을 세상에 알리고 이들의 만행을 고발하고자 지난 2020년 5월 개최된 길거리 전시다. 전시 제목 속 '놈놈놈'은 '5·18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놈, 폄훼하는 놈, 왜곡하는 놈'을 가리킨다. 당시 금남로와 민주광장 일대에는 5·18 왜곡의 대표적 인물인 지만원을 비롯해 조갑제, 변희재, 주옥순 등 왜곡·폄훼 세력들의 풍자화가 내걸렸다. 서 대표는 5·18 왜곡·폄훼가 극심해지고 유튜브에 가짜뉴스가 성행하자, '전시를 열어 시민들에게 망언자들의 얼굴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그해부터 광주민족미술인협회(광주민미협) 운영위원을 맡게 된 그는 '놈놈놈 얼굴전'의 총감독을 맡아 모든 과정을 직접 진두지휘했다. 시작은 순조롭지 않았다. 왜곡·폄훼 세력에 대한 자료가 없어 풍자화 대상을 선정하는 데 난항을 겪었다. 서 대표는 "일일이 조사하기에는 시간과 인력이 부족해 고민하던 찰나, 다행히 5·18기념재단의 협조로 왜곡·폄훼 세력의 명단을 만들 수 있었다"며 "명단에는 국회의원, 유튜버, 학자 등 각계각층의 인물이 올랐다. 그중 18명이 최종 선정됐다"고 전했다. 이후 광주민미협 회원을 대상으로 풍자화를 그릴 화가를 모집한다는 공지를 띄웠다. 신청은 한 시간 만에 마감됐다. 참여 화가들은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망언자들의 행적을 직접 조사해 그 특징에 따라 혀를 뱀으로 표현하고, 도깨비나 외계인으로 묘사하는 등 자신만의 방식으로 풍자화를 그려냈다. 그림 옆에는 그들이 저지른 몰역사적 언행을 적었다. 시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우스꽝스럽고 추악한 풍자화는 길을 지나는 시민들의 이목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시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놀이 공간을 만든 것도 전시 흥행에 한 몫했다. 서 대표는 "5·18 관련 행사가 늘 슬프고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는데, 40주년에는 그것을 극복해보고 싶었다"며 "전시회 근처에 시민 참여 공간을 만들어 망언자들을 응징하는 형태의 뱀주사위 놀이, 비석치기 등을 준비했다. 시민들이 망언자 얼굴 그림이 붙여진 비석을 치며 통쾌한 듯 웃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고 웃으며 말했다. 서대표는 5·18의 직접적 가해자뿐만 아니라, 진실을 왜곡·폄훼하고 의도적인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이들도 역사에 기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복잡한 시각과 관점 속에서 바로 규명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며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무엇이 진실인지 분명 밝혀질 것이다. 그때 잘못한 자들을 심판하고 처벌하기 위해서는 증거가 필요하고, 그게 바로 기록이다"고 말했다. 서 대표는 이어 "그런 의미에서 '놈놈놈 얼굴전'도 하나의 예술적 기록"이라고 덧붙였다. 서 대표는 앞으로도 자신만의 '기록'을 이어 나갈 예정이다. 이미 이달 7일부터 동구 5·18민주광장에서 '호명 5·18거리미술전(5월30일까지)'을 진행하고 있으며, 17일에는 청년 기획자들과 함께 양림미술관에서 오월미술제 특별전 '안녕하세요 80학번 000입니다' 전시를 개최했다. 그는 "기록도 중요하지만 처벌이 더 이상 늦어져선 안 된다. 이미 5·18 가해자들 대다수가 사망했는데, 진상규명과 처벌이 하루빨리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마흔두번째 오월, 그날의 아픔에 가슴막힌 유족들
제42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18일 국립5·18민주묘지에서 거행된 가운데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유가족을 비롯한 여러 관계자들은 먼저 간 이들을 그리워하며 묘역을 찾았다. 이들은 기념식이 끝나고도 한참을 묘역에 남아 희생자들을 추억했다. 최근 한국에서 5·18 회고록 '나의 이름은 임대운'을 출판한 푸른눈의 목격자 데이비드 돌린저 씨는 이날 가족과 다 함께 기념식에 참석했다. 돌린저 씨는 "출판기념행사로 광주에 왔는데, 온 김에 묘지를 찾아 감회가 새롭다. 묘지만 해도 벌써 5번째 방문"이라며 "그날 함께했던 광주시민들을 여기서 보니 슬픈 시간이 생생 해진다"고 말했다. 그는 1980년 당시 영암보건소에서 미국 평화봉사단 일원으로 활동하던 중 우연히 광주에 오게 되면서 외국인으로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특히 27일 최후의 항쟁 때, 옛 전남도청에서 시민군과 함께 하룻밤을 지새웠다. 미국으로 떠난 이후에도 한국인권단체 소속으로 활동하는 등 '5·18 알리기'에 노력했다. 옛 전남도청에서 최후의 항쟁을 지킨 이정연 열사의 어머니 구선악(82) 여사는 이틀동안 아들의 묘 앞을 지켰다. 구 여사는 "5·18 진상규명을 외치다 몇 년간 정부사찰을 당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장성경찰서에서 15일간 붙잡혀 있기도 하고 경찰들이 시장까지 따라와 괴롭혔다. 집 밖을 못 나가 방에서 볼일을 봤다. 이 괴로움은 광주사람들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어 "깊은 한 때문에 가슴이 콱 막혀 지금도 속옷을 못 입는다. 