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산과 강이 어우러진 배산임수 전형적 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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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산과 강이 어우러진 배산임수 전형적 지형
무안 차뫼마을||김응문 동학 접주로 활동하며||자택서 무기 만들어 전투 펼쳐||일본군에 붙잡혀 일가족 효수||김 장군 일가 추모 현창비 제막||동학 지도자로 유골 첫 발견도
  • 입력 : 2022. 05.12(목) 16:32
  • 편집에디터

김응문 일가 현창비를 세우는 이유는... 김응문 일가 현창비 옆에 세워져 있다. 이돈삼

김응문 장군 일가 현창비가 세워졌다. 김응문은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가운데 한사람이다. 무안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주관한 제막식은 위령제, 진군식, 현창비 제막식, 진혼무, 마당극 순으로 이어졌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일(5월 11일․황토현 전승일)을 앞둔 지난 5월 4일 무안 차뫼마을에서다.

김응문(1849∼1894)은 '김창구'로도 불렸다. 몽탄 일대의 접주로 활동하며, 전투 자금을 모으는 데 앞장섰다. 자신의 집에 대장간을 설치하고, 갖가지 무기도 만들었다. 마을주민들도 너나 할 것 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김응문은 농민군을 모아 백산전투, 황룡강전투 등에 참가했다. 전봉준이 이끈 동학농민군 주력부대가 공주 우금치에서 패한 뒤에도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해 11월 같은 무안 출신의 배상옥과 함께 나주성 공격을 위한 고막포 전투를 펼쳤다.

하지만 농민군은 민종렬이 이끄는 관군과 일본의 연합군에게 패하고 만다. 중과부적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고막포 전투에 참가한 농민군이 2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농민군은 무안과 함평, 나주, 해남 등지의 농민들로 이뤄졌다.

고막포 전투에서 승리한 관군과 일본군은 대대적인 동학농민군 토벌에 나선다. 그때 무안에서 붙잡힌 동학 접주만도 70여 명에 이른다. 김응문은 12월 9일 일본군에 붙잡혀 목이 베어졌다. 막내동생 김자문(김덕구․1868∼1894)과 큰아들 김여정(김우신․1867∼1894)도 함께 붙잡혔다. 큰동생 김효문(김영구․1851∼1894)은 12일에 체포됐다. 나흘 사이에 일가족 네 명이 모두 효수(梟首)된 것이다.

김응문 집안에서는 이들의 시신이라도 수습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했다. 김응문의 머리만 겨우 수습할 수 있었다. 가족들은 참수된 머리를 항아리에 넣고 봉명리 앞산 둔덕에 '애기무덤' 형태로 몰래 묻었다고 전해진다.

김응문의 세 형제와 부자가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현창비는 김응문 일가를 기리는 추모비다.

'아! 동학농민혁명군의 영혼이 서려 있는 곳. 무안 차뫼마을 옥녀봉 아래 터다. 갑오년 보국안민의 기치를 들어 농민군을 이끌던 무안 동학 지도자 김응문 형제와 자제가 태어난 곳. 그해 내내 백산으로, 전주로, 서울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장렬하게 처형된 농민군의 원혼이 잠들어 있는 장소다.'

김응문 장군 일가 현창비 뒤와 차뫼마을. 도로변에 세워진 현창비 뒤로 차뫼마을이 보인다. 이돈삼

현창비에 새겨진 비문의 시작 부분이다.

현창비 제막에 앞서 지난 4월 김응문의 유골이 확인됐다. 문중에서 묘를 옮기려고 그의 무덤을 파서 본 결과, 머리 부분 유골이 고스란히 기왓장으로 덮여 있었다. 동학농민혁명 지도자의 유골이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다. 기록과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일본군의 만행도 만천하에 드러났다.

"동학농민혁명 때 희생된 농민군 가운데 유골이 발견된 건 처음입니다. 재판을 하지도 않고, 그것도 목을 잘라 효수를 한 일본군의 만행이 사실로 확인된 겁니다. 사료적 가치도 큽니다."

제막식에 참석한 박석면 무안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의 말이었다.

동학농민군에 참여한 선조들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자부심이 대단히 높다. 도로변 당산나무 옆에 세워진 김응문 일가 현창비 외에도 마을경로당 앞에 '동학혁명투사 현창비'가 세워져 있다.

1996년에 세운 비석에는 김응문 일가를 비롯한 동학농민군과 항일의병장 김용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김용길은 무안 일로에 있던 일본 헌병대를 습격해 불을 지르다가 붙잡혔다.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전까지 마을에서 해마다 추모제도 올렸다고 한다. 마을과 마을사람들의 큰 자긍심이 두 기의 현창비를 통해 묻어난다.

불굴의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을 낸 차뫼마을은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다산리에 속한다. 사창리 밀리터리테마파크에서 몽탄면 소재지로 가는 길의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 뒤편으로 서해안고속국도가 지나고 있다.

옥녀봉과 연증산이 차뫼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마을 앞으로 저만치 영산강이 흐른다. 도로 건너편의 들판 사이로 내(川)가 흐르고 있다. 배산임수의 지형 그대로다.

오래 전엔 냇가를 따라 아름드리 팽나무가 즐비해 마을의 경관이 더욱 돋보였다고 한다. 지금은 다 베어지고,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차뫼는 뒷산에 차나무가 많았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차나무를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동학 접주 김응문의 호가 '다사(茶史)'였다. 그의 아버지 김광수의 호는 '다은(茶隱)'이었다. 차나무를 많이 재배했거나, 최소한 차를 가까이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차뫼는 나주 김씨의 오래된 집성촌이다. 주변 산이 대부분 나주 김씨의 선산이라고 한다. 광주목사를 지낸 취암 김적(1507∼1579)이 첫손가락에 꼽힌다. 국회의원을 지낸 김용무․김용현 형제도 이 마을 출신이다. 김용무는 미군정기 대법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마을에 김용무 생가가 있다. 본디 10칸이 넘는 큰집이었다는데, 지금은 예전의 당당함을 엿볼 수 없다. 덧없는 세월이 묻어난다.

마을에 소를 키우는 축사가 많이 보인다. 논밭에는 소한테 먹일 풀이 베어져 널려있다. 연녹색의 사료용 풀이 푸른 산과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뽐낸다. 적막하던 차뫼마을의 봄날 풍경을 활력으로 채워준다.

차뫼마을 경로당. 그 앞에 동학혁명투사 현창비가 세워져 있다. 이돈삼

차뫼마을 풍경. 소한테 먹일 사료용 풀이 수확돼 널려 있다. 이돈삼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