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서석대>가을날의 상념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서석대
[전남일보]서석대>가을날의 상념
  • 입력 : 2023. 11.15(수) 16:27
최도철 국장
목하 가을이 깊어가며 길가 가로수마다 울긋불긋 단풍이 들더니 이마저도 싫은지 이내 옷을 벗어버린다. 점심 후 달달한 커피 한 잔 들고 늘상 가던 그 길에도 노란 은행나무잎이 나비 춤추듯 내려앉아 융단을 폈다.

회색빛 음울한 삶에 찌든 영혼들에게 진한 커피향 같은 낭만을 선사하는 가로수길을 걷노라니, ‘한국의 나나 무스꾸리’로 불렸던 포크 가수 박인희의 노래가 떠오른다.

“길가에 가로수 옷을 벗으면 떨어지는 잎새 위에 어리는 얼굴/ 그 모습 보려고 가까이 가면, 나를 두고 저만큼 또 멀어지네/ 아~ 이 길은 끝이 없는 길, 계절이 다가도록 걸어가는 길/ 잊혀진 얼굴이 되살아나는, 저만큼의 거리는 얼마쯤일까/ 바람이 불어와 볼에 스치면, 다시 한 번 그 시절로 가고 싶어라/ 아~ 이 길은 끝이 없는 길, 계절이 다가도록 걸어가는 길” (‘끝이 없는 길’ 박인희 고운 노래 모음집Ⅱ 수록).

숙명여대 시절부터 가수의 길에 들어섰던 박인희는 ‘모닥불’, ‘얼굴’, ‘하얀 조가비’, ‘방랑자’ 등 불후의 명곡들을 차례로 선보이며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낭만 가객 박인희의 노래에는 일관된 서정이 있다. 딱 이맘때와 절묘하게 어울리는 가을 노래들도 많다. 그녀의 가녀린 눈빛이, 그녀의 호소력 짙은 음색이 유독 가을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혼을 적시는 시어(詩語)로 잘 알려진 이해인 수녀와 동기인 박인희는 노래뿐만 아니라 글도 잘 썼다. 문학을 사랑했던 그녀는 한때 밤을 새워 시를 짓고 수필을 써 책으로 펴내기도 하고, 전성기 시절에는 시 낭송 앨범도 발매했다.

 11월 만추. 노래탓일까, 기분탓일까. 박인희의 가을노래 몇 소절 떠올리며 계림동 은행나무 가로수길을 걷다 보니 괜스레 마음까지 헛헛해지고, 그녀의 노랫말처럼 잊고 지냈던 얼굴들이 색바랜 흑백사진처럼 ‘떨어지는 잎새 위로 어른거린다’. 볼이 발갛던 단발머리 혜인여고 여학생, 기차도 다니지 않는 남평 간이역 철로길을 같이 걷던 사람…. 이제 그네들도 어디선가 나처럼 늙어가려니 생각하니 무단히 그리움만 짙어진다.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간다. 아침 안개와 같은 허무한 인생이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만 간다. 가을이 다 가기전에 어릴적 동무들과 뛰놀던 고향 뒷동산이라도 다녀오면 까닭모를 그리움이 잦아들까. 이런 저런 상념이 많아지는 늦가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