이 아픔을 누가 달래 주겠냐"며 "정호용, 이희성 등 살아있는 신군부 핵심들은 더 늦기 전에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상원 열사 등과 함께 시민군 활동을 하며 1980년 5월 당시 민원부장을 맡았던 정해직(71) 선생도 이날 기념식이 끝난 뒤 잠든 동료들을 찾았다. 정 선생은 "5·18 당시 행정과 장례절차를 도맡았는데, 함께 했던 동료들이 눈물겹도록 그리운 날이다"며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 투사회보를 쓴 박용준 열사, 시민군 기획부장 김영철 열사, 시민군 홍보부장 박효선 열사 등 옛 동료들 덕분에 민주주의는 더 발전을 거듭해 5·18민주화운동 42주년을 맞았다"고 말했다. 정 선생은 1980년 20대 후반의 갓 부임한 교사였는데, 계엄령이 확대된 5월18일 광주에 왔다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력을 목격하면서 시민군에 합세했다. 그는 시민군 민원부장을 맡으면서 행불자 신고를 받고 사망자를 안치하는 등 대민 업무를 처리했다. 27일 최후의 항쟁 이후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가 수모를 겪었으며 이 일로 징역을 선고받아 해직되기도 했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배우 김상경이 연기한 강민우 역의 모티브가 된 김복만 열사의 경우 두 아들이 중년의 모습으로 아버지를 찾았다. 1980년 택시기사였던 김복만 열사는 개인 차량을 통해 5·18민주화운동 부상자를 병원으로 이송했으며 도청 앞 집단발포 과정에서 희생됐다. 첫째 아들은 세살, 둘째 아들은 갓 태어났을 때였는데, 독재나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몰랐던 아이는 어느새 아버지의 나이를 뛰어넘었다. 첫째 아들 김일석(45) 씨와 둘째 아들 김준석(43) 씨는 "어머니가 지난 2010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아버지와 함께 합장해 모시고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먼저 보내고 오월어머니집 활동을 하며 평생 5·18을 위해 힘 썼다"며 "그동안 5·18을 폄훼하고 왜곡하는 말들로 인해 참 답답했다. 대통령이 기념식에 참석한 오늘 이후 소모적 논쟁을 끝내고 국민통합의 길로 나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양창근, 김광복 열사의 뒤바뀐 장지로 인한 유족들의 특별한 인연도 화제를 모았다. 양창근 열사는 신묘역에 자리가 마련돼 있었는데, 올해 초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 결과, 실제 장지는 무명묘지에 잠들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양창근 열사 자리에 있던 장지는 김광복 열사였다는 것이 조사위의 결과였다. 김광복 열사의 형 김사익(70) 씨는 "지금까지 동생이 행방불명자 묘에 잠들어 있는줄 알았는데, 최근 조사위를 통해 양창근 열사 자리에 우리 동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아직 장지 이전은 하지 않았는데, 양창근 열사 가족들과 참 특별한 인연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양창근 열사의 형 양중근(64) 씨도 "최근에서야 이 사실을 알게 돼 오늘 함께 이 자리에서 두 열사에 인사를 하고 있다"며 "그냥 인연이 아니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1월 세상을 떠난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인 고 배은심 여사는 남편 이병섭 씨와 구묘역 8묘원에 나란히 잠들어 올해 첫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을 맞이했다. 구묘역 3묘원에 잠들어 있는 아들의 묘에서 1㎞ 떨어져 있는 배 여사의 묘역에도 그를 기리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8월, 5·18 유공자 800여명 국가상대 882억 손배소
오는 8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공자 등 800여명이 국가를 상대로 정신적 피해 배상 청구한 소송 첫 재판이 열린다. 역대 5·18 관련 소송 중 최다 인원이 참여할 것으로 예측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18일 서울중앙지법에 따르면 민사합의46부(부장판사 이원석)는 5·18 민주화운동 유공자 및 가족 859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882억원대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의 1차 변론기일을 오는 8월17일에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앞서 5.18구속부상자회 등 5·18 유공자와 가족들은 지난해 11월26일 국가를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는 5·18 유공자의 국가배상 청구권이 인정된 이후 최다 인원이 참여한 소송이다. 해당 소송은 5·18 유공자들이 국가보상금을 받았더라도, 국가를 상대로 정신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는 헌법재판소 판단이 나오면서 제기됐다. 앞서 국가보상금을 받은 유공자들은 지난 2018년 광주지법에 국가를 상대로 한 별건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이 과정에서 5·18 보상법의 조항이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헌법재판소는 이에 따라 옛 광주민주화운동보상법 16조 2항을 두고 제청된 위헌법률심판 사건에서 지난해 5월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당시 헌재는 "정신적 손해와 무관한 보상금 등을 지급한 다음 배상 청구마저 금지하는 것은 공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위헌 취지를 밝혔다. 대법 역시 이러한 헌재의 위헌 결정을 근거로 유공자들이 민주화운동 보상금을 받았더라도 국가를 상대로 정신적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과거사 청산, 한계 극복해서 나아가야"
