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천 시민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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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대
광천 시민아파트
  • 입력 : 2021. 06.08(화) 15:50
  • 이용규 기자
광주 광천동은 기억의 박물관이다. 광천공단, 시민아파트, 들불야학은 주요 구성 요소이다. 광천공단은 70~80년대 우리나라 산업화의 거대한 물결속에서 광주 최초의 계획적인 공업단지로 산업화의 현장을 열었다. 지금의 광천동 터미널이나 신세계 백화점 일대의 거대한 아파트 숲 사이에서 만나는 공단의 흔적에서는 기름때 배인 노동의 역사들이 읽혀진다. 광천공단의 입주 업체들이 1980년대 하남공단과 소촌공단으로 옮겨, 아시아자동차 후신인 기아차 공장이 공단의 존재를 말해주고 있다. 당시 광천동은 6·25 전후 피난민과 공단에 일자리를 찾아 모여든 이들이 형성한 판자촌이 많아 광주의 대표적인 달동네로 꼽혔다. 세월이 흘러 광천동은 대규모 아파트촌으로 변신을 앞두고 있다.

광천 시민아파트는 1969년 광주에서 최초로 지어진 연립주택이다. 광주시는 주거 환경개선 목적으로 3층 규모의 23㎡ 93세대, 33㎡ 91세대 등 총 184세대를 건립 제공했다. 이름만 아파트지 판자촌과 다를 것 없었다. 주민들은 각 층 입구의 공동 화장실과 세탁장에서 세면·빨래·쌀 씻는 것을 모두 해결했다. 고 윤상원열사 동생인 윤태원씨는 "화장실은 재래식이어 들어 가면 역한 냄새와 메탄가스로 코를 자극할 만큼 주거 환경이 열악했다"고 기억했다.

광천 시민아파트에는 광주·전남 최초 노동야학인 들불야학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1978년 7월 광천동 성당교리실에서 문을 연 들불야학은 배움에 목마른 노동자들이 졸린 눈을 비비며 공부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장이었다. 시민아파트에는 야학교사로 광주민주화운동의 횃불이 된 김영철·박용준·박관현(가동), 윤상원(나동) 열사가 세들어 살고 있었고, 들불야학당(다동) 교실이 있었다. 항쟁기간 민중언론 역할을 한 '투사회보'를 제작했고 한국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노래가 된 '임을 위한 행진곡' 탄생의 공간적 배경이기도 하다.

1957년 성당 공소 설립 당시 건립된 광천동 성당의 들불야학 교리실은 2004년 대건 안드레아교육관 입구 벽체만 남고 철거됐다. 도시 서민들의 애환과 광주민주화운동의 상징 공간인 광천 시민아파트는 포크레인 쇠발톱에 사라질 위기에서 가까스로 일부 살아 남게 됐다. 광천 재개발지역에 포함된 이 곳의 보존 목소리가 커졌고, 수 년 논의 끝에 광주시·서구·천주교 광주대교구·광천동주택조합이 시민아파트 나동과 성당 들불야학 교리실 복원을 위한 타협을 이끌어냈다. 현장보다 더 중요한 역사 교재는 없을 것이다. 최종 주택조합 총회가 남아있긴 하나, 시민아파트의 변신을 기대해본다. 이용규 논설실장



이용규 기자 yonggyu.lee@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