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12>화순 운주사지(사적 제312호) ③ 천불천탑 운주사, 그 탁월한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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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12>화순 운주사지(사적 제312호) ③ 천불천탑 운주사, 그 탁월한 가치
추상적인 조형성, 독창적인 군집성, 사역의 개방성
  • 입력 : 2020. 06.18(목) 13:30
  • 편집에디터

1. 석조불감과 남북에 놓인 쌍탑 풍경(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14년 촬영)

학계의 연구 현황

도선의 풍수도참설風水圖讖說을 계승한 승려가 '산천비보진압설山川裨補聳員壓說'의 이론적 배경으로 현종대 이후인 고려 초기에 운주사를 창건했다거나 고려 중후기에 천불신앙을 바탕으로 이른바 천불이 조성되고 대승불교 경전인 화엄경과 밀접하게 결부된 불탑신앙에 근거해 천탑이 만들어졌으며 칠성석의 신앙적 배경인 칠성신앙도 밀교신앙의 한 형태라는 견해는 차라리 일반적인 해석에 가깝다.

석탑 탑신부의 문양에 착안하여 해석을 시도한 몇 편의 글들이 눈길을 끈다. 의상의 법성게정진도法性偈精進圖에 기원을 둔 십파라밀정진도十波羅密精進圖가 밀교화·주술화되어 나타나는 이른바 화엄과 밀교의 결합으로 파악하는 새로운 견해가 등장하였다.

원나라 군부가 고려 백성들과 물자를 강제동원해 세운 수난의 불사라는 외압설에 자극을 받아 몽골 현지를 답사하고 관계자의 인터뷰를 실으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신문 연재 기사도 기억난다. 2003년 12월 몽골의 저명한 교수 3명을 상대로 취재한 결과 탑신에 새겨진 ×·◇ 문양 등의 이질적인 요소들이 몽골의 역사유물과 현대생활에서 많이 발견된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천불천탑은 삼별초를 진압한 몽골군의 전승기념물일지 모른다는 주장까지도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2006년에는 운주사는 불교유적지가 아니라 해상왕 장보고를 기리는 추모 유적지라면서 경내에 장보고의 유골과 유물이 묻힌 능묘가 있으니 관련 단체·기관들에 공개적인 탐사와 발굴을 제안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도 벌어졌다.

백제가 폐망할 때 중국 남중국 일대로 건너갔던 백제 유이민들이 저장성浙江省과 푸젠성福建省 등지에 흩어져 살다가 신라가 폐망하자 11~12세기에 환국하게 되며 그 경로는 주산열도-서남해안-흑산도의 연안을 끼고 150회에 5천 명이 이주하였고 이들에게 고려 판정 백성한 사실이 농주 읍지에 기록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 밖에도 10편의 연구 논문이 더 발표되었다. 대부분 복식과 설화를 비롯한 천문학이나 창건 배경에 관한 사상적 연구들로서 새로운 자료의 발굴을 통한 접근이라기보다는 '재해석'을 시도한 정도에 지나지 않은 결과물들이다.

최근 각기 다른 각도에서 접근했던 일련의 연구들(김일권, 김창현, 허일범, 황호균)의 성과를 통해 운주사가 중국의 음양 5행 사상과 천문역학적 성격을 지닌 티베트 후기 밀교의 '시륜경時輪經'에서 그 사상적 배경을 찾을 가능성이 매우 커졌다.

문학적 상상력, 그 성공과 딜레마(Dilemma)

그동안 학계의 조심스러운 연구 태도와는 달리 문인들은 자유로운 상상력을 무기로 운주사에 대하여 나름대로 재미있는 해석을 시도하였다. 황석영의 '장길산'과 이재운의 '소설 토정비결', 박혜강의 소설 '운주'등에서 활용된 문학적 상상력 덕택에 운주사가 여러모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장편 소설 '장길산'은 조선 후기인 18세기 사회를 배경으로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고려 때에 조성된 천불천탑을 끌어들인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 16세기의 지족선사를 등장시킨'소설 토정비결'은 한술 더 뜬 소설 속 '상상의 나래'를 펼친 것이다. 아울러 박혜강의 '운주'는 소설에서 출발하여 소설로서 막을 내린 그야말로 소설 같은 이야기이다. 더구나 ×·◇ 문양의 유사성만으로 천불천탑은 삼별초를 토벌한 몽골군의 전승기념물이라는 정동주의 주장이나 '명당탑 범씨 설화'를 언급하면서 명당탑 아래 구릉이 '해상왕 장보고 능묘'라는 최홍의 주장 역시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하는 선에서 그치고 말았을 뿐 가장 중요한 논거 역시 가설이란 점 때문에 허망하기만 하다.