5·18민주화운동 42주년을 맞이해 국가폭력의 진상규명과 올바른 과거사 청산, 연대를 위한 기념토론회가 개최됐다. 5·18민중항쟁기념행사위원회는 18일 오후 2시 광주YMCA 백제실에서 "과거사 청산의 법적·제도적 한계와 '기역연대'의 가능성"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는 안진 전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좌장을 맡고 이재승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화위) 상임위원과 주철희 여·순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소위원장이 각각 '진실규명과 이행기 정의', '여순항쟁 특별법 통과의 의의와 과제'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이 위원은 "한국에서 과거청산작업은 구체제와의 단절이나 새로운 민주혁명에 기반한 것이 아닌 정치적 타협공간에서 만들어지면서 내부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또한 군정-독재-전쟁-권위주의 통치가 장기가 이어지면서 과거청산이 계속 지연됐고 진실규명의 핵심인 증거확보가 갈수록 어려워졌다"고 지적했다. 이어 두 번째 발제를 맡은 주 위원장은 "여순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여순사건이 이데올로기적 갈등에서 벗어나 대한민국의 역사로서 인식 전환의 계기를 마련한 데에 의의가 있다"며 "제주4·3위원회가 발표한 진상조사에서 미흡했던 역사적 평가, 진화위의 권고가 이행되지 않는 국내 현실 등을 교훈 삼아 여순위원회 또한 이러한 시행착오를 최대한 줄여나가야 할 것이다"고 전했다. 이어진 지정토론 시간에는 양정심 제주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 차성환 전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 박진우 5·18기념재단 연구실장, 이형숙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단체연대회의 진상규명특위 부위원장이 차례로 발언했다. 토론회에서는 국가폭력의 진실을 규명하고 피해를 회복하는 기관이나 재단의 안정성을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과 피해 당사자들과 광범위한 시민사회단체 나아가서 국가 간의 기억연대가 점차 확대되야 한다는 주장이 오고 갔다.
"광주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 잊지 못할 그날
"광주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나와주십시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1980년 5월, 21살의 박영순 씨는 유아교육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자 전남여고 학생들에게 가야금을 가르치는 강사였다. 계엄령 선포에도 불구하고 가야금 강의를 소홀히 할 수 없었던 그는 학생들을 학교로 불렀다. "선생님 오늘 차가 끊긴대요. 집에 일찍 가야 할 것 같아요." 학생들의 말에 박씨는 일찍 수업을 마치고, 혼자 학교에 남아 가야금을 손질했다. 오후 2시께 가야금 손질을 마친 그는 집에 가기 위해 금남로 거리로 향했다. '다다다다' 갑자기 총소리가 빗발쳤다. 주위를 둘러보니 한 남학생이 다리에 총을 맞아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박씨는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순간 얼어 움직이지 못했다. 잠시 뒤 전남도청에서 시민들의 비명 같은 함성이 들렸고, 시민들을 향한 계엄군의 집단 사격이 이어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박씨는 두려움에 떨며 집으로 가는 걸음을 서둘렀다. 그때, 박씨 앞에 트럭 한 대가 멈춰 섰다. "학생!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어! 우리가 방송해서 시민들에게 알려야 해!" 박씨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트럭 위에 올라섰다. "광주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나와주십시오.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박씨는 전남도청 근처에서 세 시간을 내리 소리쳤다. 방송을 듣고 나온 광주 시민 수만 명이 금남로를 에워쌌다. 1980년 5월 21일, 박씨의 첫 가두방송은 그렇게 거리에 울려 퍼졌다. 18일 오전 10시 광주여성가족재단 은새암에서 열린 '오월여성제'에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마지막 가두방송을 했던 박씨(63)가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박씨는 참혹했던 광주의 그날을 회상하며 가슴속에 묻어둔 이야기를 풀어냈다. 