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서석대>‘천상의 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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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대
[전남일보]서석대>‘천상의 화원’
이용환 논설실장
  • 입력 : 2023. 08.01(화) 12:39
이용환 실장
‘태백산맥’ 작가 조정래에게 노고단은 비극의 현장이다. 이념의 갈등과 동족상잔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은 그곳, 노고단의 비경도 그에게는 아름다움보다 슬픔의 현장이다. 토벌대의 끈질긴 추격을 피해 지리산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빨치산. 조정래는 대하소설 ‘태백산맥’에서 이들이 목격한 노고단을 이렇게 묘사했다. “노고단에 오르는 순간 그들이 마주친 것은 커다랗게 둥근 불덩어리였다. 상상하기 어렵게 큰 그 불덩어리는 해 였다.(중략)…황적색이 적색으로 변해 하늘은 더욱 붉은 빛으로 칠해졌다. 그 진해진 붉은 빛은 이제 불길이 아니었다. 환상적인 핏빛이었다. 하늘은 처연한 핏빛으로 물들어 침묵하고 있었다.” (태백산맥 4부 제9권)

해발 1507m. 노고단은 지리산의 시작이면서 끝이다. 노고단에서 해발 1915m,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25.5㎞ 주 능선은 산을 타는 사람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종주 산행 코스다. 화엄사에서 연기암, 무냉기를 거쳐 노고단까지 17㎞에 이르는 등산로도 수많은 야생화와 녹음, 계곡 물소리가 압권이다. 이슬이 깨인 숲길을 따라 만나는 자연에서는 ‘모든 존재는 오직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원효의 화엄사상도 맛볼 수 있다.

시인 이성부는 이런 노고단을 두고 ‘어머니의 웃음’이라고 했다. 날개하늘나리부터, 원추리와 비비추, 큰까치수염까지 노고단을 가득 채운 여름 꽃에 대한 찬사다. “노고단에 여시비가 내리니/산길 풀섶마다/옛적 어머니 웃음빛 닮은 것들/온통 살아 일어나 나를 반긴다.” 이원규 시인도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원추리 꽃 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이슬의 눈으로 오시라.”고 했다.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 하다면 제발 오지마시라’는 것도 시인의 바람이다.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서 지리산 노고단에 여름 야생화가 활짝 피어났다고 한다. 노고단은 과거 군부대가 주둔하고 무분별한 탐방문화로 훼손이 심했지만 1997년 복원을 완료한 후 옛 식생을 서서히 회복하는 중이다. 백운산원추리, 둥근이질풀, 지리터리풀, 술패랭이 등 환경부가 지정하는 한국고유종도 30여 종에 이른다. 길었던 장마와 이어진 폭염, 누군가의 잘못이 만든 정치권의 혼돈과 갈기 갈기 찢긴 사회 갈등까지. 어느 한 곳 마음 둘 곳 없는 현실에서 노고단에 올라 ‘천상의 화원’이 만든 멋과 향을 만끽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