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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쪽에서 내려다본 골짜기 풍경(박하선, '천불천탑 사진집', 2007.) 운주사, 여백의 미 운주사 옛 절터 발굴 기회를 얻게 된 것은 돌이켜보면 행운 같은 일이었다. 그때 드나드는 탐방객들에게서 매우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한두 명이 오기보다는 무리 지어 오는 경우가 많았고 꼭 한 사람이 인솔하면서 매스컴에서 나온 보도 내용이나 문학인들이 문학적 소재로 언급한 이야기를 자기 나름대로 상상력을 더해 신명 나게 떠들어대는 것을 자주 목격했다. 그때는 틀린 생각이라며 바로잡아 주고 싶기도 했다. 반짝이는 눈동자들을 보면서 감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만둘 때가 많았다. 그때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던 것도 '운주사의 실체'에 '여백의 공간'으로 비어 있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1941년 고유섭의 연구 이래로 8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운주사의 총체적인 실체...
편집에디터2020.05.21 13:291. 실상사 석등 및 점등 계단(828년경, 사진 황호균)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세상의 어둠을 밝혀주는 등불 어둠을 밝히려는 욕망에서 발명된 조명기구 절터의 잡초더미 속이나 천년고찰의 불전 앞마당에서 우뚝 솟은 석등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과거의 역사 속으로 잠시나마 빠져들게 된다. 그 마당에서 일어났던 아픈 역사의 질곡을 오롯이 지켜봤을 석등의 눈높이에서 다시금 지난 세월을 되새겨본다. 등(燈)은 인간이 어둠을 밝히려는 욕망에서 발명된 조명기구이다. 인간이 자연의 주술적 영역에서 벗어나 신만이 만들 수 있다는 불을 스스로 관리하게 됨으로써 등은 인간 문명의 상징임과 동시에 그 등불은 신비적 관념에서 비롯된 종교적 진리의 상징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인류의 문명생활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등기(燈器)는 토기를 제작하여 사용하던 선사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
편집에디터2020.05.14 16:521. 강진 사문안석조상 전경(1990년대 촬영, 사진 문화재청) 국내 최초 도깨비 조각상의 출현 월출산 천왕봉 아래 남쪽 산기슭 1만여 평의 광활한 대지에 펼쳐진 월남사의 옛터. 거기에는 덩그러니 놓인 삼층석탑과 진각국사 혜심의 탑비만이 지난 역사를 웅변하는 듯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하고 고개를 조금만 돌려보면 삼층석탑에서 약 3.6㎞의 거리에 '사문안(寺門안)'이란 곳에 있었던 입석 모양의 직육면체 돌기둥에 도깨비 같은 것들을 가득 새겨놓은 또 하나의 놀라운 초국보급 문화재를 만날 수 있게 된다. 도깨비 조각상의 원 위치 및 이전・회수 과정 도깨비 조각상은 퇴동마을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 길가에 위쪽 끝부분만 지상으로 돌출되어 있었다고 한다. 마을회관에서 서남쪽에서 500미터 떨어진 거리이다. 광복(1945년)되기 2~3년 전에 월남사...
편집에디터2020.04.30 14:221. 후불벽 뒷면 백의관음도 전경(사진 문화재청) 불전 후불벽 뒷면에 그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벽화 무위사 극락보전의 또 하나의 기념할 만한 최고의 가치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불전 후불벽 뒷면에 그려진 관음보살도 벽화라는 데에 있다. 대개 불전 후불벽 뒷면에 백의관음도를 그리는 경우는 대부분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보편화한 것인데 후불벽화와 같은 솜씨로 보아 조선전기인 1476년경에 함께 제작된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현재 남아 전하는 후불탱화(벽화) 뒤 벽면에 그린 백의관음도 가운데 전체적인 구성과 그림의 품격이 가장 뛰어나다. 후불벽은 544년이 지났지만 지탱하는 가구와 흙 벽면이 훼손 없이 견고하다. 흙벽에 천연염료로 그린 그림은 아직도 막 붓을 놓은 듯 선명한 색채에 탄성을 자아낸다. 백의관음과 경배하는 노승 극락보전 후불벽화인 아미타여래삼존벽화(보...
편집에디터2020.04.16 13:031.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여래삼존좌상(사진 황호균) 극락보전 최고의 문화재적 가치, 입체와 평면의 예술적 완성 무위사 극락보전 내부에는 놓치기 쉬운 국보급 문화재가 있다. 그동안 건물 자체나 화려한 벽화들의 명성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은 극락보전의 실질적인 주인공으로 극락보전이나 후불벽화도 사실상 이 '아미타여래삼존좌상'을 위한 건물과 배경화에 지나지 않는다. 무위사 극락보전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문화재적 가치도 후불벽화와의 조화 속에서 일구어낸 입체와 평면의 예술적 완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각과 회화의 절묘한 앙상블 극락보전 안에 들어와 불단 위의 삼존불상과 후불벽화를 함께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삼존불상이 후불벽화를 압도하지 않고 주존불화 무릎 높이 아래에 배치된 공간 구성의 조화로움에서 밀려온 진한 감동 때문이다. 삼존불상은 건물 내부 공간의 규모에 비...
편집에디터2020.04.05 16:151.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 전경(사진 황호균)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보다 22년 앞선 종교건물 벽화 무위사 극락보전의 경이로움은 비단 건축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건물 내부 흙벽에 채색하여 그려진 여러 종류의 벽화는 황홀경 그 자체다. 일찍부터 그러한 진가는 드러나서 이번에 다룰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국보 제313호, 1476년)'에 그치지 않고 '무위사 극락보전 백의관음도(보물 제1314호, 1476년)'와 '무위사 극락보전 내벽사면벽화(보물 제1315호, 1430년, 18〜19세기)'에 이르기까지 국보 1종과 보물 2종으로 지정될 정도로 그 가치는 엄청나다. 후불벽화가 그려진 1476년이란 시기는 조선 제9대왕 성종 7년이고 중국 명 제8대 황제 헌종 12년이다. 서양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1498년) 프레스코 벽화보다 ...