박씨의 가두방송은 6일 동안 지속됐다. 오전 9시부터 해가 질 때까지 방송하며 오로지 시민들이 차에 넣어준 물, 계란, 빵 등으로 버텼다. 같이 거리를 누비던 가두방송 차들은 선두에 섰던 전옥주 씨가 간첩으로 몰려 체포되자 점차 모습을 감췄다. 박씨는 마지막 방송을 다짐하며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늦은 밤까지 시민 참여를 독려했다. 방송이 끝난 후 다시 전남도청으로 향한 박씨는 어린 여학생 한 명을 만났다. 여학생은 오빠를 찾으러 왔다 도청을 빠져나가지 못했다고 했다. "언니, 새벽에 계엄군이 여기로 쳐들어온대요. 저 좀 집에 데려다주면 안돼요?" 여학생은 울먹이며 애원했다. 그러나 트럭은 순찰을 위해 이미 도청을 떠나 있었다. 박씨는 여학생과 도청에 남아있기를 결심했다. "내일 아침에 꼭 데려다줄게." 박씨는 여학생과 방송실에 숨어 해가 뜨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곧 계엄군이 도청을 둘러싸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도청항쟁지도부 총위원장이었던 김종배 씨가 찾아와 박씨에게 마지막 방송을 부탁했다. 박씨는 죽음을 각오하고 마지막 방송을 켰다.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울부짖는 여성의 목소리가 15분간 광주 시내 전역에 울려 퍼졌다. 방송이 끝나자 도청의 모든 불이 꺼졌고,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이어졌다. 방송실 앞에 총을 들고 선 계엄군에게 박씨는 소리쳤다. "살려주세요. 여기 어린 여학생이 있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계엄군은 '기어 나오라'고 명령했다. 여학생의 손을 잡고 엎드린 채 기어 나온 박씨에게 계엄군은 군홧발을 휘둘렀다. 머리를 수차례 가격당한 박씨는 정신을 잃었다. 이후는 구타와 고문의 연속이었다. 박씨는 계엄법 위반, 내란 등의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6개월 만에 석방됐지만, 이미 외부에서 5·18은 '폭도'라고 규명돼 있었다. 가야금을 가르쳤던 학생, 친한 친구 모두 박씨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수십 년을 혼자 침묵 속에서 살아야 했다. 박씨는 그날을 지우기 위해 타지로 거주지를 옮겨 '박수현'이라는 가명으로 살다, 2015년 6월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고 나서야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날처럼 마이크를 잡고 5·18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힘쓰고 있다. 박씨는 증언을 마치고 "우리가 진실을 밝혀내길 포기했다면 '광주사태'로 끝났을 5·18이 '민중항쟁'으로 남을 수 있어 기쁘다. 오늘날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민주주의'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걸 기억했으면 한다"고 바람을 전했다. 한편, 이날 행사에는 전국의 여성활동가 30여 명이 참석해 5·18의 아픔을 공감하고 함께 위로를 나눴다.
"아따, 3년만에 다시 하니 겁나게 좋소!"
"무려 3년만이네요. 많은 시민들이 함께 모여 '광주 정신'을 되새길 수 있어 뜻 깊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 제42주년을 하루 앞둔 17일, 광주 동구 금남로 일원에서 열린 '오월 진실의 힘으로 시대의 빛으로'라는 주제로 열린 5·18전야제가 오후 9시30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코로나19 대확산 이후 3년 만에 인원 제한 없이 치러지면서, 유가족·시민, 정계 인사 등 주최 추산 5000여 명이 그날을 함께 되새겼다. ●총 3부로 이어진 전야제 오후 7시30분부터 시작된 이날 전야제는 △1부 다시, 오월 △2부 진실의 힘으로 △3부 시대의 빛으로 등으로 진행됐다. 행사 진행은 시사풍자 연극인 지정남씨와 백금렬 전교조 교사가 맡았다. 선두에 풍물패를 세운 시민들은 수창초교부터 금남로 거리까지 '민주대행진' 퍼레이드를 열었고, 오후 7시 전야제 1부 행사가 시작됐다. 1부 무대는 연극 공연으로 시작했다. 리어카에 '계엄령을 해제하라'를 적은 아주머니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는 80년 당시 "전두환은 물러가라"라는 가사로 불렸던 이른 바 '훌라송'을 "오월 진실 밝혀내라 훌라훌라"로 개사해 불렀다. 시민들도 함께 큰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했다. 2부는 80년 당시 남편이나 자식을 잃은 '오월 어머니'들의 노래로 시작했다. 뒤이어 김원중과 느티나무 밴드의 '직녀에게' 연주가 이어졌다. 3부는 한국 역사 속 민주화의 연결 고리를 완성하자는 의미를 담아 미래 세대에게 넘겨진 5·18 과제를 묘사한 공연들이 펼쳐졌다. 오월의 댄스와 어린이합창단의 노래로 구성했다. ●"이제야 광주 오월 같네요" 전야제 무대를 관람한 김모(29) 씨는 "대학생때부터 전야제를 한 번씩 오곤 했는데, 코로나19 이후 다시 와보니 감회가 새롭다"며 "불과 42년전만 하더라도 이 곳에서 전쟁같은 상황이 벌어졌다는게 믿기지않는다. 아직 밝혀지지 못한 진실들이 많지만, 분명한 것은 광주시민들은 당시 하나가 되어 움직였다는 것"이라고 생각을 전했다. 