이처럼 문인들의 문학적인 상상력은 노력과 비교하면 학술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해도 일반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내고 그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공로는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들의 허망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운주사 천불천탑의 신비는 손상되지 않았고 더욱 불가사의한 미스터리로 우리 곁에 남았을 뿐이다.

운주사,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

2000년대 초반부터 줄기차게 '화순 운주사 천불천탑'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신청하자고 제안하고 여론을 조성한 것이 20여 년 만에 성과를 맺게 되었다. 2017년에 '화순 운주사 석불석탑군[Stone Buddhas and Pagodas at Hwasun Unjusa Temple]'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2017. 1. 24.)되었다. 발굴에 참여한 인연으로 다양한 연구 활동을 펼치고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등 함께 힘을 모은 끝에 비로소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는 전제 조건인 '탁월할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운주사와 천불천탑에 대한 문화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인 'OUV'는 '불교를 수용하는 나라들 가운데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추상적인 조형성'과 '석불?석탑의 배치 형태에서 보이는 독창적인 군집성群集性', '사역寺域 공간의 개방성開放性'에서 찾아진다.

운주사 천불천탑의 '추상적인 조형성'은 파격성을 바탕으로 단순하면서도 현대미술에서 보이는 세련된 절제미를 내포한다. '독창적인 군집성'은 동서 골짜기를 입체적으로 폭넓게 활용하면서 석불과 석탑을 독창적으로 배치하여 궁극적으로는 신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배려에서 오는 현상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은 추상성과 군집성은 한국 사찰뿐만 아니라 불교를 수용한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특성이다.

나아가 옛 건물지와 천불천탑의 이원적인 배치뿐만 아니라 개개의 석탑과 석불군이 또 하나의 탑과 금당처럼 신앙의 대상물로 조성된 점도 운주사에서만 볼 수 있는 탁월한 설계에 의한 '사역 공간의 개방성'이다. 이러한 점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시대, 고려 시대 초기의 귀족이나 왕실불교에서는 보기 힘든 고려 후기 민중불교의 신앙 형태로 주목된다. 결과적으로 '사역 공간의 배치가 개방적으로 구성'된 것은 특권층만을 위한 폐쇄적인 용도라기보다는 누구나 아무런 제약 없이 종교대상물에 경배하기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공간적 배려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러한 점이 골짜기에 석탑과 석불을 배치하는 구조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더구나 석조불감의 석실상배불石室相背佛이나 산정 미완성 좌불상과 입불상(일명 와불), 칠성석, 문양 탑, 원반형 탑과 원구형 탑, 동냥치 탑 등은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고 운주사에서만 볼 수 있는 독보적인 조형물이다.