편집에디터2020.03.19 13:471. 무위사 극락보전 우물천장과 보개형닫집(사진 문화재청) 연등천장에서 우물천장으로 옮겨가는 과도기로 국내 최초 사례 천장은 대청마루 천장처럼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는 '연등천장 (椽燈天障)'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불상을 모시는 불단 위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짜 만든 '우물천장'을 마련하여 먼지 등으로부터 불상과 진설 음식을 보호하려는 보다 발전된 형태의 천장 형식이 일부 가미되었다. 특히 불상 머리 위에는 고려시대에 유행하는 일체형 목가구식(寶殿形)으로 독립된 지붕 모양의 '보궁형(寶宮形)닫집'이 아니라 천장 일부를 감실처럼 속으로 밀어 넣은 '보개형(寶蓋形)닫집'을 우물천장 사이에 설치하여 이른바 '보개천장'을 완성했다. 이러한 불단과 닫집의 형태변화는 독존불 위주에서 삼존불로의 협시불을 등장시키는 불단 공간의 확장성에서 기인하며 아미타불 신앙에만 그치지...
편집에디터2020.03.05 13:521. 부석사 무량수전 내부 바닥 전돌(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18년) 사찰 불전 내부 바닥 소재, 전돌(方塼)에서 마루로의 변화 요즘 사찰 불전들의 내부 바닥은 모두 마루(抹樓)로 이루어졌다. 조선 후기 불전도 그러했다. 하지만 시대를 좀 거슬러 올라가면 봉정사 극락전(12∼13세기)이나 수덕사 대웅전(1308년), 부석사 무량수전(1376년) 등과 같은 고려후기 불전에는 모두 전돌이 깔려 있었다. 조선전기에 들어와서도 무위사 극락보전 건립 초기 당시인 1430년에는 바닥이 전돌이었다. 그 뒤 불과 46년이 지난 1476년경에 갑자기 마루를 설치하게 된다. 그동안 조선시대 마루 설치의 시기에 대해 16세기 말과 17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러서야 보편화 되었다고 피상적으로 알려져 왔다. 조선전기 몇 안 되는 불전 사례 중 봉정사 대...
편집에디터2020.02.20 13:06어려운 한자 투성이의 상투적인 문화재 해설에서 벗어나 역사적인 배경과 문화사적 의미를 알기 쉽고 풀어낸 '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가 격주로 여러분 곁을 찾아갑니다. 필자는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불교문화재 전문가로 일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해왔습니다. 절터 발굴뿐만 아니라 사찰 연혁 및 불교 문화재 연구와 교육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으며 왕성한 저술활동으로 지역 문화계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편집자주〉 1. 1958년 무위사 전경('무위사 극락전 수리공사보고서', 1958, 국립박물관.) ○월출산 남서쪽 자락에 자리한 명찰, 무위사 1980년대 초 무위사 극락보전 내부에서 받은 충격과 환희는 아직도 생생하다. 지난 40여 년 동안 국내는 물론 해외 불교문화권 답사를 다녀 보아도 그 가치가 전혀 퇴색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소중해져 갔다. 요즘에는 불전 내·외부에서 발...
편집에디터2020.02.05 13:12[{IMG01}] 단아하고 소박한 건축미, 공간 분할의 절제미 무위사 극락보전은 단아하면서도 소박한 건축미가 돋보인다. 옆면의 기둥과 상부의 보가 만나 이루어지는 공간 분할의 절제미는 무엇보다도 가장 뛰어나다. 나뭇결이 드러난 소슬 빗살문은 소박하면서도 단정하다. 앞면과 옆면이 모두 3칸으로 이루어졌으며 옆면은 앞・뒷면이 좁은 한 칸이다. 기둥 위에 공포(栱包)가 하나씩만 있는 주심포계(柱心包系)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을 한 단층 겹처마 집이다. 주심포 양식은 지붕 하중을 기둥으로 분산하기 위한 공포를 기둥에만 둔 구조이며 간결하면서도 아름답고 매우 세련된 기법이다. 건물 내부는 기둥이 없이 툭 터진 넓은 공간을 연출한다. 땅바닥에서 너무 높거나 낮지도 않은 적당한 높이에 막돌로 쌓아 올린 후 잘 다듬어진 석단(石壇)에 갑석(甲石)을 ...
편집에디터2020.02.06 13:48어려운 한자 투성이의 상투적인 문화재 해설에서 벗어나 역사적인 배경과 문화사적 의미를 알기 쉽고 명쾌하게 풀어낸 '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가 격주로 여러분 곁을 찾아갑니다. 필자는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불교문화재 전문가로 일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해왔습니다. 절터 발굴뿐만 아니라 사찰 연혁 및 불교 문화재 연구와 교육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으며 왕성한 저술활동으로 지역 문화계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편집자주〉 1. 1958년 무위사 전경('무위사 극락전 수리공사보고서', 1958, 국립박물관.) ○월출산 남서쪽 자락에 자리한 명찰, 무위사 1980년대 초 무위사 극락보전 내부에서 받은 충격과 환희는 아직도 생생하다. 지난 40여 년 동안 국내는 물론 해외 불교문화권 답사를 다녀 보아도 그 가치가 전혀 퇴색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소중해져 갔다. 요즘에는 불전...
편집에디터2020.01.09 1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