초등학생 자녀들과 함께 풍물놀이 행진을 보던 이현(37) 씨는 "아이들에게 5·18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어 같이 데리고 나왔다"며 "코로나 이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이제야 '광주의 오월' 같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I LOVE 광주'가 적힌 파란 마스크를 쓰고 이곳을 찾은 이학기(63) 씨는 "5·18을 겪었던 사람으로서, 님을 위한 행진곡의 의미가 굉장히 깊다"며 "그러나 코로나로 그동안 (5·18행사가) 열리지 않아 부를 기회가 많이 없었지 않나. 정권이 바뀐 뒤 다시 맞이한 5·18전야제에서 수 많은 사람들과 함께 부르니 기분이 남달랐다"고 소회를 밝혔다. ●생생한 역사 교육의 현장 전야제는 청소년들에게 생생한 역사 교육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학생들과 함께 전야제에 참여한 지혜학교 교사 최지은(29) 씨는 "수업이 끝났음에도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전야제에 오고 싶다고 말해 같이 왔다"며 "오늘 전야제를 보니 아이들이 교과서에서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을 밝혔다. 함께 있던 지혜학교 학생 황지율(15) 군은 "이 거리에서 5·18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앞으로는 (이 거리에) 즐거운 일들만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장애인, 정치인 모두 한자리에 전국여성단체연합과 장애인차별연대, 세월호상주모임, 리멤버 0416 등 시민·사회단체들도 금남로를 찾았다. 박경석 장애인차별철폐연대표는 "지난 42년 전 이곳에서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 있었다. 그 덕분에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다"며 "그러나 오늘날 장애인들의 민주주의 발전은 너무 더디다. 그래서 오늘, 장애인들의 이동권·교육권을 호소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고 말했다. 한편, 전야제에는 더불어민주당 대권 주자였던 이재명 총괄선대위원장과 민주당 이형석 국회의원, 정의당 강은미 국회의원, 무소속 민형배 국회의원, 민주당 강기정 광주시장 후보, 국민의힘 주기환 광주시장 후보, 장휘국 광주시교육감 등 여·야 인사들도 참석했다.
3년 만에 정상화… "민주주의 축제 전야제가 돌아왔다"
제42주년 5·18민중항쟁기념행사 전야제가 17일 화려한 막을 올렸다. 코로나19 유행 이후 3년 만에 모든 무대가 정상화됐다. 여러 시민 사회단체들의 퍼레이드 및 문화예술 체험 행사가 동시에 진행되는 '오월시민난장' 프로그램 운영으로 이날 오전부터 금남로는 인파로 북적였다. 오후 6시 이후 전야제 본무대가 시작되면서 분위기는 더 달아올랐다. 이번 전야제 본무대는 3부로 나눠서 진행됐으며 △1부 문화예술단체들의 투쟁현장 재현 총체극 △2부 광주시민들의 오늘의발언 △3부 어린이, 청년, 어머니 등 다양한 노래그룹 무대 등으로 구성됐다. 시작은 5월 전야제의 전통인 '민주평화대행진'이었다. 1980년 5월18일 계엄령 선포에 맞서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시작된 가두 행진 투쟁을 재현한 행사다. 올해의 경우 전국 각지의 시민, 청년, 노동자의 폭넓은 참여를 통한 오월 정신 계승·추모에 초점을 맞췄다. 대행진 참가자 3000여명은 오월 원혼을 위로하는 풍물패와 함께 오후 5시 45분부터 수창초등학교에서 금남공원을 거쳐 금남로 전일빌딩245 앞 주무대까지 1.6㎞를 행진했다. 참가자들은 5·18의 완전한 진상 규명과 헌법 전문 수록을 촉구하는데 한 목소리를 냈다. 행진이 끝나자 본무대에서 전야제가 시작됐다. 1부에서는 극단 토박이와 바람꽃, 놀이패 신명, 아카펠라 그룹 아카시아, 창작극단 구강구산, 민족춤협회 광주지회 등이 42년 전 광주 시민들이 벌였던 열흘 간의 항쟁을 극으로 표현했다. 특히 횃불 행진, 넋전, 탈짓, 깃발춤, 총춤, 꽃춤 등 다양한 퍼포먼스를 통해 숭고한 항쟁의 순간들을 그려냈다. 극의 절정에 이르러서는 도청 사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시민군과 광주시민들의 처절한 울음 등이 울려 퍼져 관객들을 숙연케 했다. '5월 광주의 한은 풀리지 않았다',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월의 투쟁은 계속 된다' 등의 메시지도 전했다. 전야제 2부에서는 도청 사수 끝에 장렬히 산화한 자식들을 기리는 오월어머니들의 노래가 막을 열었다. 자식 잃은 오월 어머니 15명이 풀리지 못한 한과 울분, 처연함과 비통함을 승화시키는 노래 '5·18 어매'를 합창했다. 광주노래일꾼연합 등이 무대로 올라,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을 불렀으며 각계각층의 시민대표들이 완전한 진상 규명, 항쟁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 등에 뜻을 모아 발언했다. 3부에선 한국 역사 속 민주화의 연결 고리를 완성하자는 의미를 담아 미래 세대에게 넘겨진 5·18 과제를 묘사한 공연들이 펼쳐졌다. 이외에도 락밴드 블랙홀, 국악밴드 고래야, 전문연희그룹 자타공인 등이 무대를 꾸몄다. 남유진 5·18민중항쟁 전야제 총감독은 "다시 항생의 중심지 금남로, '오월 진실의 힘으로, 시대의 빛으로' 5·18전야제 불을 밝힌다"며 "민주, 인권, 평화 등의 키워드와 함께 1980년 도청사수 최후의 밤, 90년대 오월투쟁 광장집회를 재현하고자 했다. 이곳 전야제에서 오월의 진군하는 역사는 계속될 것이다"고 말했다.