석조불감의 석실상배불은 운주사 사역의 중심부에 위치하는 지형적으로나 신앙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예배대상물이다. 보통 사찰에서의 일반적인 불상의 배치는 불전 건물 내에서 전면前面을 향하는 단면적인 형태로 건물 내에 입실한 예배자들만을 위한 폐쇄성이 짙은 조형물이다. 여기와 비교해 운주사의 석실상배불은 돌집 안에 모신 불상이 남북면을 향하는 양면적인 형태로 입체적인 배치양상을 보인 야외의 예배자들을 폭넓게 수용하려는 개방성이 강조되는 독특한 형태의 조형물이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운주사 석실상배불'은 그 학술적이고 문화사적인 가치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서쪽 산정의 자연 암반에 있는 '좌불상과 입불상'(일명 와불)은 조각하고 털어내지 못한 미완성 상태이며 석불 제작공정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토목건축 공학적인 과학기술과 천문학이나 도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이 불상들은 무게가 250여 톤에 달해 토목건축 공학적인 관점에서 고려 시대의 '토목건축기술'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가장 높은 위치에 석불을 조성하려고 한 종교적인 의도도 돋보인다. 특히 자연 암반에 불상을 조각하고 털어내는 과정인 '석불 제작공정'을 밝히는데 중요한 유물이다. 더불어 칠성석을 기준으로 북극성 방향에 위치하여 밤하늘의 북극성과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상징하는 조형물로 조성된 점은 당시 천문학의 기술 수준과 도교적인 관점을 이해하는데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칠성석은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을 수 없고 우리나라에만 있는 탁월한 '별 등급 조형물'임과 동시에 고려 시대의 천문학 기술 수준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다. 원반 지름의 크기와 배치 각도가 북두칠성의 밝기나 방위각과 매우 흡사하여 '북두칠성 등급 실증 유물'로서의 그 가치를 세계의 천문학계에 내놓을만하다. 지금까지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북두칠성 등급 유물'이라고 한다. 아울러 이러한 칠성석은 북두칠성에 제사를 지내는 도교에서의 중요한 신앙 대상물로 도교적 성격도 드러난다.

방형 옥개석 탑의 면석에 표현된 문양은 운주사 석탑의 수수께끼임과 동시에 가장 특징적인 요소이다. 탑신의 면석에 표현된 마름모(◇, ◈)·×교차(×, ××)·수직사절(>|||||||<) 문양은 기본적으로 마름모(◇) 도형의 변형이다. 지금까지 불교가 전래된 나라에서 마름모 문양 탑은 발견되지 않았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다양하게 나타난 특이형 석탑 가운데에서도 가장 파격적인 요소이다. 이는 우리 선조들이 새롭게 창출한 기발하면서도 파격적인 조형 기법이며 이들 문양 탑들이 마름모 형태로 배치된 점 또한 흥미롭다.

원반형 탑과 원구형 탑, 동냥치 탑도 세계적으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독창적인 조형성으로 그 가치가 높다. 이러한 탑의 옥개석 형태는 전통적인 목조 건축물에서 디자인을 빌린 우리나라 석탑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방형 옥개석의 형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호떡 모양의 원반형 옥개석이나 바루鉢盂 모양의 원구형 옥개석, 암반에서 떼어낸 판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얹은 동냥치 옥개석들은 그 파격적이고도 독창적인 조형성을 완성했다.

운주사와 천불천탑은 완전성과 진정성이란 조건에도 충족된다. 완전성이란 측면에서 볼 때 창건(고려 시대 11세기 이전)에서부터 폐사(16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전기에 걸쳐 6백여 년간 종교적으로 왕성한 신앙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정통적인 불교와 밀교, 도교, 천문학, 석불?석탑의 조형·축조술 등 종교와 과학 기술의 총체적인 집대성의 결과물로 운주사와 천불천탑이 조성·유지되었다. 진정성이란 측면에서의 운주사는 11세기부터 21세기까지 천년 동안 같은 장소에서 지속해서 신앙 행위가 이어져 온 문화유산으로 모든 유물이 진품임과 동시에 출처가 분명하며 재질과 기법 등이 원래의 가치를 잘 보존하고 있다.

2. 석조불감과 남북에 놓인 쌍탑 풍경(사진 황호균)

3. 눈 덮인 석조불감과 남북에 놓인 쌍탑 풍경(사진 박하선)

4. 운주사지 구층석탑 전경(보물 제796호, 사진 황호균)

5. 운주사지 구층석탑 꽃 문양(보물 제796호, 사진 황호균)

6. 운주사지 구층석탑 마름모 문양(보물 제796호, 사진 황호균)

7. 운주사지 칠층석탑 전경과 마름모 문양(사진 황호균)

8. 운주사지 칠층석탑 전경(사진 황호균)

9. 운주사지 칠층석탑 마름모 문양(사진 황호균)

10. 운주사지 삼층석탑 마름모 문양(사진 황호균)

11. 운주사지 칠층석탑 마름모 문양(사진 황호균)

12. 운주사지 석탑 문양 모음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