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이슈 55-1> "명예회복이라도 해 아버지 목놓아 불러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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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이슈 55-1> "명예회복이라도 해 아버지 목놓아 불러봤으면"
여순 74년 한…이제는 풀어질까 ||진실 밝혀달라 유족 신고 140여건 ||배상·보상보다 진실규명이 우선
  • 입력 : 2022. 02.13(일) 17:29
  • 김은지 기자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제공

그들이 바라는 것은 배·보상이 아니다. 국가 권력에 의한 억울한 죽음의 진상이 밝혀지길 바랄 뿐이다. 본격적인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이 시작된 '여수·순천 10·19사건' 피해 유족들이다.

보성에 살고 있는 이찬식(79)씨가 바라는 것은 온전히 부를 수 있는 '아버지'다.

지난 74년 전 그의 아버지는 '여순사건' 관련자라는 누명을 쓰고 '빨갱이' 꼬리표를 붙인 채 세상을 떴다. 1948년이었다. 이찬식 씨의 아버지 이병권 씨는 보성 복내면에서 정미소를 운영 중이었다. 어느날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한 여수 주둔 14연대 소속 군인들이 그의 정미소를 찾아 식량 제공을 요구했다. 이병권 씨는 두려움에 쌀을 내줬다. 하지만 경찰은 이를 이유로 이병권 씨를 보도연맹 책임자로 지목했다. 경찰은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이병권 씨를 총살했다. 억울한 죽음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살아남은 이들에게 '아버지'는 금기어가 됐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은 그에게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주홍글씨도 남겼다. 연좌제 탓에 공무원 시험을 합격하고도 그는 공직에 진출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74년을 보냈다.

박모(86)씨의 사연은 더 기구하다.

1948년 11월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그에게 낯선 이들이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부르며 "아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당시 13살이었던 박씨는 "저희 아버지인데요"라며 그들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낯선 이들은 경찰이었고, 좌익으로 추정되는 이들을 집에 숨겨줬다는 이유로 박씨의 아버지는 경찰의 수사 선상에 올라 있었다. 박씨와 함께 집에 도착한 경찰은 이것저것 캐묻더니 "더 조사할 게 있다"며 아버지를 끌고 경찰서로 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끌려간 박씨의 아버지는 그날 밤 구례 경찰서에서 총살 당했다. 박씨는 74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아버지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지 못한다. 박씨는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이씨와 박씨는 74년만에 용기를 냈다.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실을 이제라도 밝혀달라며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실무위원회'에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그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현재 실무위원회에 진실을 밝혀달라는 사연은 140건을 넘어섰다. 여수와 순천, 보성 등지의 유족회에서 단체 신고도 준비하고 있어 억울한 사연은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억울한 죽음에 대한 배·보상이 아니다.

74년간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던 박씨는 "배·보상을 받고 안 받고는 유족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며 "사건의 진상이 정확하게 밝혀지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명예회복만 된다면 여한이 없다"고 했다. 그는 "이번 특별법 시행과 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유족들의 원통함이 해결됐으면 한다"고도 했다.

이찬식씨도 같은 바람이다. 그는 "여순특별법은 과거를 보상하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문제라 생각한다"며 "여순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이 명명백백 이뤄져 부디 아버지 이름을 맘 편히 부를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이번 위원회 활동을 통해 여순사건이 제대로 된 역사로 기념되고 정부에게서 진심 어린 사과를 이끌어냈으면 한다"고 했다.

74년의 한이 그들의 바람대로 풀릴 수 있을지, 실무위원회에 쏠리는 관심이 커지고 있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제공

김은지 기자 eunzy@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