"하얀 가운의 오월시민군" 5·18 의료인 증언대회 열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때 부상당한 시민 등을 헌신적으로 돌본 의료인들의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공유하는 의미 있는 자리가 열린다. 17일 5·18기록관에 따르면 오는 20일 기록관 내에서 5·18 의료인활동 구술증언집담회를 가질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번에 열리는 집담회는 인문연구원 동고송과 광주시의사협회가 5·18기록관과 함께 5·18 의료인 활동을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됐다. 광주시의사협회를 비롯한 50여 의료단체가 참여해 눈길을 끌고 있다. 이날 집담회에는 당시 김성봉 광주기독병원 응급실장, 문형배 전남대 의대 교수, 김영진 전 전남대병원장, 손민자 전대병원 간호감독, 안성례 광주기독병원 간호감독, 오경자 조선대 간호부장 등이 발제자로 참여한다. 집담회를 공동기획한 황광우 동고송 상임이사는 "도청과 금남로 등이 5·18항쟁의 무대였다면, 부상환자를 구호하기 위해 발로 뛴 병원은 또 하나의 대동세상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피 흘리며 병원으로 실려온 환자들을 살리기 위해 응급 수술을 하고 몸에 박힌 탄환을 꺼내고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 환자들을 하나라도 살리기 위해 발버둥친 의료진들의 헌신적 노력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홍인화 5·18기록관장은 "42년이 흘렀지만, 항쟁의 현장 만큼이나 긴박했던 현장 의료진의 헌신을 그동안 제대로 조명하지 못했다"며 "이번 집담회를 계기로 피로 물든 의료현장을 지킨 의사들의 체험을 구술증언으로 담고 기록하고 재조명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5·18기록관은 앞으로 보다 많은 의료인의 체험과 활동을 조명하는 집담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할 예정이다.
"오월 주먹밥 다시 나눌수 있어 감회가 새롭네요"
코로나19로 인해 열리지 못했던 오월시민난장이 3년만에 광주에서 부활했다. 다양한 문화적 체험, 교육을 바탕으로 시민들과 단체들이 펼치는 오월 행사 개최 소식에 금남로 일대는 들썩이는 모습이었다. 17일 오후 1시부터 시작된 오월시민난장은 시작부터 수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차량이 통제된 금남로 일대는 여러 시민단체들의 체험과 행사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었다. 오랜만의 오월 행사여서인지 시민들은 축제처럼 즐기는 표정을 지었다. 가장 사람이 많이 몰린 행사는 오월어머니집의 주먹밥 나눔이었다. 주먹밥 나눔 부스를 운영하는 오월어머니들은 오랜만에 열린 행사에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어머니들의 주먹밥을 기억하는 시민들의 반가운 발걸음도 끊이지 않았다. 시민들은 종이컵에 담긴 따뜻한 주먹밥을 챙기며 오월어머니들을 향해 "감사합니다"라며 환하게 웃었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오월어머니 백홍남(70) 씨는 "세월이 흘러 잊힌 줄로만 알았는데, 다시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백씨는 "3년 만에 열린 행사라 감회가 새롭다. 옛날과 달리 사람들이 이제 '주먹밥'의 의미에 대해 많이 아는 것 같다. 5·18 당시 어머니들이 힘들고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시민군들에게 직접 만들어 나눠주던 주먹밥의 의미가 영원히 잊혀 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계엄군의 유혈 진압으로 수많은 부상자들에게 수혈을 했던 광주적십자병원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자 헌혈의집도 오월시민난장에 자리를 잡았다. 헌혈의집 관계자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쓰러져가는 시민군을 살린 광주 사람들의 헌혈의 의미를 알리며 헌혈 동참을 유도하는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며 "특히 코로나로 인해 얼어붙었던 금남로가 이번 오월시민난장으로 다시 활기를 되찾은 것 같다"고 전했다. 문화예술인들의 참여도 이뤄졌다. 시민난장 무대에서는 마당극이나 연극 등의 화려한 퍼포먼스가 계속 이어졌다. 서울 대학로에서 20년 넘게 버스킹 공연을 하는 윤효상(56) 씨는 "서울에서 오랜 기간동안 공연을 해왔는데 뜻깊게도 5·18을 맞이해 광주에서도 무대에 설 수 있어서 기쁘다"며 "코로나로 인해 닫혀있던 공연 무대가 하나 둘씩 열려서 숨통이 트인 기분이다. 음악인들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좋은 날이다"고 설명했다. 이번 행사에는 광주공예체험 미드미 공방이 아이들을 위해 5·18의 상징물을 블록공예로 만드는 부스를 운영하기도 했다. 장미라 미드미 공방 대표는 오월시민난장에 아이들 체험 부스가 마련된 것은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장 씨는 "수많은 부스 중 아이들을 위한 곳이 없는 것을 보고 부스 신청을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5·18을 모르는 아이들이 놀이를 통해 쉽게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부스를 지나는 아이들은 그 앞을 서성거리며 블록에 관심을 보였다. 부스에서 블록공예 체험을 하던 어린이 김모(10)군은 "몇 년 전에도 (5·18 행사에) 왔었다. 그때보다 훨씬 다양한 체험들이 많이 생긴 것 같다. 블록 만들기도 너무 재밌다"며 자신이 만든 주먹밥 블록공예를 들어 보였다. 이밖에도 세월호시민상주광주모임, 국제이주문화연구소 등 민주화와 인권 신장을 위한 시민단체의 참여로 더욱 풍성한 오월시민난장이 진행됐다. 오월시민난장은 여러 시민 사회단체들의 퍼레이드 및 문화예술 체험 행사가 동시에 진행되며 2019년 마지막으로 열렸다. 이날 오월시민난장 이외에도 '오월풍물굿', '민주평화대행진', '전야제' 등이 진행돼 민주주의 축제의 장이 열렸다.
"5·18 광주 진압 가해자 '인명사전' 만들자"
42년 전 5·18 광주 진압 가해자들의 '인명사전'을 제작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할 기준을 세우는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가해자의 만행을 적극 알려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이는 지난해 전두환·노태우 씨가 광주 학살의 진실을 끝내 밝히지 않은 채 사망하면서 이대로 두면 가해자들의 만행이 조용히 묻혀버릴 것이라는 우려에서부터 출발했다. 지난해 10월26일 노태우 씨 사망에 이어 같은 해 11월23일 전두환 씨도 사망했다. 두 사람은 12·12 쿠데타 과정에서 내란죄·내란목적살인죄 혐의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았지만 결국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책임은 묻지 못했다. 죽는 순간까지도 참회나 사과 등 의 뉘우침조차 없었다. 더욱이 두 사람을 포함한 신군부 세력 14명 가운데 현재 6명이 죽고, 8명만 남았다. 살아있는 이들 또한 고령이어서 언제 사망할 지 모르는 상황이다. 전씨가 사망한 지난해 11월 광주시공공기관협의회는 "광주학살의 철저한 진실규명을 위해 우리도 함께 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며 5월 학살 주범과 잔당, 부역자들의 인명사전을 제작하자고 제언했다. 협의회는 성명을 통해 "공범 노태우에 이어 주범 전두환까지 죽었지만 잔당들은 아직 많이 남아있다. 더 이상 손을 놓고 있다가는 그들 역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다. 친일파를 단죄하는 '친일인명사전'처럼 5·18 광주학살의 공범과 잔당, 부역자들의 인명사전을 만들어 끝까지 진실을 밝히고 단죄해야 할 것"이라고 호소했다. 5·18민주화운동은 발생 직후 42년동안 광주시민들에게 분노와 서러움으로 남아왔다. 그것은 뿌리에 뿌리를 내려 광주는 지금도 그날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런 감정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억울한 죽음에 대한 분노, 국민을 지켜야할 국가로부터 받은 배신감 등을 호소하는 것을 넘어 이제는 역사적 관점에서 정리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18년간 반민족행위자들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해 국민들에게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또한 이러한 배경에서 시작됐다. 김순흥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장은 "일제로부터 독립한 후 세월이 흐르면서 아직까지 남아있는 반민족행위의 잔재나 흔적들을 알리고,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작업물로서 친일인명사전을 집대성한 것"이라며 "인명사전을 발표한 이후 민족문제연구소의 또 다른 과제는 반민주 및 독재자들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5·18 가해자들의 행적도 알려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김 지부장은 "1995년 처음으로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이전까지는 주범자들에 대한 분노와 열사들의 추모 의식이 뜨겁게 달아오른 시기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는 이를 역사적으로 그리고 학문적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며 "학살 주범자들이 점차 나이 들고 사망하면서 사라져가는 가운데 이러한 역사적 기록 작업은 빨리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냐는 것이다. 5·18 당시 시민들에게 발포를 지시한 군 수뇌부들의 진실은 점차 밝혀지고 있으나 지시에 어쩔 수 없이 따라야했던 말단 병사나 경찰들의 이름도 올려야 할까라는 고민이 나올 수밖에 없다. 김 지부장은 "친일인명사전을 만들 때에도 기준을 세우는 게 가장 어려웠다. 생계를 위한 행위를 친일로 봐야하는가 등 세세한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데 많은 논의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사전작업의 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5·18 학살 책임자 전·노 죽고 누가 남았나
지난해 5·18민주화운동 당시 유혈 진압의 진실과 학살에 대한 사과 없이 사망한 노태우와 전두환 씨. 이들의 죽음 이후 그날의 비극을 책임 질 사람은 몇 남지 않은 상황에서 당시 핵심 관계자였던 이들에 대한 행방 및 조사 근황이 주목받고 있다.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하고 5·18 광주 학살을 벌인 신군부 핵심 5인(전두환, 노태우, 이희성, 황영시, 정호용) 중 남은 사람은 2명이다. 지난해 10월26일 노태우, 같은 해 11월23일 전두환에 이어 해를 바꿔 지난 4월23일 황영시가 사망했다. 5명 중 이희성 5·18 당시 계엄사령관과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만이 살아있다. 이희성은 당시 계엄사령관으로 군 명령 공식 체계 내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다. 물론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상 최고 지휘권자는 전두환 씨였다. 하지만 이씨는 여러 미디어를 통해 전씨의 월권행위를 부인하며 오히려 광주 학살사태와 전씨는 무관하다는 등의 발언을 해왔다. 그는 줄곧 광주 진압은 자위권 천명으로 인한 것이라고 주장해오고 있다. 전두환, 노태우와 육사 동기인 정호용 당시 특전사령관은 군내 사조직 '하나회'의 주요 멤버였고 12·12 군사반란부터 5·18민주화운동 등의 핵심 책임자다. 지난해 5월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조사위)에 자진해 조사를 신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씨와 노씨의 죽음 이후 입장을 바꿔 미국으로 떠났다. 조사위에 따르면 "정씨의 경우 지난해 미국으로 출국하면서 대면조사를 진행하지 못했다. 현재 한국으로 다시 들어온 것으로 보여 이른 시일 내 대면조사를 진행할 예정"이라면서도 "명령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없었고 군수지원만 조달했다는 것이 정씨의 주된 입장이다"고 전했다. 이들 5명의 핵심 멤버 이외에도 1997년 문민정부 당시 내란죄 및 반란죄 수괴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신군부 세력 9명 중 생존자는 6명이다. 이중 최세창 당시 제3공수여단장은 5·18 민주화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실탄 배부와 사용을 지시하는 등의 행적이 알려져 유혈 진압에도 일조한 가담자로 꼽힌다. 최근 조사위의 보고서를 통해 5월20일 광주역 현장에 나와 권총 3발을 공중에 발사하는 등의 현장 지휘를 했다는 진술이 공개됐다. 또한 조사위는 "최씨가 무전으로 발포승인을 요청했다는 무전병의 진술을 바탕으로 현장지휘관의 독자적 판단에 의한 발포가 아니라 별도의 명령계통에 의해 광주역 집단발포가 있었는지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최씨 이외의 다른 이들은 건강 이상과 조사 거부로 더이상의 진척이 없는 상태다. 이들이 입을 열지 않는한 진상규명은 계속 제자리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신군부 핵심 5인 중 대면 조사가 이뤄진 경우는 이희성과 사망한 황영시 뿐이다. 정호용은 개인적으로 조사신청서까지 제출했지만, 중요한 증언은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다. 조사위 대외협력과 관계자는 "주요 고위 책임자들의 전반적인 증언이 1995년 검찰 조사와 내용이 유사하고 조사 대상자들의 노령화와 진술 거부 등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희송 전남대 5·18 연구소 교수는 "5·18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가담자들이 점차 고령화되면서 건강 문제로 인해 진실규명에 어려움이 커진다. 조사위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기존에 군 수뇌부들을 기점으로 시작하던 조사방식에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에 따라 조사위는 최근까지 5·18민주화운동 직·간접 책임자를 44명까지 확대 지목했다. 이들은 80년 오월 지휘관급의 책임자들이지만 구체적인 신원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